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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97화 (97/477)

제97화 판을 정말 잘 짜는 것 같아(4)

“51%면 재우자동차를 가지겠단 소린가?”

“전 금융인입니다. 제조업엔 관심 없습니다. 다만 회장님도 이 정도 배짱은 보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찾아가겠다는 의지 같은 거요. 아시겠지만 전 어설픈 건 싫어합니다.”

“좋아, 그런데 자금은 정말 가능한가?”

“회장님.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제 금융지주회사가 대한민국 전체 금융사보다 큽니다. 금액만 말씀하세요.”

“재우캐피탈 자산이 2조 원 정도 되네.”

“알겠습니다. 그럼 2조 원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재준이 말을 멈추자 손 회장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저희가 모던투신에 살짝 흘릴 겁니다. 괜히 동요하지 마세요.”

“흘리다니?”

“채권 발행에 대한 소식을 모던투신이 알게 할 겁니다. 그러면 시중에 나와 있는 재우 그룹 채권을 모던투신이 사들이겠죠.”

“모던자동차가 팔렸을 때 이익을 봐라 이건가?”

“그래야 모던 그룹이 자동차에 미련을 버릴 테니까요.”

“그러면 인수가 빨라지겠군.”

“그렇습니다.”

“역시 임 팀장, 아니 이제 임 대표라고 해야겠지. 임 대표는 판을 정말 잘 짜는 것 같아. 하하하.”

잘 짜는 건 맞습니다.

그쪽에 이득이 안 될 뿐이지.

***

며칠 후.

재우 그룹 회장실.

손 회장은 땀 맺힌 손바닥을 닦으며 전화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재준이 돈을 만들어 준다고 할 때는 그저 안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걱정이 되었다.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혹시 채권 발행이 잘못되지는 않았겠지.

띠리리링.

내선 번호 불빛을 확인하니 비서실이었다.

“무슨 일이야.”

-재우캐피탈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바꿔.”

돈이 들어왔다.

약속한 2조가.

후.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손 회장은 전화를 끊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담배를 끊든지 해야지 원.

어쨌든 돈이 들어왔으니 정부와의 딜만 남았다.

은행 대출만 갚아주면 모던자동차를 넘기기로 이미 정부와 합의를 봤다.

은행 대출이 1조 2천억이나 돼서 문제지만.

이때,

띠리리링.

신차 연구소?

“왜?”

-헬기 한 대가 일주일마다 한 번씩 여기 항공을 돌고 갑니다.

“뭐? 얼마나 됐는데?”

-한 달 정도 됐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아차린 거야?”

-죄송합니다.

헬기?

누군지는 뻔하다.

모던자동차 개자식들, 이제 공공연하게 스파이 짓까지.

그만큼 놈들도 똥줄이 탄다는 뜻이겠지.

손 회장은 모던자동차 인수 자금을 만들기 위해 신차 4종의 출시에 박차를 가했다.

출시 한 달 전에 사전 예약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 타당한 금액이 나온다는 보고도 받았다.

하지만, 모던자동차에게 선수를 빼앗긴다면?

신차 출시가 맞물리면 사전 예약도 겹친다.

당연히 예약이 양쪽으로 분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큰일은 이게 아니야.

만약 모던자동차가 우리 디자인을 베끼고 가격을 인하해서 출시한다면?

“핵심 디자인 바꾸는 데 얼마나 걸려?”

-회장님, 그건 안 됩니다. 차체의 외형이 문제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 외형이 뒤틀어집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얼마나 걸리냐고.”

-1년도…….

“석 달 안에 끝내.”

-그건 무리입니다.

“난 석 달이라고 했어. 끊어.”

전화를 끊고 오락가락한 정신을 다잡아 보았다.

모던자동차,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시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오늘 재경부 장관과 만나 인수를 끝낸다.

시간을 확인한 손 회장은 내선 버튼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재경부와 약속한 시각이 몇 시지?”

-두 시간 후입니다.

“알았어.”

-저 근데 회장님. 지금 뉴스를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 이야기라도 나왔나?”

-네. 근데 안…….

“알았어. 끊어.”

제기랄, 도대체가 조용한 날이 없어.

손 회장은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TV를 틀었다.

[오버럴모터스 모던자동차 인수에 뛰어들다]

[금감원과 재경부 양쪽 모두 일단 긍정적]

“저런 양아치 같은 놈들. 스미스, 어찌 된 일인가. 서로 협력하자고 해 놓고 뒤통수를 쳐? 근데 재경부는 또 왜 긍정적이야?”

얼굴을 굳힌 손 회장이 숨을 크게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상관없어.

아직은 내가 든 패가 더 좋아.

손 회장이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아팠지만 재우캐피탈에 들어온 돈을 생각하며 마음을 든든히 먹었다.

이때,

[속보입니다. 재우 그룹의 분식회계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를 처음으로 보도한 세경일보에서 증거 자료로 제시한 것은 위장 계열사와 부채 규모를 장기간 조작한 회계장부입니다.]

기자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험하게 일그러지는 손 회장의 얼굴.

“어떻게 된 일이야!”

손 회장이 리모컨을 집어 던지며 고함쳤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비서를 호출했다.

“당장 차 대기시켜. 당장!”

손 회장은 그 길로 재경부로 달려갔지만, 장관은 만나 주지 않았다.

***

금융감독원 원장실.

조용근 금융감독원 원장과 재우 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 유호근이 나란히 앉고, 그들 앞에 오버럴모터스의 해외사업부 총괄부사장 루이스와 그의 변호사가 자리했다.

조용근 원장과 유호근 의장은 전 윤헌재 원장의 최측근으로 이들이 장악한 금감원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재우자동차 인수를 금감원에 통보하기 위해 들렀다.

조 원장은 커피를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우자동차를 인수하겠다고요? 모던자동차가 아니고요?”

루이스는 변호사와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대답했다.

“네, 재우자동차. 이미 채권단과 이야기는 마쳤습니다.”

“아, 하우징은행 말씀하시는군요.”

하우징은행?

루이스가 변호사를 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우징은행 아닙니다. 저희 투마로우를 말하는 겁니다.”

조 원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자료를 들추며 말했다.

“투마로우뱅크코리아는 채권단이 아닌데요.”

“NO, 투마로우금융지주회사를 말하는 겁니다. 그들이 재우캐피탈의 채권 17억 달러를 가지고 있고 재우캐피탈은 재우자동차의 51%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투마로우가 최대 채권자인데. 몰랐습니까?”

유호근이 조 원장에게 뭔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조 원장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지금 말하는 투마로우가 미국에 있는 본사를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한국인이면서 왜 투마로우를 모르는 거죠? 투마로우 소유자가 한국인인데. 미스터 임, 임재준을 모르십니까?”

“네?”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유호근이 조 원장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한국인이라면 저희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언제 미국에서 금융지주회사를 차린 거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한국인이라는 게 중요한 겁니다. 일단 루이스에게 저희와 거래를 제의하시죠.”

조 원장은 일리 있는 말이라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루이스, 재우자동차를 얼마에 인수하실 겁니까?”

변호사가 말해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스가 인수가격을 알려줬다.

“70억 달러입니다.”

뭐라고요?

한화로 8조 4천억 원?

아니 왜?

방금 17억 달러라고 해 놓곤 거의 네 배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사는 거야?

흡.

조 원장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유호근이 재빨리 조 원장에게 뭔가 속닥였다.

조 원장은 마른침을 삼킨 후 말했다.

“루이스, 저희 금감원이 제안 하나 하죠.”

“말해 보세요.”

“재우자동차 국내 대출은 1조 2천억 원입니다. 인수 대금으로 2조 원만 쓰시죠. 1조 2천억은 은행으로, 8천억은 별도.”

별도?

루이스는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수수료를 8천억이나 달라?

하지만 8조 4천억 원짜리 기업을 2조에 살 기회였다.

자그마치 6조 4천억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런데,

변호사와 말을 나누던 루이스가 한 말은,

“거절합니다.”

루이스가 두 사람을 정색하며 표정을 굳혔다.

“거절한다고요? 투마로우가 17억 달러에 사서 70억 달러에 팔려는데 그냥 바가지를 쓰시겠단 말입니까?”

“투마로우가 17억 달러에 사서 70억 달러에 파는 건 그들의 능력입니다. 우린 재우자동차의 가치가 70억 달러가 적당하다고 판단해서 사는 겁니다.”

“그럼, 가격이 더 낮은 저희 제안은 왜 거절하는 겁니까?”

“여러분은 투마로우가 어떤 회사인지 전혀 모르시는군요.”

“금융지주회사라고 했잖아요. 은행이나 증권, 보험을 하나로 묶어서 관리하는…….”

“전 여러분이 투마로우를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호근과 조 원장이 이맛살에 주름을 만들었다.

루이스는 혀를 쯧쯧 차며,

“투마로우가 마음만 먹는다면 월가를 동원해 외환위기의 한국은 통째로 사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여기는 정보에 너무 어둡군요. 현재 월가는 전 세계 금융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 돈을 전부 움직일 수 있는 회사가 바로 투마로우입니다.”

“규모가 그렇게 크단 말입니까?”

“국가를 상대로 대출을 하는 기업입니다. 러시아에 받을 돈만 160억 달러죠. 하지만 이 정도 돈은 투마로우 한 달 이자 수익에 불과할 겁니다. 지금 겨우 6조 아끼자고 그런 기업과 원수가 되라는 겁니까?”

“그래도 재우자동차는 저희의 허락이 있어야…….”

루이스는 변호사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에드워드, 뭐라고 하는 거야?”

“그냥 잊으세요. 헛소리입니다. 투마로우에 재우캐피탈만 인계받으면 됩니다. IMF 총재가 인수 통보만 하라 그랬으니, 인제 그만 가시죠.”

조 원장이 나서서 가는 걸 말렸다.

“잠깐, 하우징은행에 있는 대출은 어떡하려고요?”

“그걸 왜 금감원이 걱정합니까? 여긴 한국 내 부실기업 처리하는 게 목적 아닙니까?”

“저희는 금융 전반에 걸쳐 관리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부실 금융기업 관리나 잘하세요. 하우징은행은 저희와 따로 대화로 풀어나갈 것입니다. 부실기업 일이 아닌 것도 금감원이 나서서 조율하는 겁니까? 아무리 로비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다지만 아무 데나 수수료를 청구하다니…….”

루이스는 기분이 상한 것을 감추지 않으며 원장실을 나갔다.

유호근과 조 원장은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분노를 터트렸다.

“저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고 나간 거야?”

“참으세요. 곧 IMF 체제에서 벗어날 겁니다. 그때까지는 특히 미국 자동차 기업의 요구를 다 들어주라는 VIP의 지시도 있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정말 안하무인이군. 그리고, 누구? 투마로우 주인이 한국인 누구라고 했죠?”

“임재준. 네, 임재준이라고 했습니다.”

임재준.

익숙하지는 않으나 분명 낯설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조 원장은 두어 번 그 이름을 곱씹어 보았고,

-그 망할 놈의 망나니 새끼에게 내가 이런 수모를 당했어. 임재준 그놈 잘 감시해.

그제야 머릿속에 전임 원장인 윤 원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임재준! 임재준이라면 윤 원장을 물 먹인 그놈 아닙니까? 잠깐 안 보인다 싶더니, 미국으로 건너가 그런 무지막지한 금융지주회사를 세웠다고?”

“금감원으로 불러들이시죠.”

이로써 원래 금감원으로 들어가야 할 8천억이 재준이 똥땅을 튀기는 바람에 사라졌다.

사실 유호근이란 인물은 재우 구조조정 당시 채권단으로부터 4억을 받았으며, 해외 은행과의 깊은 유착 관계 덕에 외환위기 이후 싱가포르의 투자은행 회장으로 추대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도 물 건너갔다.

유호근은 뭔 짓을 했길래 저런 호의를 받았을까?

어쨌든 머지않은 미래에 챙겨야 할 이득이 싹 날아갔다.

모르는 게 약이지, 저걸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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