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다 망하는 꼴 최선을 다해 지켜보겠습니다(3)
약간 긴장한 윌켄의 목소리에 재준은 차분히 물었다.
“뭔가요?”
-미국 에너지 기업 ‘엔터’ 아시죠?
“그 사기꾼이요?”
-사기꾼이요?
아, 아직 엔터의 분식회계가 밝혀지기 전이구나.
“그렇다는 거죠. 기업이야 다 사기꾼이니까. 그런데 엔터가 어쨌다는 겁니까?”
-엔터가 한국의 KK에너지와 손을 잡고 SS에너지를 노리고 있답니다. 그래서 리자드 헤지펀드를 이용해 강화성 펀드를 지원하고 강화성 펀드가 SS에너지 주식을 매집하려는데, 걸림돌이 나타납니다.
“SS에너지 주식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 현재증권이다?”
-그렇습니다.
엔터,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안 되겠구나.
역시 돈을 벌라는 하늘의 계시다.
“윌켄, 맨해튼 랙터가에 가면 채노스펀드가 있을 겁니다. 거기 공매도 전문가 존 퀴니코를 찾아가세요.”
-퀴니코요? 이름이 왜 그래요?
“이름이 아니라 별명인데 그리스어로 개새끼란 뜻입니다. 그 사람 공매도 전문가예요. 그를 영입해서 엔터 공매도를 치세요.”
여기서 공매도는 무차입 공매도이다.
증권사에 A주식을 매수해서 준다는 약속을 하고 돈을 먼저 받는다.
약정 기간 안에 주식을 매수해서 주면 된다.
차입 공매도와 다르게 증권사에 주식을 빌리는 게 아니라 돈을 받는다.
근데 약정 기간 안에 주식을 못 사서 주면?
감옥에 가는 거지. 사긴데.
-엔터 공매도를 치라고요?
“네.”
-액수는요?
“엔터 시총이 600억 달러잖아요? 되도록 많이 무차입 공매도를 치세요.”
-보스. 너무 위험해요. 또한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서 무차입 공매도는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퀴니코가 필요한 겁니다. 그가 엔터를 특수한 상황으로 몰고 갈 겁니다. 그는 엔터의 약점을 아주 잘 알거든요. 엄청 싫어하기도 하고.”
-휴, 보스는 도무지 모르겠네요. 일단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요. 일을 추진해 보겠습니다.
“알죠? 저만 믿으세요. 겨우 600억 달러 가지고. 위험이 높아야 이익도 높은 겁니다.”
휴.
뜻하지 않은 한숨이 천 실장 입에서 새어 나왔다.
600억 달러가 왜 겨우입니까?
***
곽형택 사장이 이끄는 현재리츠가 업무를 시작했다.
투뱅코는 장기주택담보대출을 서민에게 광고했다.
그야말로 투뱅코의 전국 지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일 언론은 대서특필로 투뱅코를 다루었고 이번 장기주택담보대출을 이끈 임재준의 얼굴이 신문 헤드라인에 등장했다.
[임재준 인덱스 펀드, 적립식 펀드에 이은 장기주택담보대출로 또 한 번 한국을 뒤흔들다]
[임재준 한국을 움직이는 100인 중 2위에 올라. 1위는 대통령]
[또 한 번 서민을 위해 나선 임재준]
-이야 진짜 한국 금융계는 임재준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금융계가 아니라 국민한테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너 이번 대출받았냐?
-아니 번호표 받았다. 내 순서는 일주일 후 정도 될 거 같아. 하루 전에 전화 준다니까 기대하고 있어.
-나도 대출 승인 나면 좋겠는데. 신용등급이 너무 안 좋아서.
-투뱅코는 신용등급 아예 보지도 않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돈을 갚을 의지가 있는지가 중요한 거야.
-그걸 어떻게 판단해?
-그게 되니까 투마로우지. 그런데 꽤 까다롭다는 것 같아.
-안 되면 내년에 하는 인덱스 펀드나 또 가입해야지.
-이번엔 미리내증권의 뮤추얼 펀드 가입 한번 해볼까?
-아서라. 난 이제 펀드 매니저가 운용하는 펀드는 절대 안 믿는다.
-참 내. 우리나라만 뮤추얼 펀드가 힘을 못 쓰는 것 같아.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임재준이 TV에 나와서 그 난리를 쳤는데 누가 뮤추얼펀드를 하냐? 했던 놈들도 별로라고 다 갈아탔는데.
-이번엔 뭐 새로운 거 안 나오나?
-그러게.
-참, 이번 주에 현재증권 주주총회 열리지?
-넌 별걸 다 안다. 주주도 아니면서.
-강화성 펀드에서 이번 주주총회에 참석한다고 벌써 기사 떴잖아.
-아니, 그 펀드는 왜 현재증권 같은 사회에 이로운 기업을 건드린대? 원래 뿌리부터 썩은 대기업을 비판하던 펀드 아냐?
-야, 펀드가 무슨 비판이야. 다 돈 벌려는 수작이지. 주가 띄워놓고 팔고 떠난 게 벌써 몇 번인데.
-그렇지. 똑똑한 사람들이 더 무서워.
-그런데 이번 주총에 임재준이 나온대.
-그래? 기자들 엄청 몰리겠네. 그 와중에 싸움 나면 골때리겠는데.
-근데 임재준 잘못 건드리면 도리어 당할 텐데.
-생각해 보니 재미있겠다.
-구경 갈까?
-어떻게? 주주도 아니면서.
-지금 주식 한 주 사면 되는 거 아냐?
-이런 무식한 놈. 주주총회 참석하려면 3개월 전에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아, 그래? 아쉽네. 뭐, 뉴스에 나오겠지.
***
현재증권 주주총회.
곳곳에 자리 잡은 기자들은 잔뜩 기대에 찬 눈을 하고서 언제든지 셔터를 누를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오전 9시, 주총이 시작되었다.
선출된 의장 인사와 지난해 감사·영업 보고, 총 8건의 안건 의결까지 모든 절차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멀리 구석에는 일부러 주총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는 박민수도 보였다.
재준은 임병달과 함께 앉아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꽤나 지루한지 손으로 입을 막고 하품을 참았다.
임병달이 한심한 듯 재준을 나무랐다.
“이놈아, 현재증권 최대주주가 참을성 없이.”
“제가 아니라 투마로우가 최대주주죠.”
“그 투마로우 최대주주는 누군데?”
“L.S.Company요.”
“이놈이 말장난을. 그 투자사 100% 네 지분 아니냐?”
“아닌데요. 98%예요. 박 실장 1%. 강 이사 1%.”
“허, 그놈들 떼돈을 벌었네.”
“번 만큼 개고생이죠. 저기 보세요. 박 실장. 거의 시체 수준이잖아요. 그러게 한국 왔으면 보약이라도 먹으라니까.”
“에이. 나쁜 놈. 바쁜데 한가한 네가 지어주면 되잖아.”
“제가요? 그런가? 주총 끝나면 보약 지으러 가야겠네. 짓는 김에 생각나는 사람은 다 지어줄까 봐요.”
“알아서 해. 알아서.”
주총이 거의 끝날 시점 주주들의 의사를 듣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까지 잠잠하던 강화성 교수가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의장이 대답했는데 강화성은 재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현재증권은 왜 배당을 안 하는 겁니까?”
“그건.”
잠깐만요.
재준이 일어나며 손을 들었다.
“현재증권 지분 68%를 가지고 있는 저한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맞나요?”
“그렇습니다. 임재준 씨가 반대든 찬성이든 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니까요.”
“배당이라……. 난 배당 같은 거 안 합니다.”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배당은 당연한 거 아닙니까?”
재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교수님. 교수님 맞아요? 배당하는 게 다 주주들의 이익을 위하는 일이라고요? 이건 어느 나라 경영입니까?”
재준은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러분, 현재증권의 주가는 제가 입사한 1996년부터 매년 평균 100% 이상 올랐습니다. 4년이 지난 현재 열여섯 배가 오른 겁니다. 이건 제가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한 결과 아닙니까? 만약 배당을 해서 자금이 부족했다면 이런 결과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과연 배당을 해서 박스권에 멈춘 주가와 배당을 하지 않고 투자를 해서 얻은 열여섯 배의 주가 어느 것이 나을까요? 전 앞으로도 배당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오직 투자로 주식을 보유하신 투자자에게 항상 최상의 이익을 드릴 겁니다.”
팟팟팟팟.
플래시가 터지고 기자들은 뭔가를 적으면서 재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배당보다야 주가가 오르는 게 낫지.
옳소.
배당은 필요 없소.
여기저기 주주들의 찬성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화성 교수는 주먹을 말아 쥐더니 다음으로 넘어갔다.
“좋아요. 그럼 현재증권은 왜 노동조합이 없는 겁니까? 뒤에서 조합 결성을 막는 거 아닙니까?”
“내기할래요?”
“뭐요?”
“나랑 내기하자고. 현재증권 직원들이 정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는지 아닌지. 현재증권 이사회는 노동조합을 말린 적도 없고 말릴 이유도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안 하겠다는데 뭐 어쩌라고. 돈 주고 만들라 그럴 수는 없잖아요?”
“정말 모든 직원이 그런단 말입니까?”
“거참, 답답한 사람이네. 이봐요, 교수님. 그래서 직원 한 열 명 정도가 찬성하면 여기 있네요 할 겁니까? 당신은 대학에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칩니까? 경영학 교수 맞아요?”
“뭐요? 여기가 어떤 자린데 그런 막말을…….”
“뭐긴. 당신 같은 쥐새끼가 설치면 안 되는 곳이지.”
쥐새끼?
잠깐 정적이 감돌더니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기자들은 사진을 찍고 기사를 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주주들은 움찔거리며 옆 사람과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거 뭔가 터질 것 같은데.
강화성 교수는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말이면 다 말인 줄 알아!”
재준이 천천히 단상으로 갔다.
“의장님 제가 잠시 마이크를 사용하겠습니다.”
“아, 네.”
의장이 비켜서자 재준이 단상에 올랐다.
“야, 잘 들어. 교수고 나발이고 너 같은 놈은 사회에서 매장돼야 해.”
이건 가도 너무 나간 발언이었다.
병든 닭같이 졸던 박민수가 벌떡 일어나서 당장 재준에게 달려가 저 입을 막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정도로.
임병달은 뒷목을 잡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재준아 제발.
하지만 재준의 질주는 시작되었다.
“자, 여러분. 강화성 펀드의 실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재준에게 쏠렸다.
지금 막장으로 나가는 건 나가는 거고 재준이 지금까지 보여준 마지막 히든카드가 항상 대박이었으니까.
재준은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시도했다.
띠리리리링
-헤이 보스.
“윌켄. 접니다.”
-네, 말씀하세요.
기자 몇이 수군거렸다.
윌켄이라니.
설마 마이클 윌켄? 정크 본드의 왕?
그가 왜 여기서 나와?
재준은 윌켄에게 양해를 구했다.
“윌켄, 지금부터 우리 통화는 대한민국 언론에 노출되는 겁니다. 싫다면 여기서 중단해도 됩니다.”
-상관없습니다. 진행하시죠. 뭐가 궁금한 겁니까?
“한국의 강화성 펀드에 돈을 대는 회사가 어딥니까?”
-미국의 헤지펀드 리자드입니다.
리자드?
그 악랄한 헤지펀드를 말하는 거야?
강화성 교수랑 너무 맞지 않는데.
“윌켄, 리자드 헤지펀드의 목적이 뭡니까?”
-강화성 펀드를 이용해서 SS에너지를 삼키는 겁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아, 보스. 엔터에 400억 달러 공매도 달성했습니다. 앞으로 몇 군데 더 돌면 500억 달러까지는 가능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윌켄.”
-그리고 아르헨티나 국채 매입이 80%를 넘었습니다. 시가로 776억 달러입니다.
“400억 달러는 공시하고 376억 달러는 재워두세요.”
-알겠습니다. 이제 슬슬 심심하니까 어서 미국으로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하하.
기자들은 자신들이 받아 적으면서 도대체 이걸 믿어야 할지 의심이 들었다.
한번은 400억 달러?
한번은 776억 달러?
이게 한화로 도대체 얼만데 이런 무지막지한 돈을 굴리는 걸까?
재준은 강화성 교수를 향해 돌아서며 빙글 웃었다.
“이봐, 당신. 이제 어떻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