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정상에 단 한 명만 올라갈 수 있네(7)
그랜드월 회의실.
미국 대통령이 금융개혁법안에 사인하는 그날.
그랜드월은 뉴욕 증시에 상장했다.
모두가 상장을 축하하며 샴페인을 터트리며 서로 얼싸안고 있었는데 한쪽에서 이상한 비명이 들렸다.
“누군가 우리 주식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랜드월 새로운 대표 리처드는 본능적으로 시황판을 쳐다봤다.
80달러를 선에서 치열한 매매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장 후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찬사는 각양각색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의견이 있었다.
[그랜드월 주가는 100달러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뒤에 뱅크오브에이스와 스톡체인이 있지 않습니까]
여태 단 한 군데도 비관적인 의견을 내는 곳은 없었다.
주식은 정말 100달러를 돌파하려는 듯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 강력한 매수세를 단번에 중단시키고 주가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그림이었다.
“지금 당장 회사 예수금을 쏟아부어 자사주를 매입하세요.”
여러 명이 리처드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파트너 여러 명이 리처드 곁으로 다가왔다.
“장 초반 매수했던 사람들이 두 배가 되니까 차익 실현을 위해 매도하는 걸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너무 동시에 벌어지다 보니. 예민했나 봐.”
“그렇지, 상장 준비하느라 며칠은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모두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시선은 시황판에 고정되었다.
그랜드월의 주가는 80달러에서 매수와 매도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리처드는 순간 재준의 징글맞은 미소가 떠올랐다.
-난 내 몫을 최대한 불릴 생각입니다.
왜 갑자기 미스터 임이 떠오른 거지?
불길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저 정도 물량은 미스터 임밖에 없는데.
리처드가 고민하는 그때,
“리처드! 뱅크오브에이스 앤드류가 기자회견을 하는데?”
모두의 시선이 시황판에서 대형 TV로 옮겨졌다.
화면에 잘 차려입은 앤드류가 모습을 드러냈다.
톡톡.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그 말처럼 앤드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뱅크오브에이스와 투마로우뱅크, 스톡체인은 투마로우금융지주 아래 모일 것입니다. 앞으로 같이 할 보험 회사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질문은 한 분만 받겠습니다.”
앤드류의 기자회견이 끝나자 기자들이 거칠게 손을 들었다.
뭔가 이상하게 허전한 내용이란 생각이 강하게 기자들의 머리를 강타했다.
앤드류가 기자 한 명을 지목했다.
-뉴욕타임스의 헬레나입니다. 오늘은 그랜드월 상장 첫날입니다. 그랜드월과 투마로우금융지주와는 어떤 협력을 해 나갈 계획입니까?
앤드류는 잠시 말없이 질문한 기자를 쳐다봤다.
‘왜 그런 황당한 질문을 합니까?’란 표정이었다.
“투마로우금융지주는 그랜드월과 앞으로 어떤 일도 같이 진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답을 끝낸 앤드류는 기자회견실을 바로 나가버렸다.
일순 정적이 휩싸였다.
그랜드월과 투마로우금융지주가 틀어졌다?
뛰어!
기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기사를 본사에 알리느라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는 그랜드월의 모든 파트너들은 망연자실해졌다.
리처드 옆으로 파트너 하나가 다가왔다.
”지금 방금 앤드류가 뭐라고 지껄인 겁니까?“
리처드는 방금 말을 한 파트너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왓 더 퍽!
당했다.
리처드의 눈앞으로 재준의 비웃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포트폴리오는 개뿔, 난 그저 돈만 벌면 돼.
***
뉴욕 연방준비은행 행장실.
행장 윌리엄은 인프라금융 팀장 제임스의 보고를 받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자리에 앉으면서 하루라도 편했던 날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갔으면 했다.
바로 그랜드월의 상장일 아닌가.
월가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는데.
하필 이런 날에 재앙에 가까운 보고를 듣고 있었다.
“지금 물량이 투마로우뱅크와 스톡체인, 뱅크오브에이스, L.S.Company에서 나왔다고요?”
“네. 확실합니다. 이미 기관 매도에 잡혀있습니다. 매도가 다 이루어진 후 뱅크오브에이스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회도 아니고 대놓고 자기 지분을 팔아먹고 있다?”
“네.”
“대략 얼맙니까?”
“47억 달러 좀 넘을 겁니다.”
“47억 달러?”
미치겠네.
윌리엄은 의자 등받이에 자신의 목을 기댔다.
목덜미가 뻐근하게 당겨왔다.
미스터 임,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결과적으로 뱅크오브에이스를 인수하고 그랜드월을 상장시키고 47억 달러를 챙겼다?
참 대단한 놈이네.
“지금 그랜드월 주가는 어떻게 됐습니까?”
“10달러 밑으로 떨어져서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그거 이리 줘 보세요.”
윌리엄은 제임스가 내민 서류를 허탈하게 받았다.
“이봐요, 제임스. 당신은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제임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랜드월이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미스터 임이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전 칭찬을 하고 싶습니다.”
“칭찬을 해주고 싶다…….”
말을 하고 난 윌리엄은 빙그레 웃었다.
윌리엄의 표정을 확인한 제임스가 입을 뗐다.
“그랜드월 같은 폐쇄적은 유대인 자본은 미국의 힘을 이용해 돈을 벌면서도 국가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건을 이용하면 미국 내 유대계 은행들을 전부 상장시켜 증시를 끌어 올리고 국력도 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윌리엄은 불뚝대는 어투로 말을 했다.
“그들이 말을 들을까?”
“듣도록 해야죠.”
“어떻게?”
“투마로우뱅크의 마이클이나 뱅크오브에이스의 앤드류를 연방준비은행 이사로 천거하십시오.”
“우리 연방준비은행 이사를 시키란 말입니까?”
“네. 그리고 언론에 몇 가지 자료만 흘려주면 됩니다.”
“어떤 자료를?”
“마이클이나 앤드류 뒤에 임재준이 있다는 걸 알리는 겁니다. 그리고 임재준은 유대계 자본을 싫어한다. 인수해서 상장시키는 걸 즐긴다. 이렇게요.”
“오호…….”
윌리엄은 제임스를 향해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한국인과 유대인을 싸움 붙여 유대인의 힘을 빼놓는다?
아주 좋은데.
윌리엄은 뉴욕 연방준비은행 행장으로 임명되면서 연준을 정부에 귀속시키기 위해 암암리에 노력해온 사람이다.
미국의 독립전쟁부터 현재까지 정부와 연방준비제도가 힘겨루기 해온 건 맞다.
음모론이냐고?
뭐, 빌 클린턴 정부 때 화폐를 금본위제로 되돌린다는 NESARA를 비밀리에 통과시켰고, 공표하려고 했지만, 조지 W. 부시가 이 NESARA의 공표를 막으려고 오사마 빈 라덴을 사주하여 9.11 테러를 일부러 저질렀다는 황당한 이야기?
그건 소설이고.
아니 대체 그런 이야기는 누가 지어내는 거야?
아닌가? 무조건 무시하면 안 되려나?
사실일지 누가 알아?
갑자기 스파이나 정치 소설로 바뀌는 것 같아 걱정하는 사람 있나?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작가는 그쪽으로는 쓸 생각조차 안 하고 있으니까.
근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한참 세월이 지나고 나올 사건의 떡밥이니까.
지금 이야기 안 해 놓으면 개연성이 거지 같네 하면서 말들 나올까 봐. 미리미리.
암튼,
윌리엄과 제임스는 재준을 이용해서 유대계 자본을 억누르려는 계획을 현실화시키려 했다.
***
L.S.Company 대표실.
오호호호호호호.
와하하하하하하.
우히히히히히히.
재준은 소파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보았다면 실성한 미친놈으로 착각하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똑똑.
“들어오세요.”
박민수가 문을 열고 눈살을 찌푸리며 들어섰다.
“밖에 다 들립니다.”
“뭐 어때요? 좋은 일이 있으면 웃는 거지.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웃음도 어느 정도 수위가 있어야 침을 안 뱉지요. 지금 밖에 직원이 30명이나 있는데 다들 일에 집중을 못 하고 있습니다.”
“어? 오늘 같은 날 일을 한다고요?”
“오늘 목요일이에요. 당연히 일해야죠.”
“당장 월급 100% 특별 보너스 지급하고 월요일에 보자고 해요. 47억 달러를 벌었는데 놀아야지요. 당장 하던 일 멈추고 퇴근하라고 하세요.”
박민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재준을 흘겨보았다.
“진짜 보너스 주고 퇴근시킵니다.”
“당장. 내보내요. 난 여기서 좀 더 뒹굴거릴 거니까.”
허.
박민수는 점점 변해가는 재준을 감당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잘 풀리면 꼭 일이 생기는 재준.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연방준비은행 행장 윌리엄의 전화번호였다.
재준의 얼굴에 산뜻한 미소가 어렸다.
왜 전화를 다 거셨을까?
혹시 그랜드월 인수를 꺼내는 건 아니겠지.
그건 당연히 거절이다.
“네. 임재준입니다. 웬일입니까, 윌리엄 총재님.”
별안간 등장한 이름에 깜짝 놀란 건 박민수였다.
“네? 설마 연방준비은행 이사요?”
박민수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좋지 않아. 좋지 않아.
“네, 알겠습니다. 마이클이나 앤드류에게 의견을 타진해 보겠습니다.”
-
“하하하. 그럼요. 부담이라니요. 역량이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배려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툭.
통화를 끝낸 재준은 박민수를 쳐다봤다.
“연방준비은행 이사를 투마로우금융지주에서 한 명 선출하고 싶다는데요.”
“왜요?”
“글쎄요.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자리 하나 준다는데 덥석 물어야지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목소리가 나쁘게 들리진 않던데.”
“연방준비은행 이사면 파워가 꽤 됩니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요.”
“냄새가 나면 왜 그런지 알아봐야겠지요? 이거 일이 없겠구나 싶으니까 만들어 주시네. 그럼, 어디 한 번 연준을 등에 업어 볼까요. 큭큭큭.”
연준 이사회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인준을 거친 상원 7명이 존재한다.
전체 금융계 인원 중 단 7명.
“대표님. 전 그렇게 좋게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괜찮다니까. 일단 경험이다 생각하고 겪어보면 됩니다. 큭큭큭.”
“아니, 아까부터 왜 자꾸 웃으십니까?”
“당연하지요. 47억 달러를 벌었다니까요. 큭큭큭.”
박민수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임 대표 제의로 미국에 오긴 했지만 정말 스케일이 너무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
박민수는 좌절하고 재준은 즐거워 미치고 있는데,
따르르르릉.
한 통의 전화가 또 울렸다.
정 행장님?
“네, 임재준입니다.”
-도련님. 모던증권과 재우증권이 오늘 전격적으로 합병했습니다.
“아, 그래요?”
재준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모던증권 민 사장이 형을 선고받았으니 사장직을 내려놓았을 거고, 민 사장 없는 모던증권은 뭐 패티 없는 햄버거지.
재우 그룹 돈줄 역할을 하던 재우증권도 분식회계를 감추려면 덩치를 키울 필요가 있었을 테고.
-재우자동차가 모던자동차를 인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 그래요?”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뭐 저러다 재우자동차는 모던자동차를 인수하지 못하고 부채에 허덕여…… 어?
잠깐만.
지금 SS자동차가 아니라 모던자동차라고?
“왜 SS자동차가 아니라 모던자동차입니까?”
-SS자동차는 이미 재우자동차가 인수했습니다.
어라? 먹고 체한 게 아니었어?
-그리고 재우증권이 한국도 글로벌한 금융기업이 있어야 한다며 현재증권과 합병해야 한다고 정부에 로비를 벌이고 있습니다.
“네~~에?”
손 회장 이 양반이 미쳤나.
“지금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딱 기다리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