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다 망하는 꼴 최선을 다해 지켜보겠습니다(1)
현재증권 회장실.
“할아버지.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재준이 가볍게 웃는 얼굴로 임병달을 바라보았다.
“어째 표정에서 ‘나는 미국과 프랑스 오가며 날아다녔는데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뭐 했습니까’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그래? 그리고 프랑스보다 어째 미국에서 큰일을 벌인 것 같은데. 투마로우는 왜 아직 상장을 안 시키고 있는 거야?”
“스톡체인 상장 먼저 하려고 했는데 일이 있었어요.”
“JP스탠리를 인수했다던데. 그 일이냐?”
“맞습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어휴.
임병달의 얼굴에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과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아연한 표정이 겹쳤다.
“그렇게 마구 먹다 보면 체할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제 위는 튼튼합니다. 그리고 뛰어난 인재도 몇몇 확보했고요. 그보다 한국은 왜 시끄러운 겁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면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걸 돌려서 묻는 거냐.”
“저는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재준이 탐정인 양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에잉.
임병달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의 정치인들은 여전히 각성을 못 하는 것 때문에 걱정이다. 미국이 저 모양인데 그 여파를 어떻게 견디려고 저러는지, 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징징대기만 하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정치인들이 여길 찾아와요? 그 사람들 사람 됐나?”
“암튼 해외 충격이 한국에 전달됐으니 또 부실기업들 자금난이 장난이 아니다. 외환위기를 겪었는데 변한 게 없어. 지들끼리 떠들어 대는 걸 들어보니 건설투자 활성화하고 신용카드 사용 촉진을 한다는데.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건설투자는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긴 한데 신용카드 사용 촉진은 좀 아닌데요. 이제 공적자금 투입하는 것도 눈치 보이니까 국민 주머니를 대놓고 털겠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 행장님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정 행장이 들어오며 재준에게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아버지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 좀 늦었습니다.”
“여전히 바쁘시네요.”
“도련님만 하겠습니까?”
“혹시 행장님도 정치인들과 자주 만나시나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부동산투자회사(REITs)와 기업구조조정부동산투자회사 설립 때문에 자주 뵙고 있습니다.”
“어째 할아버지도 그렇고 행장님도 그러다 정치에 입문하는 거 아닙니까?”
“아직 욕을 먹고 싶어 안달이 난 건 아닙니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데.”
문득 재준은 임병달을 쳐다봤다.
“이놈이.”
하하하.
“그래도 금감원은 얼씬도 안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기웃거리기만 해 봐.
아주 자근자근 씹어 줄 테니.
“근데, 정부가 리츠(부동산투자회사)를 도입한대요?”
“네. 리츠를 도입해서 부동산 증권화를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리츠(REITs)는 자산담보부채권(ABS), 주택저당증권(MBS)에 이은 부동산 증권화의 마지막 단계이다.
딱 보이죠?
회사, 채권, 증권.
회사가 채권을 담보로 증권을 발행한다.
자세한 설명은 뒤에.
우선은,
부동산 증권화는 기업의 주식과 같은 개념이다.
예로 100억짜리 빌딩을 만 원짜리 증권 십만 개로 쪼갠다고 보면 된다.
방금 말한 100억짜리 빌딩이 분명히 가치가 뛸 것 같은데 돈이 백만 원밖에 없다면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우리 같은 서민이 100억이 어딨어.
이럴 때 100억짜리 빌딩이 리츠에 의해서 증권화된다면 백만 원으로 증권 백 장을 사서 보유할 수 있다.
그럼, 빌딩의 가치가 올라갈 때 보유한 증권만큼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럼, 우리도 해야죠. 안전하고 유동성도 갖춘 상품을 안 하면 바보잖아요.”
“근데 문제는 있습니다. 세제 혜택이 없습니다.”
“상관없어요.”
“이를 실행하는 정부의 목적이 외환위기 때 묶인 부동산을 처리하는 데 있습니다.”
“상관없다니까요?”
“언제부터 정부에 이렇게 호의적이셨습니까?”
“제가요?”
“그렇게 보입니다.”
“아닌데요.”
정부의 의도야 빨리 처리하고 손을 털고 싶은 거겠지만 저 조급증 때문에 헐값에 살 기회가 생기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럼, 신용카드 회사는 어떻습니까? 정부가 신용카드 활성화를 위해 투뱅코 말고 별도의 대기업과 연계하여 신용카드 회사를 하나 더 가지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용카드 남발로 인해 강제로 끌어 올린 내수 부양책이 조만간 신용불량 대란을 일으키고 그 여파로 장기 소비 침체를 일으키는 걸 아는데 동조를 한다고? 절대 안 돼.
거기에 더해서.
“대기업 연계는 당연히 안 되고요. 투뱅코 신용카드 발급 엄격히 선별하세요. 직장 월급 명세서 제출하지 않으면 발급 자체를 못 하게 막고. 신용카드 한도도 월급 이상은 올리지 못하게 제도화시키세요.”
“그러면 아무도 저희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사용하지 말라는 거.”
재준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투뱅코는 신용카드만큼은 정부의 시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으로 신용카드 고객을 줄여나가세요.”
“그러면 고객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괜찮아요. 다른 방법으로 고객을 유치하면 되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투뱅코의 방향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기업을 상대로 대출을 늘리고, 두 번째는 서민에게 장기주택담보대출을 파는 겁니다.”
이 시대 은행들의 행보를 100% 역행하는 안이었다.
시중은행들은 기업 대출을 줄이고 서민 단기주택담보대출을 늘렸다.
당연하지. 외환위기 때도, IT 버블 때도, 그만큼 기업에 당했는데 또 기업에 왕창 대출해 줄 만큼 간이 크지 않았다.
이제 정부의 입김이 소용없기도 했고.
정 행장이 재준의 말에 의문점이 생겼다.
“다들 단기주택자금을 대출해 주는데 저흰 왜 장기주택자금을 대출합니까? 유동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음.
재준이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자, 우선 현재리츠라는 자회사를 만듭니다. 그리고 투뱅코가 장기주택담보대출을 해주고 대출을 채권으로 만듭니다. 그럼 현재리츠가 이 채권을 사들여서 채권을 담보로 증권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증권을 연기금 같은 정부 기관에 팝니다.”
“그럼 다시 돈이 들어오고 또 대출, 채권, 증권, 현금으로 순환한단 말이죠?”
위에서 말한 과정이 이거다.
채권, 증권, 현금의 순환 그리고 이를 관리하는 주택금융공사.
솔직히 좋은 정책 맞다.
서민들에게 20년 만기 대출로 주택을 소유하게 해주는 건데 아주 좋다.
근데 문제는 정치인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데, 이걸 정기국회 파행이라 부르지 아마, 암튼 2004년에나 국회를 통과한다.
지금이 2001년이니 아직 3년이나 남았다.
그리고 통과되고 나서도 서민이 아니라 투기꾼들에게 돈이 흘러들어가 서민은 여전히 쥐꼬리만 한 혜택을 누렸고 투기꾼들은 집을 다량 보유하게 된다.
그래서! 현재증권이 주택금융공사를 대신하려고 한다.
서민들에게 대출해 주고 투기꾼들 기웃거리면 멀리 쫓아 버리고 제일 중요한 돈도 왕창 벌고.
“맞습니다. 단, 이건 또 할아버지가 나서주셔야죠.”
“내가 왜?”
“우리 같은 젊은 사람이 나서면 효과가 반감돼요. 정치인을 좀 만나야 해서요. 우리가 증권을 연기금에 팔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전 정치인이라면 두드러기가 나서요.”
“뭐, 그건 가능하지.”
정치인들 만나서 주택금융공사인지 뭔지 다 때려치우라고 하세요.
그냥 우리가 다 할 테니.
정 행장이 재준을 향해 말했다.
“근데 이렇게까지 해서 장기주택담보대출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방금 행장님이 저한테 말한 고객유치 차원입니다. 신용카드보다는 장기주택담보대출이 훨씬 나으니까요.”
“음. 신용카드보단 담보대출이 낫긴 합니다.”
그리고 고객유치도 유치지만 3년 단기주택담보대출을 실행한 은행은 3년 후 심한 유동성 위기에 처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은행은 경험 부족한 거야 아니면 욕심이 많은 거야.
주택담보대출이 3년 만기가 말이 되냐고.
이 시기 25평이 1억 5천만 원 정도 할 때니까.
1년에 5천만 원을 갚으라는 거잖아.
그럼 한 달에 이자까지 해서 대략 420만 원?
이 시대 서민한테 한 달에 420만 원을 갚으라고?
2022년으로 따지면 두 배니까 840만 원이잖아.
이게 말이 되나? 다 같이 죽자는 짓 아냐?
“최소 10년에서 20년 장기주택담보대출도 괜찮습니다. 단, 주택만 보고 대출을 하면 안 되고 갚으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을 잘 선별하세요.”
“우린 그 부분에선 신용등급을 사용하지 않고 자체 기준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죠.”
외환위기 때 기업 대출 심사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놓은 게 있으니 이를 조금만 다듬어 개인에게도 적용하면 된다.
신용등급 절대 믿을 게 못 된다.
“아, 할아버지. 부탁이 있는데요.”
“또 뭐? TV 방송은 절대 안 된다.”
“그게 아니라, 곽형택 부사장님이요.”
“곽 부사장은 왜?”
“리츠 회사 차리고 사장으로 앉히시죠.”
“뭐?”
임병달은 순간 울컥할 뻔했다.
장장 40년도 더 같이 움직인 친동생 같은 놈인데.
요 몇 년 새에 견디기 힘든 일들이 터져 소홀했다.
자신도 잠시 잊은 걸 손자가 챙긴다.
“원, 녀석. 나도 그러려고 생각했어.”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그 눈가에 촉촉이 맺힌 건 무얼 의미하는 겁니까?
역시 재준은 한국에 와서도 이것저것 챙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어떻게 굴러갈지 뻔히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현재증권 앞 돼지갈빗집.
엉엉엉.
나이 지긋한 남자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예 소리까지 지르며 울고 있었다.
“부사장님. 창피합니다. 그만 우세요.”
“형길아. 미안하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 재준이가 나를 엉엉엉.”
재준은 머쓱해서 멍한 눈으로 애써 곽형택 부사장을 바라보았다.
곽 부사장은 울다가 술 한 잔을 냅다 원샷 하고 말했다.
“임병달 회장님이 오늘 아침에 나보고 사장하라는데 이게 다 우리 재준이가 챙겨준 거란 소리를 듣자 울컥해서 하루 종일 일도 못 하고, 아니, 할 수가 없더라고.”
자, 재준아.
곽 부사장은 재준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찰지게 따랐다.
재준은 단숨에 한 잔 비운 뒤 두 손으로 잔을 돌려드리고 술잔을 채웠다.
“아니, 그게. 리츠는 부동산투자회사니까. 아저씨밖에 없다니까요. 제가 뭐 특별히 아저씨를 챙기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안 하셔도 돼요.”
하지만 재준의 말에도 곽 부사장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알아. 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가 다 알아.”
“근데 아저씨. 리츠는 알고 있지요?”
“당연하지. 내가 부동산 밥 먹은 지 몇 년인데.”
“한국 사정에 너무 매달리지 마시고 미국 사례들 조사하세요.”
“그럴 거야. 내가 사장이 됐는데. 당연히 공부해야지.”
“경제정책연구소에 부동산 귀신 하나 있으니까, 일단 파견직으로 잠시 붙여드릴게요. 옆에 딱 붙여 놓고 아저씨가 알 때까지 뭐든 물어보세요.”
“그래? 부동산 귀신? 고맙구나. 근데 여기 형길이도 데려가면 안 될까?”
쾅.
재준이 술잔을 거칠게 내리쳤다.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