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판을 정말 잘 짜는 것 같아(3)
서형길에게 인사를 한 사내는 대뜸 자신 앞에 있는 안동 소주를 자작하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크, 좋다.
“거, 자식. 누가 주당 아니랄까 봐. 봉규야. 천천히 먹어. 오늘 내가 얼마든지 사줄 테니까.”
“정말이요? 이 비싼 안동 소주를?”
“원하면 좋은 곳에서 양주도 사줄 수 있어.”
“오호, 이거 또 작전 하나 하려는가 보네.”
“이 자식이. 현재증권 작전 안 하는 거 알면서 그래.”
“그럼, 무슨 일입니까?”
서형길이 끙 소리를 내며 주변을 슬쩍 흩어보곤 속삭였다.
“너, 재경부 출입 기자잖아. 혹시 재경부에서 뭐 들은 거 없어?”
이봉규 재경부 출입 기자는 서형길과 장단을 맞추려는 듯 속닥이며 말했다.
“모던 그룹 조사 시작할 거 같아요.”
“그래?”
“네, 지난번 모던전자 주가 조작으로 제대로 찍혔거든요. 그리고 흑자 기업이 모던투신에 예치하면 그 돈으로 적자 기업을 지원하는 게 꼴 보기 싫은 눈치예요.”
서형길은 이해한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모던투신을 이용해서 그룹 내 지원을 하는 거네. 죽일 놈은 죽어야 한다는 게 지금 정부의 의지인데, 죽을 놈 살리려다 살 만한 놈이 죽는다면 화가 나겠지.”
“맞아요. 지금 재경부 좀 살벌해요.”
“그럼, 재우 그룹은 어때?”
“재우 그룹?”
“응.”
“아직 별 이야기 없는데요. 은근히 뒤에서 등 밀어주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암튼 요즘 재경부 직원들 입단속 장난이 아니에요. 아주 조용해요.”
“그렇구나.”
이봉규 기자가 서형길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르며 말했다.
“근데, 이걸 물으려고 저를 보자고 한 거예요?”
“아니지. 지금 정부가 뭘 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다만 네가 재경부에 들락날락하니까 궁금해서 물은 거지. 그리고 이거.”
서형길은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번에 우리 현재증권 이미지 좀 좋게 만들려고 하는데 기사 하나 잘 써 줘.”
“현재증권 이미지야 지금 최고인데. 뭐 또 높일 게 있어요?”
“적립식 펀드 만들 건데, 이게 광고가 좀 돼야 하지 않겠어?”
“적립식 펀드? 야, 확실히 외국 은행이랑 손잡은 곳은 다르네. 인덱스 펀드에 적립식 펀드까지. 어디 보자.”
이봉규 기자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고는 멍하니 내려다봤다.
[Jaewoo Group's Accounting Fraudulent]
“Accounting Fraudulent? 분식회계?”
뭐?
서형길은 이봉규의 손에서 잽싸게 서류를 빼앗았다.
“이게 왜 그쪽으로 간 거야? 참 내. 이거야, 이거.”
서형길은 또 다른 봉투를 내밀었다.
“선배. 그거 영어로 작성됐던데. 혹시 미국에서 건너온 겁니까?”
서형길을 강력하게 부인하듯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아니야, 아냐. 그냥 못 본 거로 해. 알려고도 하지 마. 아예 뇌에서 지워. 이거 밖으로 나가면 나 그날로 죽을 수도 있어. 알았지?”
“알았어요.”
하지만 오히려 그 말에 이봉규 기자는 저 서류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특종이란 확신이 섰다.
“자, 마셔. 마셔.”
“오늘 죽을 때까지 마셔 봐요.”
이봉규는 자신의 모든 주량을 오늘 쏟아부을 결심으로 서형길과 술잔을 나누었다.
서형길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켜며 재준과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렸다.
-알죠? 실장님은 실수한 척 보여주고 술에 취해서 자료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아유, 걱정 마십시오. 제가 또 한 연기 하잖습니까.
-그럼요. 실장님 아니면 누가 해내겠습니까. 하하하하.
-저만 믿으십시오. 하하하하.
***
오버럴모터스 임원실.
박민수가 들어서자 대표이사 스미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어서 오십시오. 투마로우에서 온다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투마로우금융지주회사 이사 박민수입니다.”
둘은 악수를 한 후 소파에 앉았다.
먼저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오버럴모터스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제안을 할까 해서 왔습니다.”
“저희가 관심이 있는 건 자동차 회사인데. 설마 자동차 회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
오버럴모터스.
포즈와 트라이슬러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빅3 중 하나다.
다른 회사와 다른 점은, 오버럴모터스는 직접 자동차를 출시하기도 하지만 소유하고 있는 브랜드에서 더 많은 자동차를 출시한다는 것이다.
즉, 자동차 브랜드를 수집하는 기업으로 유명했다.
“예전부터 한국 재우자동차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합작도 추진 중이시라고.”
“저희가 백악관에 전달한 의사도 있고 해서요.”
“합작이면 지분 인수입니까?”
“네, 지분의 50%를 인수할 겁니다.”
“중국 시장 진출 때문이시죠?”
스미스는 박민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아, 그 부분은 오버럴모터스의 아픈 상처인가요?”
후.
“뭐, 이제는 신문에서 떠들 대로 떠들어서 다들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주요 시사 주간지에 오버럴모터스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북미에 공장을 갖고 있는 자동차 회사 중 생산성 꼴찌는 OM]
[경영학 교재에서 반면교사의 사례로만 언급되는 OM의 현실]
같은 글들이 말이다.
“50% 지분은 70억 달러 맞습니까?”
“저희는 50억 달러에 맞추려고 협상 중입니다.”
“그럼 70억 달러에 인수하는 건 어떻습니까?”
“인수요?”
“네.”
오버럴모터스가 재우자동차에 관심을 보인 지는 오래되었다.
특히 재우자동차가 M&A로 사들인 독일의 뮌헨연구소, 영국의 위디연구소, 폴란드의 ESO연구소의 파워트레인과 트랜스미션 기술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재우자동차의 소형차였다.
OM은 소형차가 없어 최대 신흥시장인 중국에서 명함도 못 내밀고 구경만 했다.
하지만 재우자동차는 마즈, 라스, 누라, 레자라는 중국에 안성맞춤인 차종을 보유했다.
판매망도 착실히 갖추는 중이었고.
박민수가 확신에 찬 미소를 짓자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쉽겠군요.”
“하지만 70억 달러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군요.”
“중국 한 해 이익이 적게 잡아도 200억 달러일 텐데 엄살이 심하십니다. 나중에 다 알게 되시겠지만, 지금 저희 이사 한 명은 포즈에서 대화 중이고 투마로우뱅크 대표는 트라이슬러에서 대화 중입니다.”
스미스는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재우자동차가 팔리기는 하겠군요.”
“100%입니다.”
“생각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박민수는 진행 과정을 요약한 서류 한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먼저 재우자동차가 폴란드에서 달러로 표시된 유로본드를 발행할 겁니다.”
“유로본드라면 먼저 보트딜을 하실 겁니까?”
보트딜(bought deal)이란 발행 채권을 투자은행이 먼저 전액 인수하는 것이다.
즉, 채권을 발행하면 투마로우뱅크 자회사가 먼저 인수한다.
“맞습니다. 추후에 재우자동차를 저희와 거래하면 됩니다.”
“마치, 재우자동차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무너지지 않으면 한국이 무너지니까요. 도미노가 일어나기 전에 원인을 제거하는 겁니다.”
“좋습니다. 저희가 인수하는 것으로 하시죠.”
“그럼,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말씀하세요.”
“재우자동차에서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전에 저희가 먼저 흔들어 드리겠습니다.”
박민수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
며칠 후.
힐튼호텔 23층 손 회장의 사무실.
재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재준을 손 회장에게 안내했다.
재준을 보자 손 회장이 반가운 척 손을 흔들었다.
어유, 손 회장님 정정하네.
반갑네. 반가워.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래, 미국에 가서 일은 잘 보았고?”
“그럼요. 일이라기보다는 놀러 간 거죠. 제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이미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하고 있던데요.”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 모르는구나.
“차 한잔할 텐가?”
“술이나 한잔하시죠.”
재준은 가져온 가방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병만 보면 어디 쓰레기 처리장에서 주워온 것 같았다.
손 회장은 냄새도 나지 않는데 손으로 코를 막았다.
“이거 마실 수 있는 건가?”
재준은 손 회장을 향해 와인 상표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럼요. 이거 한 병에 3억 원이 넘습니다. 회장님과 대화를 하려면 소주보다는 좀 비싼 게 어울릴 것 같아서요.”
손 회장은 눈매를 떨었다.
3억?
저 허름하다 못해 썩은 물을 담긴 것 같은 것이?
재준이 손가락으로 찢어진 상표 아래 와인의 연도를 가리켰다.
“1907년 생산된 에드시크란 와인입니다. 근데 이 와인을 실은 배가 침몰하여 90년 동안 바다 밑에서 숙성이 된 거죠. 원래 썩는 게 보통입니다만, 우연의 일치로 수압과 기온이 숙성에 적당했다고 합니다. 한잔하시죠.”
“3억이 넘는다고……. 허허.”
“가끔 평범한 것들도 세월이 지나면 귀한 것으로 변하거든요. 사람도 그렇게 숙성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인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욕심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내용물을 상하게 만들지요. 적당한 수압과 기온이 필요합니다.”
비서가 눈치 빠르게 와인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재준은 고맙다는 눈짓을 하고 와인 잔에 와인을 따랐다.
창.
와인 잔이 부딪치고 소리가 사무실 안에 잔잔히 퍼졌다.
재준이 와인 한 잔을 마시고 잔에 시선을 둔 채로 물었다.
“이번에 모던자동차를 인수하시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인수해야지. 아직 이 정도로는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들과 싸울 수 없어. 더 커야 가능해.”
“자동차라는 게 규모가 크다고 세계적인 기업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오랜 기술 축적이 관건 아닙니까?”
“그 기술을 돈으로 사면 되지.”
재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돈 때문에 현재증권에 손을 뻗치시는 겁니까? 제 앞에서 국가를 위한다거나 국민을 위한다는 소리는 하지 마시죠. 저는 손 회장님을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손 회장이 머쓱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우리가 도모한 일이 꽤 되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자네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네.”
“한 10조 정도면 되겠습니까? 뭐, 그 정도는 저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수로 자신하는 건가?”
“미국에 정보통 있으시죠? 지금 연락하셔서 투마로우금융지주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어보십시오.”
손 회장이 비서에게 연락하자 와인 한 잔 마실 시간 만에 연락이 왔다.
비서가 손 회장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하고 갔다.
손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니까.”
“그러니까 제 충고를 들으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현재증권에서 손 떼세요. 돈은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담보가…….”
“담보는 필요 없습니다.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할 거거든요.”
“채권?”
“재우자동차 할부 담당하는 재우캐피탈 있으시죠? 재우캐피탈 이름으로 달러 채권을 발행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거긴 재우자동차 지분이…….”
“51%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