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2조 달러인데 날름 먹어야지?(3)
페렐라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전하시네요. 보토에를 싫어하시는 건.”
“그게 아니야. 은행장들이 죄다 정치인들이잖아. 돈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다고 저 자리에 앉아있는지, 원. 저렇게 합병하면 나머지는 뭐가 돼?”
파트리스는 정치인이지만 회계감사국에서 시작해 금융통화정책 담당 차관보, 재무부 차관을 역임한 전력이 있었다.
반은 정치인이고 반은 금융인.
페렐라가 슬쩍 파트리스의 본심을 떠봤다.
“파트리스, 그냥 보고 있을 겁니까?”
“그러게 말이야.”
파트리스는 페렐라 옆에서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재준에게 물었다.
“무슈, 투마로우 같은 거대 은행으로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미셸과 달리 파트리스는 재준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셸은 정치인으로서 투마로우를 단지 큰 은행으로만 알았지만, 파트리스는 은행장이기에 투마로우가 가진 금융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재준은 파트리스의 말에 천천히 답했다.
“3위 소시에테와 4위 방쿠바가 합병한다……. 합병하자마자 투마로우가 냉큼 집어 먹을 겁니다.”
“합병? 어떻게요?”
“적대적 인수 합병으로요. 기존의 주가에서 20% 더 준다고 공시하면 저희에게 주식을 팔지 않을 주주가 있을까요?”
“그럴까요?”
“그럼요. 열 주 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별 감흥이 없겠지만 1억 달러를 가지고 있는 기업의 경우는 다르죠. 특히 금융사에게 20%면 일 년 장사를 아주 잘한 것과 맞먹는 금액입니다.”
“음. 그렇군요.”
1억 달러의 20%면 2,000만 달러, 한화로 240억 원인데 애국심은 진작에 집어 던질 돈이지.
“이거 내가 너무 위험한 소리를 들은 것 같군요.”
“그럼 나쇼날파리가 인수하시죠. 두 은행이 합병하면 다음 타깃은 나쇼날파리가 될 게 뻔합니다.”
“음. 소시에테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요. 그렇게 하시면 저희가 또 냉큼 먹어버립니다.”
“우리도요?”
“그럼요. 이건 기회니까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파트리스.”
재준은 잠깐 말에 뜸을 들인 후,
“둘을 동시에 인수하세요.”
“둘을 동시에? 그건 너무 큽니다.”
“아니에요. 자, 생각해 보세요. 둘이 합쳐서 3~400억 달러가 되면 아주 먹기 좋은 인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셋이 합쳐져서 700억, 아니, 시너지가 있으니 800억 달러가 되면 인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가격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은행이 덩치를 키우는 이유입니다.”
아.
파트리스는 작게 신음했다.
그동안 은행장이었지만 은행 합병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프랑스였기에 미처 합병의 가치를 몰랐다.
“그럼 우리도 주식 교환 방식으로 해야겠군요.”
“그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재준은 가만히 생각한 후,
“아닙니다. 나중에 알려드리지요.”
재무부가 움직이는 걸 알려주면 괜히 긴장만 하니까.
나중에.
***
프랑스 재무부.
신문을 들고 있는 미셸의 양손이 부르르 떨렸다.
“로랑, 물 한 잔 가져다 주겠나.”
“네.”
후.
차관 로랑은 잽싸게 자리를 뜨면서 당장 불똥을 피할 수 있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홀로 있게 된 미셸은 갑자기 신문을 바닥에 팽개치고 자근자근 밟았다.
“파트리스, 미친 거 아냐? 다 구운 빵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구겨진 신문 1면 헤드라인에 굵은 글씨로 적힌 글이 미셸을 더욱 화나게 했다.
[나쇼날파리은행, 소시에테은행과 방쿠바은행을 동시 인수 제의]
이때, 로랑이 물을 한 잔 들고 들어오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신문을 흘겼다.
“장관님. 여기 물 있습니다.”
“응, 고맙네.”
벌컥벌컥 단순에 물을 비운 미셸이 로랑에게 잔을 건네며 물었다.
“로랑, 나쇼날파리가 두 개 은행을 동시에 인수하겠다고 한 건 알고 있지?”
“오늘 아침 전격 발표를 해서 그때 알았습니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서 움직인 듯합니다.”
“그러게, 잘도 우리 눈을 피했어.”
“근데 좀 이상합니다. 파트리스 행장이 이런 대규모 인수를 진행한 경험이 없었을 텐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건 마치……. 파트리스가 갑자기 커다란 거인이 된 느낌이야.”
“관료 출신이라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인데 말이죠.”
“그러게…….”
미셸은 파트리스를 가만히 떠올려 봤다.
아니야, 도저히 그다운 행동이 아니야.
누가 옆에 있다면 모를까.
가만, 누가 옆에 있다?
미셸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자 로랑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짚이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며칠 전에 페렐라가 다녀갔거든.”
“그건 장관님이 이전에 알려주신 이야기 아닙니까. 페렐라에게 실망했다고. 그가 동양인 밑에서 일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동양인 말이야. 그가 투마로우 주인이라고 했어.”
“투마로우요? 설마 월가에 있는 그 투마로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로랑의 얼굴에 크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맞아. 왜 그러지?”
“투마로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뭐더라…… 임재준. 맞습니다, 임재준. 그의 기행이, 아니, 악행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악행?”
“그가 상대한 CEO들은 철저히 망가져 재기 불능 상태가 됐거든요.”
“그래? 난 투마로우가 단지 큰 은행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파트리스 말입니다. 그가 임재준을 만났다면 이번 인수 건은 말이 됩니다. 이번 인수 제의는 인수 합병을 여러 번 성공시킨 자만이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미셸은 로랑의 이야기가 어쩐지 설득력 있게 들렸다.
파트리스가 임재준을 만났다면. 그리고 그의 조언을 들었다면.
만약 이번 인수가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실 이것도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닌데…….
“로랑, 어차피 우리는 은행들을 다 통합하는 게 목표 아닌가? 그럼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하는데.”
“장관님. 임재준은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그냥 사람이 좋아서 파트리스를 도와줄 리가 없습니다. 만약 나쇼날파리가 소시에테와 방쿠바를 인수하고 임재준이 나쇼탈파리를 인수하면? 프랑스 은행 절반이 미국 은행이 되는 겁니다.”
이런.
미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당장 소시에테와 방쿠바에 사람을 보내.”
“네. 알겠습니다.”
***
나쇼날파리의 주식 교환 비율은 소시에테 7주에 나쇼날파리 15주, 방쿠바 8주에 나쇼날파리 11주로 정해졌다.
나쇼날파리는 14%와 18%의 시가에 프리미엄을 얹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거의 없었던 프랑스에서 이러한 제안이 연이어 터져 나오자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너 어제 나쇼날파리 행장 파트리스 인터뷰 봤냐?
-당연히 봤지. 근데 프리미엄 비율이 왜 다른 거야? 똑같이 해야 하는 거 아냐?
-나도 그게 의문이야. 3위 소시에테는 14%고 4위인 방쿠바가 오히려 더 높은 18%잖아.
-소시에테 주주들 은근히 열 받겠는데.
-열 받을 일도 많아. 14% 더 얹어 주는 것도 고마운 거지.
-근데 너 소시에테 주식 몇백 주 가지고 있던 거로 아는데.
-아, 그게 지난달에 팔았다.
-이런 미친놈.
-내가 이럴 줄 알았냐?
-근데 2, 3, 4위 은행이 합쳐지면 어떻게 되는데 이 난리야? 은행이 거대해지면 좋은 점이 있나?
-이러니까, 평상시에 주식도 좀 하고 경제 관념을 익혀야 하는 거야.
-거, 잘난 척은.
-잘 들어. 이 무식한 친구야. 나쇼날파리, 소시에테, 방쿠바은행이 합쳐지면 총자산 1조 달러, 시가총액 850억 달러, 프랑스 내 점포 수 4700개, 국민의 20% 수신율에 기업금융 시장점유율 40%, 투자은행 시장점유율 50%, 해외시장 70개국 진출, 진짜 메가뱅크가 나오는 거라고.
-근데 너는 그걸 왜 핸드폰 문자로 적어 놓고 다니냐?
-프랑스에서 은행 합병이 어디 흔한 일이냐? 거기다 인수를 하면서 주가에 프리미엄을 얹어 준다는데 다음 행보에 촉각을 세워야지. 바로 돈을 태울 준비를 해야 한다고.
-나도 돈 좀 준비해야겠는데.
***
브르타뉴방크.
이 은행은 프랑스 서부 끝자락에 있는 브르타뉴 지역에 위치해 있다.
지역 주민을 위한 소규모 은행으로 여신액이 10만 유로도 안 되는 곳이다.
박민수와 윌켄은 아주 아담한 은행 앞에 섰다.
“팍, 이건 작아도 너무 작은 거 아냐?”
“임 대표가 정부의 지분이 하나도 없는 민간 은행을 찾으라고 했어.”
“그래도 이건 뭐 동네 전당포도 아니고. 정말.”
“그런데 이런 은행이 프랑스 5위인 엥도은행을 인수하면 난리가 나겠는데.”
“되도록이면 프랑스 전역이 들썩이게 만들라고 했으니까. 이보다 좋을 순 없겠지.”
박민수와 윌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은행 안으로 들어섰다.
***
프랑스 재무부.
미셸은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장관님. 어떻게 할까요? 저희가 개입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브르타뉴방크란 은행이 5위 엥도를 인수하겠다고 일주일 전 신문에 광고를 냈다.
조건은 현 시세보다 25% 프리미엄을 얹어서 주식을 매수하는 것.
“현재 얼마나 매집했다고?”
“18%가 브르타뉴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돈으론 얼마야?”
“20억 유로입니다.”
20억 유로라…….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네.
“아니, 그 길가에 가판 두어 개 합친 크기의 지방 은행에서 20억 유로가 쏟아져 나왔다? 아이고, 머리야.”
“설마 브르타뉴겠습니까? 뒤에 누군가 있겠지요.”
“근데 그 누군가가 누구냔 말이지. 브르타뉴 행장 없어?”
“말씀드렸지만 전 직원이 이탈리아 몰타로 휴가를 가고 없습니다. 아예 은행 문을 닫았습니다.”
미셸은 소파에 앉아 머리를 뒤로 젖혔다.
가뜩이나 나쇼날파리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데.
누군가 브르타뉴 뒤에 숨어서 일을 꾸미고 있다니.
근데 문제는 그 누군가가 누군지 감이 잡힌다는 거다.
저 망할 놈의 투마로우 임재준이 분명한데.
알고 있다고 해도 뭐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니.
“로랑, 내 예감엔 말이야. 브르타뉴 뒤에 임재준이 있는 게 확실하단 말이야. 근데 무슨 짓을 벌이는지 감이 안 잡혀.”
“혹시, 나쇼날파리를 떠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닐까요?”
“나쇼날파리 인수를 포기했다?”
“네. 차라리 엥도를 인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으니까요.”
“음. 엥도도 버리기엔 아까운데…….”
“아무래도 하나는 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쩝.
미셸은 안타까움에 입 안이 온통 썼다.
“로랑, 나쇼날파리는 어떻게 돼가고 있지?”
“18% 프리미엄을 받는 방쿠바 주주들은 인수에 찬성하는 편이지만 14% 프리미엄을 받는 소시에테 주주들은 반대하고 있습니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 했지.”
“네. 내일 최종 결정이 나면서 주식 매매에 들어갑니다.”
“결국 우리가 하려던 소시에테와 방쿠바 합병은 물 건너간 건가?”
“저희 프리미엄이 10%라 차이가 너무 납니다.”
“제길, 다시 조정하자니 시간도 없고 재무부 체면이 말이 아니네.”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 진행입니다.”
“그래?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