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117화 (117/477)

제117화 다 망하는 꼴 최선을 다해 지켜보겠습니다(6)

“그럼, 엔터와 KK에너지의 계약이 임재준 귀에 들어갔다?”

“바로 그거야. 1조 5천억 원이라는 금액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겠어. 엔터와 KK에너지, 그리고 윌켄 아니야?”

“그리고 임재준.”

“이제 아귀가 맞아. 그래서 루머를 퍼뜨리고 KK 그룹 계열사 주식을 내부 거래할 때 전부 낚아챈 거야. 그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지.”

“에너지 사장.”

“그래.”

“에너지 사장은 그럼……. 이런 X발. 그 새끼가 제일 먼저 주식을 던지겠네.”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증권 사장은 반은 포기한 얼굴을 들었다.

“이제 어떡한다.”

“회장님에게 알려야지?”

“아니야, 잘 생각해 봐. 두 번째 문자. 임재준은 그걸 실행하지 않으면 전부 죽인다는 메시지야. 자넨 분식회계를 하고 우린 우리 지분을 털고 나가라는 거지. 아마 우리 지분도 임재준이 거두어 가겠지만. 가만, 우리 지분도 거두면? KK 그룹을 인수하려는 건가?”

“왜?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모르지. 아마 KK 그룹 계열사 어딘가 임재준과 연관이 있겠지. 분명 그의 신경을 건드린 거야. 임재준은 지금까지 먼저 공격한 적이 없거든. 우리 그룹 꼴을 봐. 탐이 나게 생겼냐고. 분식회계까지 해서 엉망인데.”

“암튼 자네와 난 아니잖아.”

“그렇지, 난 임재준을 만난 적도, 현재증권과 말을 섞은 적도 없으니까. 오히려 난 증권 재벌로서의 임재준을 굉장히 존경해. 근데 자네는 임재준과 혹시 만난 적 있어?”

“당연히 없지. 난 종합상사라고. 돈 빌리기 위해 싫은 소리 해야 하는 우리가 왜 척을 져. 에너지라면 모를까.”

에너지라면 모를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둘이 ‘허’ 하고 한숨을 쉬었다.

1년 전부터 KK에너지는 엔터와 손을 잡더니 은행들이 이래서 한심하다는 듯 괜한 투정을 부렸다.

엔터가 1조 5천억 원의 KK에너지 대출 채권을 리자드에게 알선해 주자 자금이 마련되었다.

“맞지?”

“맞네. 맞아.”

“KK에너지는 임재준에게 뭘 잘못했을까?”

“내 생각엔 엔터와 관계가 있을 것 같아. 지금 엔터를 무너뜨리고 있는 건 임재준이니까.”

“어쨌든 난 장부를 정리할 테니. 자넨 현재증권 동향 좀 파악해.”

***

현재증권 회장실.

SS에너지 사장이 임병달을 방문했다.

재준도 옆에서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탁합니다.”

“적대적 인수를 거두면 SS에너지가 자사주 매입을 시작한단 말이죠.”

“네, 이미 자금 계획도 세웠습니다.”

재준이 나섰다.

“혹시 KK에너지를 인수할 생각은 없습니까?”

재준아.

임병달은 ‘이건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라는 눈으로 재준을 쳐다보았다.

놀란 건 SS에너지 사장도 마찬가지.

KK에너지 인수?

“어, 그건, 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저흰 그런 자금을 만들 만한 여력이 안 됩니다.”

“여력이 되게끔 해 드리면요.”

하하하.

SS에너지 사장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대출을 생각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저희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준아, 사장님이 하기 싫…….”

“대출이 아니라.”

재준이 임병달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KK에너지를 자사주 마련할 자금 정도면 충분히 인수할 수 있게 만들어 드리려고요.”

“그건 또 무슨…….”

이 업계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게 아닐까.

SS에너지 사장의 얼굴에 경악스러움이 내려앉았다.

마치 장난 같기도 하고 진심 같기도 한데 현실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KK에너지는 업계 3위 기업이다.

SS에너지는 업계 8위 기업이다.

3위와 8위 사이에는 아주 큰 격차가 있다.

1위, 2위, 3위까지는 전국 곳곳에 주유소 경쟁을 펼치는 기업이고, 8위는 정유에 쓰이는 화학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수준이다.

사극으로 치면 주인 어르신과 돌쇠가 자리를 바꾸는 것과 같은 장면.

그림도 썩 좋지 않을뿐더러 주변 기업들의 눈치도 봐야 한다.

1위와 2위가 좋은 눈으로 볼까?

“왜? 정유 기업 카르텔이 걱정되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 맞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 아닙니다. 아니, KK에너지를 쓰러뜨리실 겁니까?”

심하게 더듬는 말에 재준도 답답해졌다.

“아니요. 그냥 스스로 무너질 겁니다.”

“혹시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니고요?”

“재준아, 거 사장님이 걱정…….”

하하하.

갑자기 웃는 재준 때문에 임병달의 말이 묻혔다.

“사장님.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십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임재준 씨에 대해 조사를 좀 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 국가 예산과 맞먹는 자금을 굴리신다고 하던데요. 저희 같은 기업은 기침 한 번 하면 그냥 날아가 버린다고.”

“하하하. 무슨 농담을.”

“전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여기 온 것도 전에 선언하신 적대적 인수 때문입니다. 맘만 먹으면 저희 같은 기업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니까요.”

하. 하. 하.

재준의 웃음이 천천히 한마디씩 끊어져 나왔다.

“솔직히.”

“재준아. 이만 가시…….”

재준이 갑자기 SS에너지 사장에게 바짝 다가가자 임병달의 말이 멈췄다.

“에잇, 맞아요. KK 그룹을 쓰러뜨릴 겁니다. 그러니 SS에너지 사장님이 인수하세요. 어차피 사고 친 놈들이라 회생은 불가능합니다. 그룹이 해체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반 토막은 날 거예요.”

“네?”

재준아!

“그리고 에너지업계 카르텔이 걱정된다면 저희가 지분 참여하죠. 순수한 투자 목적으로. 경영엔 절대 간섭하지 않아요. 뭐 지금도 잘하고 계시지만.”

“아. 아니…….”

“그리고 채권단은 투뱅코가 잘 해결할 거고. 정치인들 또 참견하기 좋아하니 현재증권 회장님이 호통 한번 치면 되고.”

“그게…….”

재준아?

“KK에너지가 사장님 회사 노리는 것도 차량용 연료 첨가제 때문이잖아요. 거의 완성 단계라고 들었는데, 효율이 좋으면 미국과 유럽 시장 진출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도와주십니까?”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지분 참여한다고. 주가 오르는 일인데 당연히 발 벗고 나서야죠. 안 그래요?”

“아, 네.”

“어쨌든 KK에너지는 인수하는 걸로 가닥을 잡으세요. 내일부터 일 터지니까.”

에잇 몰라, 맘대로 해라. 이놈아.

결국 임병달은 재준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SS에너지 사장은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

다음 날.

[임재준, JP스탠리코리아를 통해 KK 그룹 전 계열사 공매도를 실시한다고 발표. 금액은 미정. 최소한 1,000억 이상]

신문 헤드라인에 실린 기사 때문에 한국이 또 떠들썩해졌다.

-이번엔 또 뭐야? 갑자기 KK 그룹을 왜?

-난들 알아. 뭔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왜 공매도를 때려. 그것도 1,000억씩이나.

-심지어 최소라고. 얼마가 될지는 임재준만 알아.

-그룹 전체 공매도면 KK 그룹 뭐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데.

-혹시 투자 실패 아냐?

-그럼, 한 회사만 해야지. 지금 그룹 전체를 대상으로…… 어라, 이건?

-분식회계?

-분식회계? 찌찌뽕.

사람들은 KK 그룹에 안 좋은 쪽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공매도의 위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관심.

공매도를 당하는 기업에 문제가 발견될 때까지 사람들은 기업을 주시한다.

-너, KK 그룹 관련주 어떻게 할 거냐?

-뭘 어떻게 해. 일단 던져야지. 어차피 임재준이 나섰으니 어떻게든 주가를 끌어내릴 텐데. 이건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이기는 거야. KK는 임재준이한테 안 돼.

-하긴. 일부러 JP스탠리코리아에서 공매도를 거는 거 보니. 미국이나 프랑스 자본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지?

-그러니까. KK는 망한 거야.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런대.

며칠 후 사람들의 관심이 식으려 할 때 KK 그룹 기사가 또 하나 터졌다.

[KK 그룹 계열사 사장, 자기 지분 시장에 내다 판 정황 포착]

미국은 분식회계가 드러난 엔터가 몰락하며 80달러 하던 주가가 1센트로 떨어졌다.

한국은 분식회계를 한 KK 그룹 전 계열사의 주가가 폭락했다.

하지만 아직은 분식회계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

현재증권 옥상.

재준은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쳐다봤다.

오늘이 2001년 9월 4일이다.

문득 떠오른 대화.

-한 가지만 물어보죠. 만약 9.11 테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같은 사태가 발생하여 풋옵션으로 엄청난 이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평상시와 똑같은 업무를 보고 있을 겁니다. 때에 따라선 이익도 취할 겁니다.

-그 이익이 다른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라면?

-위기의 상황에선 피와 눈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죠?

-증권은 제로섬 게임입니다. 누군가 잃으면 누군가 이득을 취하죠. 위기의 순간에, 저는 주저하기보단 이득을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득은 앞으로의 불행한 사태를 막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전생의 차강진과 면접관의 대화였다.

막상 닥치니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네.

뭔 똑같은 업무를 봐.

미친놈.

재준은 핸드폰을 들어 몇 군데 전화를 걸었다.

“강호석 선배.”

-웬일이래. 선배란 소리를 다 하고 무슨 일 있어?

“그냥, 저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지금 걸려있는 옵션 거래 전부 청산하시고요.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왜?

“아니, 옵션 팀 전부 일주일 휴가 주세요. 휴가비 넉넉히 주고.”

-뭔 일 터지는 거야?

“그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하세요.”

“앤드류, 나예요.”

-무슨 일입니까. 보스.

“투마로우 은행에 걸려있는 옵션 거래 전부 청산하고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윌켄, 접니다.”

-네, 보스. 무슨 재미난 일 있습니까?

“엔터 건과 아르헨티나 건 외에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일주일간만. 그 후에 다시 통화합시다.”

“페렐라, 나야.”

-보스, 웬일입니까. 우리가 한국으로 가야 합니까?

“그건 아니고. 지금 옵션 거래 전부 청산하고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마. 위서스틴도 같이 있으면 그렇게 전해.”

“파트리스. 접니다.”

-오우, 무슈. 한국은 어때요?

“잘 있습니다. 그보다 지금 옵션 거래 전부 청산하고요.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통화를 마치고 재준은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엄청 다네.

그깟 돈 몇 푼 버는 것보다 좀 쉬는 게 낫지.

속 쓰리네. 제길.

아는 것이 때론 좋지만은 않아.

재준은 풋옵션 대박을 노릴 수도 있었으나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 목숨값으로 버는 돈이라는 연민에서가 아니라.

뭔가 자기 의지로 버는 돈이 아니란 생각에 흥미가 떨어졌다.

일주일 후 9.11테러가 터졌다.

재준은 그날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KK글로벌 회계장부를 봤다.

***

9.11테러 때문에 주식시장이 폭락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주가는 잠시 하락했지만 한 달 만에 회복되었고 심지어 그 이후로 쭉쭉 잘 올라갔다.

사회 문화적 충격은 심각할지 몰라도 경제적으로 큰 충격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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