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2조 달러인데 날름 먹어야지?(6)
동료의 질문에 자신도 아침에 봤던 자료를 떠올렸다.
-나도 봤어. 방쿠바를 인수한 나쇼날파리를 넘다니 참 내. 나쇼날파리는 그동안 뭐 한 거야?
-거긴 두 세력이 한 지붕 안에 뭉쳤으니 당분간 지지고 볶고 싸울 거야.
-그런 거 보면 차라리 엥도처럼 지방은행들을 인수한 게 대형 은행 인수한 것보다 나은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엥도은행이 특이한 상품을 내놓았어. 부채담보부증권, CDO라고 부르는 상품이야.
-특이하긴, 이 친구 공부 좀 해. 프랑스 금융은 이게 문제라니까. 프랑스 안에서 움직이질 않아. 그건 이미 작년에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상품이라고.
-그래?
-지금 전 세계에 1조 달러 이상 팔리고 있는 상품이야.
-아니 요즘 왜 이상한 금융 상품이 나타나는 거야?
-그야, 다 미국 때문이지.
-다행이네. 난 프랑스라서.
우물 안 개구리.
이 시대의 프랑스 금융계는 딱 이랬다.
프랑스 금융계는 엥도은행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당사자인 엥도은행은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엥도은행.
“또야? 이번엔 몇 군데인데?”
행장 레오는 직원이 올린 보고서를 보고 한탄을 내뱉었다.
브르타뉴방크가 자신의 은행을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날.
분노의 반대 기자회견을 열려는 찰나.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윌켄이 방문한 것이다.
그 뒤로는 미국 투자은행의 두 거물 페렐라와 워서스틴도 함께였다.
브르타뉴방크 같은 시골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 엥도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순간부터 누가 뒤에 있을까 의심했다.
그런데 자그마치 투마로우라니.
일단 당장 두 손을 들고 백기 투항했다.
아니, 열렬히 환영했다.
지금까지 프랑스에도 투자은행을 만들어 보겠다고 유럽 전역을 뛰어다녔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근데, 합병이 마무리되고 터진 일이 지방은행 합병이었다.
처음엔 하루에 두세 명의 변호사가 찾아와 지방은행 합병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이런저런 담소도 나누고 좋았다.
은행이 점점 커지는데 어찌 안 좋을까.
이대로라면 나쇼날파리를 앞지르지 말란 법도 없겠는데.
그러나 하루에 두세 건이던 합병 서류가 여섯 일곱으로 늘어나더니 이제 하루에 열 건도 넘었다.
“여기 세 건 서류고요. 오늘 열 두건 넘어온다고 연락 왔습니다.”
“이거 그냥 이야기 듣고 사인만 하면 되는데. 오늘은 자네가 행장 대리를 하면 안 될까? 내가 정말 피곤해서 그래.”
허.
남자는 행장의 어이없는 말에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행장님. 행장님은 그냥 사인만 하시지만, 저기.”
남자는 창 넘어 사무실을 가리켰다.
“보이십니까?”
“아, 보이네. 보여. 미안하네. 미안해.”
모든 직원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합병 서류들.
아무리 작은 은행과 합병이라도 어디 숫자 맞추는 게 쉬울까.
레오 행장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변호사를 기다렸다.
***
프랑스 어느 와인 바.
재준과 나쇼날파리의 행장 파트리스가 나란히 앉아 와인을 주고받으며 밀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무슈, 당신 말대로 소시에테까지 합병을 마쳤습니다. 안 될 것 같았는데 모두 당신 덕입니다. 중앙은행 총재까지 나서니 아주 수월하게 합병했습니다.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글쎄요. 전 대통령을 만나 크레디은행을 인수한다 하고 재무부 장관에겐 인수 안 한다고 한 것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자신들이 알아서 계산하고 딜을 성사시킨 겁니다.”
“네?”
하하하하.
파트리스는 박장대소를 하며 재준을 쳐다봤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과 장관 사이를 줄타기하겠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도대체 심장은 있기는 한 겁니까?”
“그럼요. 요기에. 아마 행장님 심장보다 작을 겁니다.”
아니까 하는 거지 모르는데 했겠습니까.
재준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하자 파트리스는 다시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무슈,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가요?”
“투마로우같은 거대 은행이 프랑스 지방은행은 왜 인수하는 겁니까?”
말해줘야 움직이겠지?
“은행만 인수하는 게 아닌데요?”
“그럼?”
“네, 은행과 함께 그 지방의 농산물 기업들도 같이 인수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엥도은행이 크레디은행 여신을 따라잡을 겁니다.”
재준이 빙글 웃자 파트리스의 안면이 미묘하게 떨렸다.
“농수산 기업이요? 프랑스 재계에 진출하려는 겁니까?”
이런 쓸데없는 기업들로?
파트리스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재준이 미소를 띠었다.
“아니요. 전 금융가지 기업가는 아닙니다. 농수산 기업을 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엥도은행의 여신을 늘리려는 겁니다. 농수산 기업들은 다른 기업에 비해 돈을 은행에 착실히 보관하니까요.”
“여신을 늘려서 뭘 하려는 겁니까? 기업에 대출도 안 해주는 것 같던데.”
재준이 와인 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프랑스 최대의 상업은행처럼 보이려고요.”
“설마, 크레디은행과 합병을 추진할 겁니까?”
“맞습니다.”
“투마로우는 투자은행 아닙니까?”
“프랑스엔 행장님이 계신데 제가 굳이 투자은행을 차릴 필요가 있을까요?”
유럽에서 열심히 활동하세요.
저는 열심히 돈을 대 드릴 테니.
아마 돈을 우리가 훨씬 많이 벌걸.
이걸 바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도와줄 일이 있습니까?”
“그럼요. 그래서 이렇게 굳이 어두운 와인 바로 온 겁니다. 하하하.”
뚝.
갑자기 웃음을 멈춘 재준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미셸과 트리쉐가 행장님을 찾아갈 겁니다.”
“크레디은행 합병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제가 이 합병을 반대해야 하겠군요. 솔직히 지금도 골치가 아픈 건 사실입니다.”
“내부 세력 다툼 때문이시죠. 저희도 다 겪은 일입니다.”
“뭐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일부러 그러라고 세 개나 되는 은행을 합병시킨 건데 내가 해결책을 알려주면 지금까지 일이 허사가 돼요.
조금만 골머리를 썩이세요.
아니지, 차라리 시간이 걸리는 해결책을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쇼날파리는 이미 자산 1조 달러, 시총이 550억 달러의 거대 은행이 되었다.
문제는 합병 후 지독한 몸살을 앓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건 미국이든 프랑스든 합병 후에 겪는 일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은행끼리 뭉쳐서 상대 세력을 견제하고 회유하는 것.
가장 유명한 사건이 노스캐롤라이나 마피아와 보스턴 마피아 간의 싸움이 있다.
오해 없길 바라는데 여기서 마피아는 진짜 총 들고 설치는 갱단이 아닌 은행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도 있는 관피아나 금피아, 모피아 등등.
노스캐롤라이나 소재 은행과 보스턴 소재 은행이 합병하면서 벌어진 내부 다툼.
세력 싸움에서 승리의 관건은 뭐니 뭐니 해도 인사권이다.
“제가 써먹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뭐죠?”
“인사권을 행장님이 쥐고 흔드는 겁니다.”
“인사권은 이사회 권한 아닙니까?”
인사권을 행장 손아귀에 놓고 자신의 사람들을 등용시키는 것이 노스캐롤라이나 마피아가 써먹은 수법이다.
“그렇죠. 그러니까 먼저 8명씩 구성되어있는 이사회를 장악해야죠.”
“그들이 순순히 물러날까요?”
“이사들의 약점을 틀어쥐세요. 그리고 자진 사퇴를 권하는 겁니다. 약점 찾는 거야 돈 몇 푼 주면 기가 막히게 처리하는 사설 요원들한테 맡기시고.”
파트리스가 고민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중에 도리어 내 약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 똑똑한데.
그렇지, 나중에라도 괜히 남의 뒷조사한 게 걸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겠지.
그럼, 또 내가 이런 일을 잘하는 사람을 알지.
“제가 약점을 찾아서 드리겠습니다. 그럼 후에 약점 잡힐 일은 없을 겁니다. 혹시 제가 발설해도 잡아떼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십니까?”
“뭐든 대비를 해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제가 아는 사람이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니까 기대하십시오.”
“네. 기대하죠.”
그렇지, 대통령인데 일은 끝내주게 하셔야죠.
안 그래요? 사라크 대통령님?
가뜩이나 크레디은행 처리에 재무부가 반대해서 열 받는데 덜컥 나쇼날파리까지 나서면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파트리스가 미안한 얼굴로 재준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자꾸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도움만 받게 되는군요.”
“아닙니다. 한 가지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정한 날짜에 미셸과 트리쉐와 미팅을 잡으시면 됩니다.”
딱 좋은 날짜가 있지.
“참석하게요?”
“그들이 저를 반기겠습니까? 그냥 들이닥쳐서 싸우는 거죠.”
“싸워요?”
“네. 이런 일은 진중하고 예의 바르게 처리하면 절대 해결되지 않아요. 그냥 들이받아야 합니다.”
“아, 네.”
파트리스도 재준과 첫 만남 이후 여러모로 그의 뒷조사를 했었다.
도대체 어떻게 상대를 대했는지 모두 실성한 사람처럼 인생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과연 미셸이 실성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어느 한적한 공원.
워서스틴은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이거 이거, 심장이 쫄깃한 게 긴장감 넘치는데.”
저 멀리 어둠 속에 희미하게 사람의 움직임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자 뚜렷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 사람은 워서스틴을 보자 고개를 작게 흔들고는 스치고 지나갔다.
빠르군.
워서스틴이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작은 USB가 잡혔다.
역시 DGSI(프랑스 대내안보총국)이야.
어제 재준이 직접 나가겠다는 걸 굳이 자신이 가겠다고 우겼다.
내가 나오길 잘했어.
이렇게 위험한 일이 나에게 딱 맞아.
워서스틴은 주변을 살피고 굳이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 시각 공원엔 위험해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수은등 수십 개가 대낮같이 비추고 있었다.
***
며칠 후.
나쇼날파리은행 행장실.
“어서 오세요. 미셸 장관. 트리쉐 총재.”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지금 은행 내에 잡음이 많아 머리가 복잡합니다. 자, 이리 앉으세요.”
미셸과 트리쉐는 파트리스와 정면으로 앉았다.
대화의 포문은 미셸이 열었다.
“힘든 일이 많은데 이거 더 힘들게 해야 하니 죄송하군요.”
후후후.
파트리스는 일단 웃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빨리 프랑스도 대형 은행을 만들어야 하니 이해해 주십시오. 프랑스도 도이치방크 같은 은행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흠.
“말씀 중 죄송하지만 엥도은행이 조만간 크레디은행을 추월할 겁니다. 차라리 엥도은행과 합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엥도은행 뒤에는 투마로우가 있는걸 다 아는데. 임재준은 믿을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너는 믿을 만하고?
흠. 흠.
“아무리 그래도 1년도 안 돼서 4개의 은행이 합병하면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합병은 구조조정이 따르고 수많은 사람이 은행을 떠나야 합니다. 지금도 3개 은행이 합쳐져서 통제하기 힘든데 안정이 되기 전에 합병은 힘듭니다.”
“파트리스 행장. 엄살이 너무 심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정부의 뜻이기도 합니다. 알지 않습니까? 그동안 정부 소유의 기업들을 다 민영화하고 있습니다. 민영화하는 이유를 아시잖습니까? 조금 어렵더라도 시련을 극복하고 시장에 진출하지 않으면 프랑스가 유럽에서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겁니다.”
위기의식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도리어 빼먹을 거 다 빼먹어서 이제 귀찮아진 건 아니고?
파트리스는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시계를 봤다.
임재준이 올 시간이 다 된 듯한데.
이때,
하하하하.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셸과 트리쉐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익숙한 웃음에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한, 발악하듯 들리는 수십 명의 발소리와 플래시 터지는 소리.
팟팟팟팟팟.
-대통령님, 트레디은행 합병 건으로 움직이신 겁니까?
-혹시 파트리스 행장과 아는 사이 십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움직이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하하하, 그냥 나쇼날파리에 와 본 겁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가장 놀란 건 미셸도 트리쉐도 아닌 파트리스 총장이었다.
왜 임재준이 아닌 사라크 대통령이 나타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