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94화 (94/477)

제94화 판을 정말 잘 짜는 것 같아(1)

현재증권 회장실.

임병달은 ‘이놈을 왜 불러들였냐’ 하고 정 행장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정 행장은 색이 바랜 사진 같은 표정으로 정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재준이 오랜만에 맛보는 할아버지의 차를 마시며 연신 탄성을 질렀다.

“이야, 정말 맛있네. 이거 한국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오랜만에 먹으니까 향이 기가 막히네. 할아버지 이거 좀 챙겨 가겠습니다.”

“다 가져가거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잘 먹겠습니다.”

룰루랄라 기분이 좋은 재준은 차를 홀짝이며 마셨다.

임병달은 오랜만에 손자를 봐서 좋아해야 할지 그동안 유유자적하며 조용한 삶이 끝났다는 걸 한탄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손자를 봐서 좋긴…… 좋긴 개뿔이 좋아.

저놈이 이제부터 무슨 짓을 저지를지 뻔히 보이는데.

정 행장이 분명 재우 그룹 이야기로 들어왔다 했으니,

이제 재우 그룹을 무너뜨릴 테고 그 여파로 이 나라에 평지풍파가 일어날 게 너무나 당연한데.

임병달의 시선이 다시 시꺼멓게 죽은 얼굴을 한 정 행장에게 향했다.

“정 행장, 재우 그룹 손 회장 이야기는 재준이한테 왜 한 거야?”

“스톡체인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그냥 정부에 줄만 대면 될 일을 호들갑스럽게.”

“상대가 손 회장입니다.”

재준도 정 행장이 옳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그렇게 처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재우 그룹과 피 터지게 싸우겠다는 것이냐?”

“이럴 때는 미국에서처럼 아주 철저하게 밟아야 합니다.”

임병달의 눈에 힘을 한껏 주고 재준을 노려봤다.

“재준아, 너 미국에서 뭔 일을 벌인 거냐?”

재준이 차를 마시던 동작을 멈추고 임병달을 바라봤다.

“강 이사가 보고 안 했습니까?”

“네가 미국 간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

재준은 강호석과 박민수를 떠올렸다.

언제나 피곤에 절어 있는 두 사람.

하긴 스톡체인에 뱅크오브에이스 일만 해도 24시간이 모자랐겠네.

“정 행장님도 제가 미국에서 뭘 한지 모르십니까?”

“도련님, 스톡체인 관리하신 거 아닙니까?”

음, 모르는구나.

하긴 아직은 인터넷으로 서치가 원활한 시대는 아니니까.

“미국 금융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시죠?”

“요즘 금융개혁법안이 통과되어서 금융지주회사 체계로 돌아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로이터 담당한테 투마로우금융지주회사에 대한 자료 팩스로 보내라고 하세요.”

투마로우금융지주회사?

분명히 투마로우라는 단어를 들었다.

임병달과 정 행장이 서로 놀라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후 일제히 재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어 정 행장이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난데. 지금 로이터 담당에게 미국에 있는 투마로우금융지주회사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세요.”

-

“맞아요. 이곳 팩스로 보내세요.”

임병달은 정 행장이 핸드폰을 끊자 재준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 미국 가서 금융지주회사 만들었냐?”

“제가 뱅크오브에이스 인수한다고 했잖습니까?”

멍.

‘난 네가 미친 줄 알았지’라는 말을 차마 뱉지 못한 임병달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서 진짜 그 은행을 인수했다고?”

“네.”

“미국 상업은행 1위를 인수했다고? 혹시 이름은 같은데 사실은 다른 은행이 아니고? 미국엔 그런 경우 많잖아.”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그 은행입니다.”

“정 행장, 뱅크오브에이스가 어느 정도 크지?”

“지금 한국에 있는 은행을 다 합쳐도 모자랄 겁니다.”

“들었냐? 재준아, 나는 네가…….”

이때, 삐 하는 소리와 함께 팩스로 자료가 전송되었다.

정 행장이 팩스로 뛰어가 다 전송된 팩스 용지를 쭉 찢어서 본 후, 입을 떡 벌리고 임병달에게 건넸다.

임병달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자료를 받아 읽었다.

“여기 투마오루뱅크와 스톡체인만 계열사라고 돼 있는데?”

재준이 종이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아래, 거기, 거기. 투마로우뱅크 아래에 합병 은행 보이시죠?”

“이거 ‘뱅크오브에이스와 투마로우뱅크 합병 후 은행명을 투마로우뱅크로 함’이라고 쓰여있는 거?”

“네, 조만간 한국에 있는 회사들도 이 지주회사 아래로 정리할 겁니다. 그럼 크기가 어느 정도 되겠네요. 올해 실적이 발표되면 아마 내년에는 할아버지도 큰소리 좀 치실 수 있을 겁니다.”

큰소리를 어디다 쳐야 하는 건데?

대기업? 아니면 정부?

임병달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재준은 자신을 향해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짓고 있지만, 자그마치 뱅크오브에이스였다.

작은 증권회사를 인수해서 지금까지 키운 것만도 온몸에 영혼까지 바스라질 지경으로 뛰어다녔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 규모인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이럴 땐 방법은 하나.

“난 이제 물러나야겠다. 그냥 뒷방 늙은이로 만족하고 싶어. 아니 뒷방이 아니라 아예 해외로 나가 있을란다. 너랑 정 행장이 알아서 지지고 볶고 다 해. 난 정말 괜찮다.”

“할아버지, 그건 안 됩니다. 아직은 할아버지가 하실 일이 많습니다. 일단 제가 인맥이 아직은 없습니다.”

후두둑.

임병달의 머리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훈아. 네 아들 좀 말려다오.

꿈에라도 나타나는 건 가능하지 않니?

재준은 임병달의 좌절을 무시하고 정 행장을 돌아보았다.

“참, 행장님. 재우 그룹 이야기는 뭡니까?”

정 행장은 그제야 자신이 왜 재준을 불러들였는지 기억을 해냈다.

“그게 재우 그룹의 500만 불 수출 달성이라는 계획을 정부가 지원하고 나선 겁니다.”

얼레, 거절하라고 판을 짜주었더니 그걸 정부가 넙죽 받은 거야?

이러면 둘 다 성공하는데.

실제로 한국은 1998년과 1999년 합쳐서 700억 달러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그래서요?”

“SY자동차와 SS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정부가 각종 혜택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어떤 혜택입니까?”

전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외환위기가 왜 왔는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관치를 하고 있잖아?

“네, 부채를 절반 탕감해 주었고 은행에서 추가 지원도 이었습니다. 재우 그룹도 부실한 계열사를 팔아서 구조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금 여력이 생기자 정부에 모던자동차 합병 의향서를 냈습니다. 하지만 여론이 안 좋게 작용하여 잠시 주춤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정보에 의하면 자금을 마련하려고 여기저기 손을 대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재증권과 합병해서 우리 돈을 쓰겠다는 거네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던자동차 인수하는 데 얼마나 들어갑니까?”

“1조 2천억 원입니다.”

뭐야, 10억 달러 밖에 안되는 거잖아.

스톡체인 분기 이익보다도 적네.

그냥 주고 채권을 받아서 앞으로 까불지 못하게 할까?

재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돈 우리가 대출해 주면 어때요?”

“저도 손 회장과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그런데 시치미를 뚝 떼시던데요. 자기는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합병을 건의 드린 거라고.”

미친!

“어쨌든 도련님을 한번 만났으면 하더군요.”

“손 회장님 대단하시네. 그렇게 현재증권을 건드려 놓고 절 볼 생각을 하시다니.”

“재준아, 손 회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절대 적을 안 만들 것처럼 행동하지. 그러다 당한 기업이 한둘이 아니야.”

“손 회장님 자신감이 과하시네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련님. 만나보실 겁니까? 전 당분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지. 이럴 때는 좀 더 적극적으로 만나줘야지.

아주 적극적으로.

“피하는 건 좋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만날 겁니다.”

“합병에 관한 이야기하면 어쩌시려고요?”

“합병이 목적이 아니니까. 돈 이야기를 해야죠.”

“대출을 해 주시려고요?”

“아니요. 돈을 만들어 드려야죠.”

“신주 발행은 채권 둘 다 저희 기준에 한참 떨어집니다.”

“그래서 채권을 폴란드에서 발행할 겁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인가?

임병달과 정 행장은 또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재준을 봤다.

머릿속에서 뭔가 잔뜩 굴리는 듯한 표정을 한 재준이 입을 뗐다.

“유로본드로.”

“유로본드?”

“유로본드요?”

채권이 영어로 본드(bond)다.

뭐, 유대관계 이런 걸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또한 본드라고 하면 접착제 본드 아닌가 생각할 텐데, 맞다.

그 본드도 이 본드와 같은 스펠링으로 쓴다.

혹시 007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도?

이것도 맞다. James Bond다.

암튼, 다시 돌아와서.

‘유로본드(Eurobond)’라고 해서 유로화로 발행하는 채권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유로화로 발행하는 채권은 ‘유로화 표시 채권(Euro-denominated Bond)’이라고 이름이 따로 있다.

유로본드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건 지면 낭비니까 생략하고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른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의 통화로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다.

지금 재준이 하려는 일은 재우 그룹 채권을 폴란드에서 달러로 표시된 채권으로 발행하는 것.

폴란드에서 폴란드화가 아닌 달러라는 게 중요한 거다.

굳이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냐고?

그건 방금 정 행장이 이야기했듯이 한국에서는 채권법에 의해 더는 채권을 발행할 수 없으니까.

다른 나라에서 채권을 발행하면 한국법을 피할 수 있다.

또, 폴란드에서 달러로 발행해 버리면 폴란드 자국법에도 저촉되지 않는다.

그리고 왜 굳이 폴란드냐고?

폴란드가 재우자동차에게 아주 우호적인 나라니까.

또 재우 그룹이 폴란드에서 미국 자동차기업 오버롤모터스와 대차게 싸워서 M&A를 벌여 승리한 나라니까.

이 정도면 눈치를 챘겠지만, 재준은 재우 그룹를 해체하기 위해 오버롤모터스를 이용하려 마음먹었다.

정 행장은 유로본드라는 말만 들었지 실제 발행해 본 적이 없어서 임병달을 슬쩍 쳐다보았다.

말리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임병달은 같은 생각으로 정 행장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저놈을 내가 어떻게 말려?

결국 정 행장이 재준을 말렸다.

“도련님, 재우 그룹이 유로본드를 발행하면 누가 삽니까? 아무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찾으면 다 있습니다.”

“주관은행은…….”

“투마로우뱅크가 맡으면 됩니다.”

정 행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만약 재우 그룹이 만기에 돈을 갚지 못한다면, 아니 중간에 이자라도 연체했을 때는 은행 명성에 먹칠할 수 있다.

정 행장의 낯빛이 점점 창백하게 변했다.

그에 반해 재준은 여전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행장님, 한 가지 일만 해 주십시오.”

“말씀해 보세요.”

“현재증권 헬기는 티가 나니까, 헬기 하나 새로 사세요. 그리고 재우자동차 주변을 일주일에 한 번씩 도는 겁니다.”

“네? 그냥 돌기만 하는 겁니까?”

“네, 그냥 한 바퀴 뺑 돌다 오는 겁니다.”

정 행장은 할 말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닫았다.

여기서 경험이네 뭐네 이야기하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과 같다.

재준이 자그마치 미국 1위 상업은행을 인수했는데 더 무슨 말로 반기를 들 수 있을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서 구경하는 거지.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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