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미친놈하고 다신 엮이고 싶지 않아(6)
재준은 투렉셀을 향해 물었다.
“크리스, 당신들은 돈이 준비되어 있었나요?”
“우리도 스트러스트뱅크에서 자금이 조달된 상태입니다. 지급 확약서도 있고요.”
다시 지미 브라운을 봤다.
“봐요? 다들 준비가 되어있잖아요.”
지미 브라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이상하다.
다들 이놈과 사전에 공모한 것 같은데.
가격을 올리려고 서로 짜고 판을 벌인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인수 가격은 차이가 별로 없었다.
서로 짰다면 최종 인수에서 기권했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투자은행이 스톡체인을 인수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건 말이 안 돼.
“알겠습니다.”
“당장.”
“잠시 기다리세요. 변호사를 통해…….”
“아니, 변호사는 나중에 서류 정리하는 사람이고 일단 돈이랑 주식이랑 바꾸자고. 내가 할 일이 많아요.”
“한 시간. 한 시간 안에 채권을 발행해서 주겠소.”
“이건 또 뭐 신박한 개소리야?”
“뭐, 뭐라고?”
“아니, 은행 말단이 채권을 발행하면 위로 보고하고 승인받는다는 건 알겠는데. 당신은 대표 아닌가요? 대표가 발행하라면 1초도 안 돼서 발행하는 거지. 무슨 한 시간? 설마 채권이란 종이를 인쇄해서 가져오는 건 아니죠? 아닌가, 돈이 없는 건가? 돈이 없구나. 사기를 친 거예요?”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재준의 경우 없는 행동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 지미 브라운을 저렇게까지 몰아붙이니 은근히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이러다 월가의 조롱거리가 된다.
지미 브라운 곁으로 찰스에드먼드, 살로먼스미스, 헨리브라더스 대표가 다가와 속삭였다.
‘지미, 저놈의 술수에 엮인 것 같아. 나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게 되었어. 이러다 안 판다고 입찰을 취소하면 소송에 휩싸이고 망신을 당하네. 일단 우리 네 곳에서 125억 달러씩 입금하고 나중에 채권을 발행해 메꾸는 거로 하자고.’
지미 브라운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JP스탠리, 찰스에드먼드, 살로먼스미스, 헨리브라더스를 통해 입금합니다.”
“투마로우 상업은행으로 보내줘요.”
잠시 후.
강호석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고 재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확인됐다네요. 일단 여기 주식 영장 있습니다.”
허.
모두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앞의 상황을 지켜봤다.
저 큰 금액이 순식간에 이동한다고?
아니지, 투자은행에서 상업은행으로 은행 간 거래니까 499억 달러가 움직이는 건 둘째치고 합의서나 증서, 심지어 변호사도 없이 거래가 진행된다고?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미 브라운은 주식 영장을 받아서 꺼내 재준의 85%의 스톡체인 주식을 확인했다.
드디어 주식을 손에 쥔 지미 브라운.
그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식의 거래라면 나도 해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재준이 해보라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탁탁.
지미 브라운이 주식 영장을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대주주의 자격으로 지금 당장 임재준을 스톡체인의 CEO 자리에서 박탈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재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확실하죠?”
“그렇소. 지금부터 당신은 더 이상 스톡체인과 관계가 없습니다. 나가세요. 당장.”
“가만, 가만.”
재준이 신호를 보내자 강호석이 이사회에 문건 하나를 넘겼다.
이사회는 문서를 확인하고 강호석에게 돌려주었다.
“조항이 만들어진 날짜가 인수 전입니다. 인정합니다.”
지미 브라운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뭔 날짜?
강호석이 단상에 올라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스톡체인은 현 CEO가 적대적 M&A과 같은 타의에 의해 CEO 신분을 박탈당할 시 100억 달러의 퇴직금을 지급한다.”
뭐야?
지미 브라운은 발작이 난 사람처럼 강호석에게 달려들어 문서를 빼앗았다.
이런 개자식들!
이사회를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이건 사기입니다. 이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다분히 고의성이 의심됩니다. 이 퇴직금을 철회해야 합니다.”
이사회 중 한 명인 M&A 전문 변호사 피터 앳킨스이 일어섰다.
“JP스탠리, 이건 명백한 당신들의 실수입니다. 인수 전에 모든 문서와 사실은 적시되어 있었습니다.”
“우린 찾지 못했습니다.”
“그걸 왜 우리에게 따집니까? 저 문건은 분명히 입찰 전에 작성되어 있었고 스톡체인이 자발적인 인수도 아닙니다. 분명 외부에서 들어온 적대적 M&A입니다. 적대적 M&A에서 모든 서류를 보여주는 바보는 없습니다. 인수자가 찾아내야 하는 겁니다. 당신들이 스톡체인을 성실하게 대하지 않은 대가라고요.”
맞다.
가장 중요한 건 문건이 만들어진 날짜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이 문건이 사규에 적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찾지 못한 건 사규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은 JP스탠리의 잘못이다.
퇴직금 100억 달러.
이게 윌켄과 첫 대화에서 나왔던 골든 패러슈트.
떨어지는 CEO를 위해 준비된 황금 낙하산이다.
재준이 지미 브라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100억 달러. 줘야지요.”
“소송을 준비하겠어.”
“뭐, 그러시든지. 근데 그럴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네.”
재준이 퍼스트필라델피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퍼스트필라델피아.”
JP스탠리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내가 JP스탠리를 LBO 하려는데 같이 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지미 브라운은 한 마리 독사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싸늘함을 느꼈다.
JP스탠리를 LBO 하겠다고?
재준의 말은 이어졌다.
“JP스탠리를 인수한 후 상장 폐지하고 묵은 때 좀 벗겨낸 다음에 재상장하려는데 투마로우 상업은행과 합작품 하나 만드시죠.”
잠깐 장내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심지어 당사자인 짐 매이마저 말을 잃어버렸다.
현재 투자은행 1위 JP스탠리를 LBO 하겠단 생각을 과연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리고 상장 폐지?
묵은 때를 벗겨낸다?
안에 있는 묵은 때는 유대인의 잔재를 씻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없어지고 남는 건 투자은행의 포트폴리오뿐.
사실 돈이 되는 건 포트폴리오지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유대 자본은 JP스탠리만 있는 게 아니다.
아직 3대 투자은행도 있고 크고 작은 은행들을 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짐 매이가 선뜻 대답을 못 하자,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제이 프리츠크가 나섰다.
연준 윌리엄의 제안으로 퍼스트필라델피아를 돕겠다고 나선 시카고 최대 부호이며 화이트호텔 그룹의 오너인 거대 개인 투자자.
재준은 천천히 고개를 까딱였다.
“환영합니다.”
판이 짐 매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짐,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러다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짐 매이가 앞으로 나섰다.
“저희도 참여할 것입니다.”
재준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보았다.
“또 없으십니까?”
“전 당연히 합류합니다.”
읠켄이 앞으로 나서자 투렉셀이 뒤로 빠졌다.
이미 투렉셀은 윌켄의 진출을 막지 못했다.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아직은 참전하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폴리스트리트 연합은 뒤로 빠졌다.
이들의 삼분의 일은 유대인이다.
워서스틴과 페렐라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
가로수가 끝도 없이 늘어져 있는 한가로운 길을 워서스틴과 페렐라가 걷고 있었다.
그 뒤로 두 대의 고급 승용차가 조용히 따랐다.
“페렐라, 제일 재밌는 구경을 놓쳐서 어떡하냐?”
“재밌다고?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야. 미친 짓이지. 30억 달러 회사를 499억 달러에 팔아먹는 미친놈하고는 다신 엮이고 싶지 않아.”
“하긴, 난 300억 달러를 부르는 순간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어.”
“이야, 천하의 위서스틴이 심장 타령을 하다니. 대단하긴 했나 보네.”
피식.
워서스틴은 지난 시간을 더듬으며 실없이 웃었다.
“근데, 저 임재준이란 인물은 어떻게 자신의 회사가 499억 달러에 팔릴 줄 알았을까?”
“나도 그게 궁금해. 자네의 그 천재적인 머리로도 계산이 안 나오는 인수 가격을 저렇게 정확하게 예측해 내다니 놀랍긴 해.”
“처음에 윌켄이 찾아와서 우리 둘이 불 좀 지피라고 제안했을 때 난 윌켄이 이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임재준이란 말이지. 저런 인물이 어떻게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신기해. 그러니 윌켄이 그의 밑으로 들어간 거겠지만.”
“이거 내부자 거래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걸 밝히려면 최소한 20년은 법정 싸움을 해야 할걸. 증거 자료가 하나도 없잖아. 녹취도 없고 서로 주고받은 문서도 없는데. 우리도 구두로만 약속했을 뿐 남긴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럼, 우린 이제 임재준의 말대로 살로만스미스를 LBO 하는 건가?”
“그것도 궁금해. 우리에겐 살로만스미스지만 찰스에드먼드와 헨리브라더스는 누가 먹게 되는 건가?”
“그것도 임재준이 찍어둔 대상이 있겠지. 125억 달러나 현금을 써서 휘청대는 먹이를 가만 놔둘 리 없으니까.”
“이로써 월가에서 유대 자본이 한동안 힘을 쓰지 못하겠지.”
“아직은 아니야. 버피 헤서웨이가 있으니까.”
오마하의 현인 버피.
그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투자은행이 아닌 보험을 주 종목으로 바꿨다.
그리고 기업을 인수할 때 절대 LBO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인수한 기업은 자신의 자회사나 계열사로 편입해서 덩치를 키웠다.
페렐라는 뭔가 생각났는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워서스틴, 우리 투마로우와 합병하는 건 어떨까?”
“뭐? 왜?”
“생각해 봐. 우린 이대로 각자의 길을 갈 거야. 그럼 과연 얼마나 덩치를 키울 수 있을까? 어차피 우린 투자은행이고 상업은행의 돈을 빌려 써야 하는데. 그 은행은 투마로우가 될 게 뻔해. 이미 투마로우 손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란 소리지.”
“그럴 바엔 차라리 투마로우 품으로 들어가자?”
“그렇지, 거긴 윌켄도 있고 앤드류도 있어. 또 연준의 윌리엄이 있잖아. 우리로선 절대 손해가 아니야. 어차피 버는 성공보수는 똑같아. 우리가 회사를 꾸려나간다고 더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워서스틴은 페렐라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장사다.
사실 다시 퍼스트필라델피아에게 손을 내밀까 싶었지만, 오히려 투마로우라면 더 든든한 뒷배가 될 것이다.
이때,
띠리리링.
페렐라의 전화벨이 울렸다.
“미셸? 어쩐 일입니까?”
-페렐라, 자네의 머리가 필요하네.
“프랑스에서 무슨 일로 제가 필요합니까?”
-자네도 프랑스엔 아직 대형 은행이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지금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롱이 나를 재무장관에 임명하려 하네. 조건은 하나야. 전 은행의 국유화. 이를 통해서 대형 은행으로 합병하려는 거지. 하지만 국민들이 보는데 강압적으로 합병할 수는 없잖은가.
“그러니까, 제가 가서 프랑스에도 대형 은행을 만들어 달란 말입니까?”
-그렇지. 프랑스는 아직 대형 은행에 대해 아는 이가 없어. 다들 고만고만한 은행만 39개가 있네.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1시간 내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페렐라는 전화를 끊고 웃음을 억지로 참는 워서스틴을 봤다.
“워서스틴, 투마로우로 다시 가야 할 것 같은데.”
“거참, 결정이 저절로 나버렸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