제120화 저거 세워서 압류해. 저거(1)
투마로우 금융지주회사.
투마로우 상업은행 회장은 앤드류가 맡았고 투자은행 회장은 마이클이 맡았다.
바꿔야 되지 않나 싶었지만 앤드류가 투자은행은 정직한 마이클이 적격이라고 해서 그대로 밀고 나갔다.
앤드류가 상업은행을 맡는 건 그냥 날로 먹는 것 같은데.
하지만,
재준은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의 부서에 수천 명의 사람을 임명하는 두 명을 보고 다시 한번 새삼 느꼈다.
그냥 날로 먹는 게 아니구나.
역시 인맥 관리는 내 체질이 아니야.
대부분의 직원들은 투자은행의 본연의 임무인 고객과 자본시장의 연결을 맡았다.
재준은 Proprietary Trading를 맡았는데 직역하면 ‘소유주 거래’ 정도 되려나.
은행 자산을 굴리는 팀이다.
여기에 M&A의 두 거물인 페렐라, 워서스틴, 정크 본드의 왕 윌켄, 공매도의 미친개 퀴니코와 함께 움직였다.
물론 뒤처리 전문 강호석과 박민수가 150명이나 되는 팀을 이끌고 제일 바쁘게 뛰어다녔다.
재준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보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응, 페렐라. 어서 와.”
“여기 퀴니코를 데려왔습니다.”
그제야 돌아본 재준은 아주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퀴니코.”
“반갑습니다. 보스.”
역시 관계 정리는 빨라.
“근데 뭘 보고 있었습니까?”
“페렐라, 아주 맘에 안 들어. 우리 눈앞에 있는 저 66층짜리 빌딩, AAG빌딩 말이야. 하루 중 절반은 내 사무실에 그늘을 지게 만든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다고 건물을 옮길 수도 없고.”
“퀴니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뜬금없는 질문에 퀴니코는 어깨를 들썩였다.
얘기 들은 거와 달리 저런 사소한 거에 집착하네.
똑똑.
“오랜만입니다. 보스.”
“윌켄, 어서 와요. 의논할 일이 있어요.”
“보자마자요?”
“저거.”
재준은 AAG빌딩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격앙된 목소리를 내질렀다.
“어떻게 안 될까?”
“사게요?”
“가능하면.”
“그럼 지금이 적기입니다. 911 이후로 테러의 타깃이 되는 게 두려워서 고층 빌딩 가격이 30%나 떨어졌습니다.”
“그래요?”
설마 또 당한다고 겁먹은 거야?
“당장 사세요. 투마로우 본사로 삼아야겠어요. 지금 시세보다 50% 더 준다고 하세요.”
저 AAG빌딩이 2008년에 한국 금융회사에 팔리긴 한다.
1억 5천 달러 정도에.
“오케이. 잠시만요.”
윌켄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고개 몇 번 끄덕이고 ‘그레이트’를 두 번 외쳤다.
핸드폰을 끊고 재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샀습니다. 이제 AAG빌딩의 주인은 보스입니다.”
퀴니코는 이 황당한 상황을 보며 눈만 껌뻑였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1억 달러 빌딩을 무슨 아침 모닝커피 마시듯 산 거야?
놀란 눈을 한 퀴니코를 윌켄이 보며 미소 지었다.
“마침 AAG가 건물 매각을 부동산 관리회사 CBRE에게 위임했대. 여러 나라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본격적인 입찰을 한다는 거야. 대충 가격이 1억 달러라고 하길래. 1억 5천에 산다고 했어. 보스, 혹시 지금 가보시겠습니까? 66층은 비어있다는데.”
“역시 윌켄은 빨라. 자, 그럼 회의는 저리로 이동해서 합시다.”
퀴니코는 이들을 따르며, 지금까지 자신도 한 미친놈 한다고 들었지만 이건 아예 격이 다른 미친놈 집단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신은 공매도의 미친개다.
공매도를 하려면 세상을, 기업을, 사람을 삐딱하게 봐야 한다.
어딘가에 하자가 있고 그 하자가 기업을 무너뜨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공매도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위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근데 내 보스가 된 저 사람.
하자가 있는 기업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는 자신과 달리, 하자가 없어도 만들어서 무너뜨리는 인간이다.
아니, 그늘이 드리우면 서늘하고 좋지.
맘에 안 든다고 사버려?
1억 5천만 달러를 주고?
AAG빌딩이 무슨 비스킷이야?
***
AAG빌딩 66층.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소파와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빌딩 매각을 위해 부동산 관리회사 CBRE가 미리 마련해 놓은 최고급 소파였다.
재준은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항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게 없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
“여길 아예 화이트호텔 스위트 룸같이 개조하죠.”
“그거 괜찮네. 괜찮아. 프랑스에서 묵었던 그곳 아주 편하던데. 그렇게 합시다.”
“제가 화이트호텔 인테리어 부서에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좋아, 페렐라.”
벌컥.
이때 문이 열리고 당황한 표정을 한 워서스틴이 들어섰다.
“아니 가면 간다고 연락을 주고 가야지. 나 혼자 뻘쭘하게.”
“아, 미안, 워서스틴. 워낙 보스가 급하게 결정한 일이라 그랬어.”
“아니 그래도…….”
와!
워서스틴은 창밖을 보더니 탄성을 질렀다.
“아니 보스. 이건 굉장한데요. 잘 산 거 같아요. 가슴이 웅장해지네.”
“자산 가치도 꾸준히 올라가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지.”
최소한 세 배는 올라가니까.
모두 소파에 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을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아르헨티나가 기존 채권을 리파이낸싱 하겠다?”
이 일을 진행하고 있던 워서스틴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동안 발행한 고금리 채권을 갚을 길이 없으니까요. 아르헨티나로선 그게 최선일 겁니다.”
“아니, 돈 빌려 써놓고 리파이낸싱을 한다고?”
우리가 아는 리파이낸싱은 기존 높은 금리 대출을 낮은 금리 대출로 갈아타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 부도를 낸 후 리파이낸싱은 결코 좋은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채권을 발행할 테니 기존 채권과 교환하자는 수작이다.
일단 고금리를 저금리로 바꾸고 전체 대출액도 좀 깎고.
일명 채권 스와프라고도 한다.
“우리 말고 다른 채권자들은 이걸 승인한다고?”
“대부분 채권자들은 동의했습니다. 아예 못 받고 시간만 죽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받자는 거지요.”
“얼마나 변제한다고 하는데?”
“30%입니다.”
“뭐, 30%?”
뭐 이런 칼뿐만 아니라 총까지 든 날강도 같은 놈들을 봤나.
“아르헨티나 소송은 어떻게 됐어?”
“소송이 진행됐겠습니까? 아주 푹푹 썩히다 한 5년쯤 지나면 꺼내 들고 진행하겠지요.”
“그렇단 말이지. 근데 진짜 아르헨티나가 돈이 없는 걸까, 난 그게 궁금해.”
읠켄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저 고금리 채권을 없애는 겁니다.”
930억 달러 부도.
10% 이자만 일 년에 93억 달러.
근데 10%는 양호하고 나중에 30%짜리 채권도 있다.
“원금도 깎자고 하면 찬성하는 이들이 있을까?”
“국가니까. 천천히 진행하면서 진을 빼는 겁니다.”
“난 기다릴 생각이 없는데. 어쩐다.”
워서스틴이 다시 나섰다.
“그래서 일단은 뉴욕남부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그건 잘했네.”
왜 미국 법원에 소송을 낼까?
그건 미국 법원에서 승소하면 아르헨티나는 미국에서 다시는 채권 발행을 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아마 수출도 못 하지.
워서스틴이 재준에게 설마 하는 맘으로 물었다.
“승소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Pari Passu 조항이 있잖아.”
“아, 이걸 왜 몰랐을까요. 하하. 보스는 별걸 다 머릿속에 담고 다니네요.”
Pari Passu 조항은 국내에는 채권자 평등의 원칙이다.
채권 발행할 때 통상적으로 별생각 없이 계약서에 넣는다.
이게 뭔 말이냐면, 채권을 발행한 기업이든 국가든 파산하면 재산을 정리해서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는 의미다.
파산해야 발생하는 조항이니 당연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특히 국채라면.
근데 웬걸 아르헨티나가 파산을 했네.
그럼 아르헨티나를 정리해서 나누어 가져야 하나?
당연하지.
아르헨티나 다 팔면 930억 달러는 충분히 갚고도 남는데.
재준은 Pari Passu 조항을 들어 파산했으면 아르헨티나를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협박할 생각이었다.
***
아르헨티나 카사 로사다 궁.
부에노스아리에스에 있는 대통령 궁으로 전체가 분홍빛을 내는 저택이다.
한국의 청와대, 미국의 백악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화려한 궁과는 다르게 안에서는 대통령과 재무장관이 은밀한 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발행한 채권이 총 930억 달러란 말이지요.”
“네. 근데 채권자들이 정말 받아들일까요?”
“한심한 놈들. 지들이 어쩔 도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니면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시간만 지날 텐데.”
아르헨티나는 채권자에게 채권 스와프로 부채의 70%를 탕감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였다.
주로 유럽과 아시아를 상대로 채권을 발행했기에 자신들의 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다.
이때,
똑똑.
비서실장이 허옇게 뜬 얼굴을 하고 들어섰다.
“대통령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투마로우가 미국 법원에 우리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뭐요?”
대통령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소송을 걸었습니까?”
“프랑스의 400억 달러 저희 국채를 7%에 전부 투마로우가 사들였답니다.”
“그게 왜 그리 갑니까? 도대체 일 처리를 왜 그렇게 한 겁니까? 미국은 절대 안 된다고 했잖아요?”
고의 부도.
이번 국가 부도 선언은 철저히 계산되었고 미국에는 전혀 채권을 발행하지 않았으며 미국과 관련된 금융기업에도 절대 팔지 않았다.
다른 나라는 다 등을 돌려도 미국만 의지하면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아르헨티나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과 남미 국가들.
이들만 붙들고 있다면 유럽과 아시아를 당분간 멀리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국제 관계야 자국의 이익이 되면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산유국이니까. 그들은 석유를 믿었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다그치자,
“투마로우가 몇 개월 전에 프랑스에서 거대 은행 합병에 관계했다고 합니다. 그때 보상으로 저희 국채가 흘러 들어간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니, 참 내. 그래서 투마로우가 원하는 게 뭡니까?”
“원금 100% 상환입니다.”
“뭐라고요? 7%에 사들여 놓고 100%를 다 달라는 겁니까? 아주 도둑놈들이잖아.”
누가 누굴 욕하는 걸까?
“저희도 변호사를 선임해서 맞서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미국에서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하고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네.”
“그리고 재무장관. 투마로우를 제외한 나머지 채권단과 채권 스와프에 대한 재계약을 마무리 지읍시다. 여기서 나머지 채권자들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면 투마로우도 별수 없이 따를 겁니다.”
“네.”
***
속전속결.
아르헨티나는 나머지 채권자들에게 채권 스와프를 실행하여 신채권으로 교환했다.
채권자들이 크게 항의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다음 달부터 신채권에 대한 이자를 지급한다는 제안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