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2조 달러인데 날름 먹어야지?(4)
“여신 규모는 2위부터 5위 은행 다 합쳐도 1위 크레디 하나만 못합니다. 저희가 고민하는 게 크레디 민영화잖습니까. 나쇼날파리와 방쿠바가 합병하면 저흰 바로 크레디를 안겨주는 겁니다. 그럼, 유럽 최고의 여신을 가진 메가뱅크가 됩니다. 나머지 소시에테나 엥도는 자연히 작은 은행으로 전락할 테고요. 그때 합병해도 괜찮을 겁니다.”
“음. 가장 중요한 건 크레디를 어디에 주느냐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잠깐, 잠깐.
허, 이런 무식한 놈들.
여기서 작가로서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네.
정치인들은 여신이 많으면 큰 은행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나 봐?
크레디는 프랑스 최대의 상업은행이다.
상업은행이니까 당연히 여신은 풍부하겠지.
근데 왜 세계 은행 순위는 전부 투자은행이 차지하고 있을까?
그건 투자은행 수익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상업은행은 개인과 기업에 대출해 준다 한들 이자 수익이 5%를 넘지 않지만, 투자은행의 투자 수익은 최소 20%를 넘는다.
100%는 수두룩하고 1000% 이익도 많다.
한국 외환위기 때 보면 알 수 있잖아.
투자은행의 헤지펀드와 사모펀드가 들어와서 몇 배를 가져갔는지.
암튼,
미셸과 로랑은 크레디은행의 처리를 놓고 멍청한 고심을 했다.
“로랑, 파트리스 행장 좀 보자고 해. 방크 드 프랑스가 지원을 해서라도 크레디를 인수하게끔 만들어야겠어.”
방크 드 프랑스는 프랑스의 중앙은행.
미셸은 나쇼날파리에게 크레디를 떠넘기려면 자금 문제를 풀어 줘야 하니 중앙은행까지 나서게 만들 계획이었다.
“그럼, 일단 1위, 2위, 4위 은행이 합치는 그림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이때, 차관보가 뛰어 들어왔다.
“장관님. 지금 브르타뉴방크 행장이 이탈리아 몰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연다고 합니다.”
뭐?
몰타에서?
급하게 TV를 틀었다.
[브르타뉴방크는 엥도방크 인수가 마무리되는 대로 크레디방크와 합병을 제안합니다.]
뭐라고?
“지금 저 사람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미셸은 머리 한편이 어질해서 소파에 앉았다.
[크레디방크의 방만한 경영이 수익 구조를 망치고 있습니다. 인수 후 상장 폐지해서 구조조정을 거친 후 건실한 은행으로 재상장할 계획입니다.]
뭐?
“로랑, 물, 물.”
“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사라크 대통령을 만나겠습니다.]
꼬로록.
결국 미셸은 정신줄을 놓아서 응급실로 실려 갔다.
재준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윌컴 투 헬’이었다.
***
유로 펜 병원.
미셸이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지 하루 만에 사라크 대통령이 병문안을 와선 크레디은행에 대해 잘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갔다.
미셸이 ‘뭐 이런 물먹은 바게트 같은 경우를 봤나’라는 표정으로 로랑을 보았다.
“로랑, 이래도 되는 거야? 난 분명 환자인데. 여기까지 와서 일을 시키고 가는 게 말이 되냐고.”
“의사가 하루 정도 요양만 하면 된다고 해서…….”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냐?”
저벅저벅.
“그렇게 자기 화를 못 이기니 쓰러지지. 쯧쯧.”
누군가 병실로 걸어들어오며 혀를 찼다.
미셸이 누군지 확인한 후 ‘에잇’ 하고 이불을 잡아당기며 등을 돌렸다.
“트리쉐, 여긴 웬일인가? 날 놀리려고 온 거면 가게. 오늘은 자네랑 말 섞기 싫네.”
“저, 저, 저놈의 주둥이. 중앙은행장을 옆집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은 천하에 자네뿐일 걸세. 그리고 내가 오고 싶어 온 게 아니라 자네가 나를 찾는대서 온 거야. 로랑이 그러던데. 나쇼날파리를 거들어 크레디은행을 인수해야 한다고. 뭐, 내 도움이 필요 없다면 그냥 가겠네.”
아! 크레디은행.
미셸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세웠다.
“그렇지.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크레디은행. 그거 빨리 처리하고 이놈의 장관 때려치워야지. 원.”
때려치운다고?
트리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뭔 놈의 때려치운다는 타령을 일 년에 한 번씩 하나?”
“아니야. 이번엔 진짜 사표를 쓸 거야. 난 이제 은행이라면 지긋지긋하네. 돈하고 관계없는 도서관 관장이나 할까 봐.”
“도서관은 돈 없이 굴러간대? 책은 누가 그냥 주나? 쯧쯧. 어딜 가나 돈은 항상 필요하고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 알면서.”
“어쨌든…….”
후.
미셸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쨌든, 트리쉐, 자네가 좀 나서서 크레디은행 좀 어떻게 해 주게.”
흠.
트리쉐는 굵은 신음을 토하며 미셸을 봤다.
“기다려 보게. 투마로우가 전면에 나섰어.”
“임재준이?”
“아니. 이번엔 윌켄이네.”
“윌켄이 누구야?”
트리쉐는 미셸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저런 사람을 재무부 장관이라고. 설명하자면 길고 그냥 미국 인수 시장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라고 알아두게. 돈 많은 투자자는 전부 그 사람 전화 한 통화면 이유 불문하고 투자할 정도로 막강한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왜 투마로우에 있어?”
“쯧쯧. 저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도 유분수지. 그 정도로 임재준이 뛰어나단 소리네. 페렐라도 거느리고 있고, 위서스틴도 그의 밑에 있단 말이야. 도대체 임재준과 왜 척을 진 거야? 우린 저들과 싸울만한 인재가 없어. 경험도 없고.”
“그럼, 그냥 크레디은행을 내준단 말이야?”
“대통령이 그와 30분 대화하고 크게 웃었다는군.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웃음인지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다고 들었어.”
“그래? 그래서 대통령이 크레디은행을 투마로우에 팔겠다는 건가?”
“아직 몰라. 조만간 투마로우에서 소식을 전한다고 했어. 그때 모든 게 정리가 될 거야.”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도대체 대통령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길래…….”
***
하루 전.
프랑스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재준과 윌켄은 사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만남을 위해 이동했다.
미국의 백악관이나 한국의 청와대와는 전혀 다른 중세 건축물인 궁전은 재준에게 생경한 이미지를 선사했다.
드디어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무슈, 투마로우 주인을 직접 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라크 대통령은 재준이 악수를 하고 윌켄과도 악수를 했다.
“앉으세요.”
익숙치 않은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인 의자에 앉은 재준은 의외로 푹신함에 놀랐다.
“의자가 굉장히 편한데요?”
“하하하, 1873년에 만들어진 겁니다. 요즘 인체공학이네 뭐네 해도 예전의 장인들에 비해 한참 멀었지요. 하지만 쿠션은 현대의 물건입니다.”
“오늘 의자만큼 편한 대화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걸 말씀하시죠.”
“하하, 역시 젊군요. 거추장스러운 겉치레는 바로 건너뛰고. 좋습니다. 제가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네.”
흠.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