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95화 (95/477)

제95화 판을 정말 잘 짜는 것 같아(2)

“아, 그리고 손 회장님 면담 한번 주선해 주시고요.”

“네, 약속이 잡히면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말을 다 한 재준은 벌떡 일어섰다.

임병달이 잔뜩 긴장한 어투로 말했다.

“어디 가는 거냐?”

“저도 몇 가지 준비 좀 하겠습니다.”

회장실을 나와 경제정책연구실로 가는데 눈에 커피 자판기가 들어왔다.

고민이 있을 때면 항상 자판기로 향했던 지난날이 기억났다.

재준은 자판기에서 달달한 커피를 뽑아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봤다.

손 회장도 참, 욕심이 너무 많아.

아, 내가 할 말은 아닌가. 하늘 보고 침 뱉기니까.

나보다 욕심 많은 놈도 없을 텐데.

재우 그룹이 저지른 분식회계.

이건 용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주가와 관계가 있기에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과 같다.

죗값은 달게 받아야 맞다.

하지만,

500억 달러 수출을 부르짖을 때 1조 달러나 되는 국내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포자기한 대기업.

가치가 10조도 넘는 재우자동차를 기술 자립이 안 된다며 겨우 1조 2천억 원에 해외로 팔아넘긴 금감원.

고작 석 달 동안 두 번에 걸쳐 법을 고쳐가며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국내에 못 들어오게 만들어 부채를 일부러 늘린 정부 관료들.

노벨상에 눈이 어두워져 백악관과 미국 자동차 업계의 요구만 듣고 자신의 친구와 같은 사람을 배신한 대통령.

해외 기업 자산을 개인의 해외 도피 자산으로 둔갑시켜 증거도 없고 법적 근거도 없는 ‘징벌적 추징금’이란 명목으로 100조를 부과한 법원.

회장의 10조가 넘는 사재를 확보하고 배당소득과 양도차익은 챙겼으면서 세금은 나 몰라라 손 회장에게 떠넘긴 채권단.

이 모든 조직에 동조한 언론.

재준은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참, 결과가 그래.

500억 달러 수출은 허상이고, 부실기업과 자산을 팔아 외환 보유액을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생각은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본래의 역사에서 1998년에는 400억 달러, 2000년에는 300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달성했다.

두 해에 걸쳐서 번 달러가 700억 달러이고 그 기간에 국내 자산을 헐값에 팔아 들어온 돈은 150억 달러.

기술 자립 못 한다는 재우자동차는 오버럴모터스가 인수하자마자 중국에서 판매를 시작했는데 한 해에 200억 달러를 벌었다.

그뿐인가, 마스 설계도를 가져다 그대로 베낀 게 바로 중국의 QQ다.

부채 비율 200%라는 엉터리 기준과 수출 금융 규제 같은 건 도대체 어느 머리에서 나왔는지 한번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한심하다.

뭐 나중에 말하기를 부채 비율 200%는 대충 그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단다.

외환위기에도 국내외를 따지지 않고 받은 천문학적인 뒷돈은 보너스고.

그래서.

난 앞으로 있을 정부의 재우 그룹 죽이기에 동참할 의사가 없다.

죽이더라도 내 방식으로 죽인다.

숟가락 얹는 건 기업이건 정부건 다 적으로 간주한다.

1조 2천억 원에 팔려나갈 재우자동차를 제값 다 쳐서 70억 달러에 판다.

이러면, 나만 돈 버는 건가?

그러게 손 회장님 왜 욕심을 부리셨어요.

현재증권을 노리면 안 되는 거였다니까.

시간을 들여서 예술적인 작전 좀 짜려고 했는데.

속전속결로 처리하게 생겼잖아요.

재준은 호로록 커피를 마시고 발걸음을 옮겼다.

***

경제정책연구실.

재준은 문을 열고 들어가 기운차게 인사를 했다.

“여러분,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어!

연구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재준을 바라보며 감격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을 했다.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한마디도 못 했다.

“자, 제가 미국에 가기 전에 말했던 재우 그룹을 털려고 돌아왔습니다.”

재준의 말에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재우 그룹을 터는 건 그렇다 치고.

존댓말?

재우 그룹을 터는 게 아니라 우릴 털려고 왔다.

그러게 반말하자고 한 거 누구였어?

동기들은 김혜림을 노려보며 자신들이 분석한 자료들을 회의 탁자에 하나둘 쌓았다.

“그럼,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이야기해 봅시다.”

박승하가 먼저 나섰다.

“먼저 꽁꽁 감추어져 있는 숫자상 오류에서 위장 계열사 세 곳을 찾았습니다. 이번에 적자 기업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인 셈입니다.”

위장 계열사란 그룹이 지배 지분을 쥐고 있으면서 그룹에 편입하지 않은 회사를 말한다.

이렇게 관리하는 경우는 재산 은닉이 목적이다.

“어딥니까?”

“먼저 경화특수강이란 위장 계열사입니다. 자체 보고서까지 조사해 봤습니다. 이 회사는 자동차 산업 호황을 예측하고 특수강 생산을 위해 설립한 회사입니다. 총공사비 9,810억 원을 쏟아부어 생산 능력을 180만 톤으로 맞추었는데 현재 국내 수요가 105만 톤에 불과합니다. 헛다리를 짚은 거죠. 공급 과잉이 되니 특수강 가격도 떨어지고, 공장 가동률도 50%밖에 안 나오고, 현재 은행 이자도 물지 못할 지경입니다.”

“위장 계열사 살리려고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렇습니다.”

“또 다른 위장 계열사는 어딥니까?”

“대일트럭서비스라는 회사입니다.”

“내용은 비슷하겠죠? 돈은 억수로 들어갔는데 수익은 안 나고 오히려 돈 먹는 하마로 변한 거.”

“맞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우선물이란 회사입니다.”

재준이 박승하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재우 그룹이 여기서부터 삐걱대기 시작했구나.

“다른 건 없습니까?”

김혜림이 나서며 이야기를 했다.

“해외 쪽 부채도 엄청납니다.”

“그렇겠지요. 워낙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 분이시니.”

“체제가 변한 구 공산권 국가로 진출하면서 금융 지원을 받았습니다. 해외 사업은 전부 이런 식입니다. 자체 자금을 조달하지 않고 그 나라의 금융 지원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투자 유입을 갈망하는 나라에, 과한 레버리징이라.”

“빚내서 돈 벌려는 속셈이죠.”

“저러다 적자면 나라별로 협상을 해야 할 텐데. 꽤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놨군요.”

“그리고 이걸 보십시오.”

이번엔 최진기가 자료를 내밀었다.

“실제 자동차 적자를 보면 4,800억이라고 적혀 있는데 실재하지 않는 고정자산을 감가상각 해 환급까지 받아냈습니다. 이 고정자산을 치워버리면 4조 원대의 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전 계열사의 생산 시설을 부풀린 거군요.”

“이렇게 20년 동안 장부를 조작했습니다.”

“오래도 하셨네.”

“여기 정리한 자료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숫자와 도표로 정리한 A4 200페이지짜리 묶음이 네 권.

“수고했습니다.”

박승하가 자료를 살펴보는 재준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미국에서 선물 안 사왔습니까?”

“선물이요?”

모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네. 작은 거라도 소중하게 쓸 수 있는 뭐 그런 거요.”

“작지만 알차게 쓰라고 집으로 배송시켰습니다.”

“벌써요?”

“자, 전 그럼 이 자료 좀 검토하러 가겠습니다. 수고들 하세요.”

재준이 일어나자 모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뭔가 허전하다.

이대로 물러날 임재준이 아닌데.

“아, 까먹을 뻔했네.”

재준이 돌아서자 모두의 얼굴에 경계심이 짙게 드리워졌다.

이럴 줄 알았어.

“이번에 미국에서 금융지주회사를 하나 만들었거든요. 이름은 투마로우금융지주회사입니다.”

“근데요?”

“자세한 건 로이터 담당에게 자료 좀 받아서 보시고. 중요한 건 IB, 투자은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거니까, 미국과 유럽 IB가 만든 상품들 조사해 두세요. 혹시 모르니 새로운 상품도 하나씩 만들어 보고요.”

“네?”

뭘 하라고?

우리보고 상품을 만들라고?

그건 금융공학과 나온 애들이 만드는 거 아닌가?

재준이 나가자 동기들은 컴퓨터 앞에 다다닥 들러붙었다.

잠시 후 느려터진 인터넷 앞에 셀 수도 없는 투자은행의 금융 상품이 나열되었다.

“이게 다 뭐야?”

“이게 다 금융 상품이라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업무에 동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뇌가 쩍 하고 갈라지는 걸 느꼈다.

“근데 아까 투마로우금융지주회사를 새로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블럼버그에 접속해 봐.”

잠시 후 화면에 아주 익숙한 이름의 회사 내역이 떴다.

“지금 이 회사를 만들었다고 한 거야?”

“이 어마어마한 공룡을?”

“이거 매출이 공이 몇 개야?”

“심지어 달러인데.”

재준은 경제정책연구실을 나와 서형길 실장을 만나러 갔다.

***

다음 날 아침.

띠링,

핸드폰 문자 알람.

오랜만에 늘어지게 자고 있던 박승하는 더듬더듬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재준의 메시지.

[집 앞에 선물 있습니다]

뭐?

그다음 메시지.

[차비 좀 아끼세요]

박승하는 침대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거울을 보고 대충 머리를 정리한 뒤 밖으로 나갔다.

대체 몇 시야···.

시계를 보면, 11시다.

오후 출장이라 긴장이 풀렸나 보다.

정신없이 잤네.

무슨 선물?

박승하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터벅터벅.

긴 계단을 내려간 후, 대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눈에 확 띄는 하얀색 자동차.

이게 뭐야?

새 차?

이 동네에 저렇게 고급승용차를 타는 사람이 있나?

박승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처럼 자동차를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그랜저 XG.

그때, 자동차 앞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내려서 박승하에게 다가왔다.

“박승하 씨?”

“네. 그런데 누구시죠?”

“여기 차 키 받으시고요. 안전한 출장 바라신다며 보내셨습니다. 참, 기업 방문하실 때 꿀리면 안 된다고, 그 말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자동차 키.

선물?

머릿속이 아득해진 박승하는 키를 받은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박승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방방 뛰는 이무열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시끄럽게 넘어왔다.

-봤어? 혜림 씨랑 진기 씨하고도 통화했어. 다들 난리 났다. 신형 그랜저라니, 진짜 미친 것 같아. 이 녀석 볼수록 자태가 장난 아니라니까. 졸지에 친구들 중 제일 비싼 차 타는 사람이 내가 됐지 뭐야? 하하하.

나는 졸지에 이 동네에서 제일 좋은 차를 타는 사람이 됐어.

주변을 압도하는 새하얀 품격.

게다가 가운데 세워진 로고는 차량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저 차가 내 거란 말이지.

박승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큰 남자의 여유.

자신은 인정받았고,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으며, 자신의 능력의 끝이 어디일지, 어떤 사람들과 어떤 위치에 있을 것인지, 저 차가 묵직하게 말해 주는 듯했다.

박승하는 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환희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고 있던 그때, 순간 기쁨을 비집고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거 타고 전국 사업체를 들쑤시고 다녀라, 뭐 그런 뜻은 아니겠지?

***

인사동.

서형길 실장은 조용한 술집에서 안동 소주를 들이켰다.

카.

화끈거리는 열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태웠다.

“좋다. 이게 얼마만의 낮술이야.”

도련님. 미국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저에게 이런 미션을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띠링.

문에 달린 종이 울리고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두리번거리다 서형길과 눈이 마주쳤다.

“어, 여기. 여기야.”

“아, 선배님.”

사내는 서형길이 있는 자리로 와서 앉더니,

“뭐야, 이 좋은 걸 혼자 마시는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