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미친놈하고 다신 엮이고 싶지 않아(2)
“어디서 나온 정보입니까?”
-연방준비은행 행장 윌리엄이 귀띔해줬습니다. 전에 풀었던 스톡체인 주식을 거두어 드릴까요?
“아니요. 그보다 누가 이끄는지 아십니까?”
-JP스탠리의 지미 브라운입니다.
“지미 브라운이라…….”
이거 봐라.
아주 재밌는 게임을 선포하셨네.
그럼, 나도 대표 선수를 내세워야겠지.
머리 좋고, 인맥 넓은 사람.
재준의 기억에 딱 적당한 사람이 떠올랐다.
“앤드류, 마이클 윌켄을 찾으세요.”
-마이클 윌켄이라면 정크 본드의 왕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그에게 복수의 기회를 줍시다.”
-그 사람은 월가에서 축출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월가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겁니다.”
-아, 일단 알겠습니다.
마이클 윌켄.
80년대 정크 본드의 왕.
사모펀드 업계의 초석을 다진 실질적인 인물.
80년대에 4년 만에 10억 달러, 한화로 1조의 개인 수입을 올린 거물이다.
하지만 너무 잘나가면 적이 느는 법.
공화당 출신 연방검사 루돌프에게 찍혔다.
2년 동안 불법 정황을 조사했지만, 루돌프는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루돌프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윌켄의 회사 투렉셀에 법죄단체조직법을 적용한다고 협박했다. 그 결과, 투렉셀 경연진은 불법 증거를 찾아 루돌프에게 건네며 윌켄을 내쳤다.
근데 그 불법 증거라는 게 회사 직원에게 투자 조언을 해준 것인데 그게 마침 윌켄이 인수를 진행하는 회사였다.
윌켄은 내부자 거래로 고발되었고 22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월가는 윌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윌켄은 월가를 떠나 전립선암을 연구하는 비영리 단체 윌켄연구소를 세우고 다시는 월가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어디 역사적인 인물이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볼까.
***
윌켄연구소.
환하게 웃는 앤드류는 윌켄과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앤드류에게 윌켄은 롤모델이었다.
아니, 이 시대 월가 사람의 대부분은 윌켄 같은 거물이 되고 싶어 했다.
앤드류는 대화의 시작을 윌켄의 명성으로 시작했다.
초창기 정크 본드, 즉 고수익채권 부서에서 매해 200%의 수익을 올렸던 이야기.
회사 실적이 안 좋아져 채권 발행 후 채권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회사에 집중투자해 자신이 몸담은 회사를 단숨에 주목을 받게 만든 이야기.
그 후 모든 은행이 정크 본드에 몰려든 이야기.
오죽했으면 월가의 유행어 중의 하나가 ‘윌켄이 말하길’이었겠는가.
분위기가 무르익자 앤드류가 윌켄에게 본론을 이야기했다.
“윌켄, 스톡체인 인수를 지휘해 주시죠.”
윌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안 갑니다. 월가는 저를 버렸어요. 아니, 제가 그 자리에 앉으면 투마로우도 미운털이 박힐지 몰라요. 괜한 위험 자초하지 말고 옛 기억은 그대로 묻어 둬요.”
“지미와 투렉셀을 원망하지 않습니까?”
지미와 투렉셀을 듣는 순간 윌켄의 얼굴에 미묘한 경련이 일었다.
자신을 쫓겨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JP스탠리의 대표 지미.
자기 살겠다고 그동안 먹여 살려준 자신을 버린 사모펀드 투렉셀.
후.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군요.”
“윌켄, 당신은 이제 막 쉰이 되었죠. 이대로 50년의 세월을 더 죽이시려는 겁니까?”
“꼭 내가 100년은 살 것 같이 말하는군요.”
“윌켄연구소가 암을 연구하는 곳 아닙니까? 100살이 아니라 120살까지도 거뜬할 것 같은데요.”
하하.
윌켄이 애써 이야기를 흘려보내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들과 맞서지 말고 동료로 삼으세요.”
“저희 무기가 꽤 쓸 만합니다.”
“제 말을 듣지도 않는군요.”
“여기, 제 명함입니다. 일단 보시고 생각하시죠.”
윌켄은 앤드류가 내민 명함을 보았다.
투마로우금융지주회사.
투마로우 상업은행.
투마로우 투자은행.
스톡체인증권.
라는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마지막에.
뉴욕 연방준비은행 이사.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뒤를 받치고 있다고?
윌켄은 고개를 들어 빙그레 웃고 있는 앤드류를 봤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희 보스가 임재준이라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뱅크오브에이스를 인수하고 그랜드월을 재기 불능으로 무너뜨렸다는 그 사람이죠?”
“그가 뒷배가 되어드릴 겁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왜 투마로우 뒤를 봐주고 있는 겁니까?”
“음. 거꾸로 생각하시죠. 투마로우 뒤를 봐주는 게 아니라 뉴욕 연방준비은행 뒤를 봐주는 게 투마로우입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뒤를 봐준다?
윌켄은 정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연준의 윌리엄은 정부 측 사람인데. 혹시…… 유대 자본과 싸우려는 겁니까?”
“꼭 그렇게 단정 짓지는 마십시오. 단지 누구든 공격하면 적이 되는 게 월가 아니겠습니까?”
“이 게임의 승자는…….”
“월가를 지배하겠죠.”
윌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시 월가를 지배한다…….
앤드류가 윌켄의 생각을 읽은 듯 손을 내밀었다.
“다시 왕이 돼보시죠.”
윌켄이 앤드류의 손을 잡았다.
“다시 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버린 놈들 얼굴은 한번 보고 싶군요.”
재준 밑으로 왕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
L.S.Company 대표실.
앤드류는 윌켄을 데리고 재준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재준은 윌켄과 악수를 격하게 하고 자리를 권했다.
윌켄은 슬쩍 재준을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젊군요.”
“하하, 윌켄 당신도 10억 달러를 번 나이가 30세였습니다.”
풋.
“그렇긴 하지요.”
재준은 할아버지에게서 강탈한 차를 윌켄에게 내주었다.
“드셔 보세요. 한국에서 가져온 차인데 정신을 맑게 해 줍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향을 음미한 재준이 말을 건넸다.
“이렇게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줘서 고맙네요.”
“이 업계로 돌아오긴 했지만 원래 제 능력은 투자풀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다시 만나줄지 의문이고요.”
전성기 윌켄의 투자풀(investment pool)에는 미국 전역에 돈 좀 만지는 사람은 다 들어있었다.
“만날 겁니다. 돈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데 안 만날 리가 없죠.”
풋.
그렇지. 돈이 된다면 친구도 팔아먹을 놈들이니까.
“저쪽은 4대 투자은행이 집결했습니까?”
“찰스에드먼드, 살로먼스미스, 헨리브라더스, 그리고 JP스탠리가 손을 잡았다고 들었어요.”
윌켄은 잠시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재준에게 물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선 투마로우뱅크를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나누어서 계열사로 분리하고요.”
“다음은?”
“제가 스톡체인의 CEO가 됩니다.”
“다음은?”
“스톡체인이 투마로우 투자은행을 자체 인수합니다.”
이것 봐라.
자기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인데.
윌켄의 머릿속에 예전 300억 달러의 딜이 떠올랐다.
재준은 거침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스톡체인 덩치를 최대한 키우면 놈들 목구멍에 마른침이 가득 넘어가지 않겠어요?”
“그다음은?”
“스톡체인 인수를 적극 환영합니다.”
“그다음은?”
“이사회를 열어 나에게 골든패러슈트 조건을 심어 놓을 겁니다”
골든패러슈트, 황금 낙하산.
윌켄의 눈가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무서운 놈이다.
이 게임의 승자는 죽는다.
윌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재준은 말을 이었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윌켄, 당신도 스톡체인을 인수한다고 발표하세요. 물론 저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당신의 투자풀이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저보고 전쟁을 선포하라는 거군요.”
“맞아요. 당신은 스톡체인을 인수하겠다고 선언하세요.”
하하하.
“좋아요. 이 전쟁에 월가 전체를 뛰어들게 만들겠습니다.”
“몇이나 등장시킬 수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둘입니다. 하나는 적대적 인수에 능숙한 이들.”
“투렉셀 사모펀드군요. 그동안 잠잠하던 차에 대형 M&A가 나타나니 심장이 두근두근하겠죠. 여긴 내가 맡죠.”
“하나는 마지막 기회인 이들.”
“이걸 동아줄로 삼아 부진에서 탈출하려는 이들?”
“맞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세력도 부채질해 보려 합니다.”
“좋아요. 윌켄. 자, 우리 게임을 즐길 준비를 해 봅시다.”
재준은 앤드류에게 지시했다.
“앤드류, 투마로우뱅크를 둘로 쪼개세요.”
“방금 말한 대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으로 실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상업은행 자금을 이용하여 투자은행을 인수하세요.”
“네.”
드디어 먹음직한 회사로 만들었다.
온라인증권에서 부동의 1위인 스톡체인이 마이클이 지휘하고 있는 투자은행을 인수해서 규모를 키운다.
윌켄이 발표하는 순간부터 스톡체인의 가치는 30억 달러에서 수직으로 상승할 것이다.
***
[왕이 돌아왔다. 윌켄 스톡체인 인수 발표]
[스톡체인 오너 임재준 적대적 M&A 환영 “사상 최대의 인수 환영한다. 단,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 오길 바란다. 피라미들은 근처에도 오지 말길.”]
[최대 인수전이 될 전망. 현재 스톡체인 가치 30억 달러, 과연 얼마까지 뛸 것인가]
[온라인증권회사 1위 스톡체인 인수에 월가 투자은행 딜러들 바짝 긴장]
***
JP스탠리 회의실.
JP스탠리의 요청으로 당대 최고의 유대 자본 투자은행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찰스에드먼드, 살로먼스미스, 헨리브라더스. 대형 투자은행이 이렇게 넷씩이나 모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지미, 윌켄이 먼저 선수를 쳤어.”
“나도 뉴스는 봤어. 근데 투마로우가 환영을 표하다니 너무 의외라고 생각이 들긴 해.”
“지미, 정말 참여할 생각인가?”
“그랜드월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느꼈어. 투마로우 미스터 임은 월가에 있으면 꽤 위험한 인물이야.”
“가뜩이나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윌리엄이 투마로우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러니까 하는 거야. 연방준비은행을 다시 우리 사람으로 채워야 하지 않겠어? 투마로우를 믿고 있는 연방준비은행에 한 방 날려야 해. 지금 스톡체인이 상장 전일 때 인수해서 상장시키면 몇 배의 이득이 생기기도 하고.”
연방준비은행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스톡체인을 인수 후 상장시킨다.
JP스탠리의 지미 브라운이 노린 것은 바로 인수 후 상장.
무턱대고 투마로우를 공격하는 무식한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유망한 기업을 인수해서 값나가게 포장한 후 상장시켰을 때 이익은 최소 50% 이상이었다.
현재 스톡체인의 가치는 30억 달러로, 최소한 15억 달러를 벌 수 있다.
JP스탠리 1년 수수료와 맞먹는 금액이다.
이 딜만 성사시키면 JP스탠리의 위상은 아무도 넘보지 못한다.
그러나 의욕만 가지고 덤빌 수는 없는 일.
“그리고 윌켄이 돌아왔어.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야.”
“우리 채권팀을 전부 동원할 거야.”
“살로먼스미스 채권팀이라면 믿을 만하지.”
살로먼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채권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은 팀이 살로먼스미스 채권팀이다.
하지만 10년 전 윌켄의 활약으로 유일하게 기업 인수 분야에서 밀려난 이후 현재까지 그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번엔 반드시 기업 인수 분야에서도 살로먼스미스가 최고라는 걸 보여주겠다.
“스톡체인이면 최소한 30억 달러가 필요해, 아니, 인수 전에 누가 끼어든다면 금액은 100억 달러까지 치솟을지 몰라.”
“그 정도 회사채를 발행하려면 얼반 그룹이 좋겠지?”
“그렇지. 얼반 그룹이 적당해.”
얼반 그룹은 미국 최대의 우량 금융사로 2,000억 달러의 총자산을 가진 거대한 금융제국이다.
돈이 된다면 달려들 것이다.
윌가를 움켜쥐려는 야망, 거액의 수수료라면 무엇이든 하는 자본, 정상이 아니면 못 견디는 야망으로 가득한 이들이 첫 번째 팀으로 뭉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