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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91화 (91/477)

제91화 정상에 단 한 명만 올라갈 수 있네(5)

“도대체 유대인의 자긍심은 다 어디에 팔아먹은 겁니까? 내가 누차 말했을 텐데요. 뭔가를 주장하고 싶다면 손을 들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대란 말입니다.”

존의 으름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 회의실.

한쪽에 있는 파트너들은 존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반대편 파트너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입술을 닫았다.

리처드는 고개를 돌려 맨 뒤에 서 있는 앤드류를 쳐다봤다.

앤드류는 리처드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드의 귓가에 문득 앤드류가 했던 말이 스쳤다.

-미스터 임이 말하길, 존이 꼼수를 부리면 동요하지 말고 전부 기권해 버리라고 했어. 그럼 저쪽 편이 누구인지, 확보한 지분이 얼마인지 알 수 있다고. 우리가 지분에서 앞서 있더라도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라는 거지. 그래야 우리가 미스터 임의 지분을 확보한 걸 존에게 들키지 않은 채로 마지막 합병 안건에서 확실히 누를 수 있다고.

리처드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 이렇게 나오면 우린 기권이다.

리처드는 자신의 파트너들을 쭉 한번 둘러봤다.

모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존이라고 해서 이들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 의미를 다르게 해석했을 뿐이지만.

설마 폭력을 사용하는 건 아니겠지.

존이 주변에 있는 경호팀장에게 작게 고갯짓하자 경호팀장이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지시했다.

경호팀장의 행동을 지켜본 후 존은 모두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럼, 주요 안건을 지분에 의해 결정한다는 것에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절반이 조금 안 되는 파트너들이 손을 들었다.

자칫 다수결로 결정했으면 존의 파트너들은 패할 뻔했다.

존은 담담하게 손에 서류를 들어 보였다.

“여기 파트너 명단이 있습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자신의 이름과 지분을 확인하고 사인을 해 주십시오.”

리처드 쪽 파트너들의 표정에는 충격과 우려가 섞여 있었다.

서로 중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 속삭였다.

존은 서로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뭘 준비했는지 신경 쓰이는군.

30분 정도 지나자 찬성 쪽 파트너들의 명단을 확인하는 작업이 끝났다.

존이 다시 리처드를 보며 어디 한번 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하시는 분들은 나와서 이름을 확인하고 사인을 하십시오.”

리처드가 이제 우리 차례라는 듯 손을 들었다.

“기권합니다. 기권하면 나가지 않아도 되겠지요?”

기권?

존이 리처드를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생각한 게 기권이라고?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앞으로 그랜드월 일에 딴지를 걸겠다는 건가?

어쨌거나,

“그렇게 하세요. 리처드, 기권하면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존이 리처드 뒤로 시선을 옮기자 입술을 꽉 다문 다수가 보였다.

“내가 보기에 나머지 분들은 다 기권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기권입니다.

여기저기 불만 가득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좋습니다.”

존이 인정하겠다고 확인하자 옆에서 보조원이 찬성 지분이 적힌 쪽지를 전달했다.

42% 중 36%라…….

나머지는 6%.

숫자는 리처드 쪽이 더 많은데 지분은 형편없이 차이가 나는군.

빨리 끝내자.

존이 단상 마이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찬성 지분이 36%입니다. 이번 안건은 통과됐고……. 그럼 마지막 안건으로 모엘라스 파트너스와 뱅크오브에이스의 합병건에 대한 선택을 진행하겠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한 사람씩 나와 자신의 이름 옆에 찬성하는 은행을 적으면 진행요원들이 지분을 계산하여 발표하겠습니다.”

존의 시선이 리처드를 향했다.

“불만 없겠지요.”

리처드의 표정이 복잡미묘하게 변했다.

“불만 없습니다. 총재님이야말로 결과에 승복하시길 바랍니다. 또다시 불필요한 안건을 상정하지 마십시오.”

“불필요한 안건이라…… 그렇게 생각한다니 안타깝군요. 아무튼 이것이 마지막 안건입니다.”

“알겠습니다. 믿겠습니다.”

리처드의 말을 마지막으로 앞에서부터 한 사람씩 나가 자신의 지분이 적힌 공란에 은행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존의 편에 선 파트너들의 눈에 리처드를 향한 적개심이 이글거렸다.

리처드는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그랜드월은 헤지펀드 집합체이다.

모두 냉혈동물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그랜드월 파트너끼리도 살갑게 지내지도 않았고.

그래도 그랜드월의 파트너들은 서로 의지하거나 도움을 준 적은 없더라도 적대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무관심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적으로 대하는 저들의 모습은 2년간 남미와 동남아를 짓밟을 때 보았던, 이빨을 드러낸 늑대를 연상시켰다.

리처드는 그들의 그러한 면모가 익숙했고,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동시에 그들에게서 익숙함을 느낀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나도 저 늑대 무리 중 한 마리였는데.

지금까지 인간이라 생각했다니…… 어리석게도.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러니.

늑대끼리 맞붙는다면 철저하게 짓밟아 줄 수밖에.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주 철저하게.

내겐 21% 지분이라는 날카로운 이빨도 있다.

내가 너희의 포식자가 될 것이다.

리처드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 앞에 섰다.

그리고 품에서 펜을 꺼냈다.

찍찍.

그는 자신의 지분 위에 두 줄을 그었다.

모두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리처드에게 쏠렸다.

존은 특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처드, 뭘 하는 거지?

거기다 왜 줄을 긋는 거야?

리처드, 설마…….

존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기 위해 리처드 곁으로 천천히 걸어갈 때.

리처드는 두 줄로 지워 버린 숫자 옆에 펜으로 무언가를 휘갈겼다.

지분 21.5%.

뭐야?

흠칫 놀란 존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지, 리처드. 왜 네 지분을 21.5%라고 적었어?”

리처드의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 피어났다.

“제 지분이 21.5%니까요.”

왜?

존은 리처드의 웃고 있는 얼굴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되뇌었다.

왜지?

리처드의 지분은 0.5%라고 알고 있는데.

그사이 21%의 지분이 새로 생겼다고?

21%…… 21%!

이런 빌어먹을 미스터 임!

멀리서 지켜보던 앤드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존을 지켜봤다.

존, 이제 어쩔 겁니까.

이대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때,

“다 끝났습니까?”

앤드류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이 미친놈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네.

“미스터 임.”

재준이 앤드류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상황을 관망했다.

“에이, 끝났네. 끝났어. 재미있는 장면 다 놓쳤잖아.”

“여긴 어떻게 들어 온 겁니까?”

“밖에서 지키던 경호원들이 전부 안으로 들어가던데요. 그래서 유유히 뒤따라 들어왔지요.”

방금 전 혹시 폭력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한 존의 지시로 밖의 경호를 맡고 있던 인원들까지 모두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더라도,

“여긴 파트너 아니면…….”

“알아요. 하지만 리처드가 존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아서 지원 온 겁니다. 설마 증인도 내쫓진 않을 거 아닙니까.”

후.

그렇긴 하지.

재준의 예상대로 존은 리처드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리처드, 가문에 주어진 지분 외에는 추가로 소유할 수 없는 걸 모르는 건가?”

“명문화된 증거는 없잖습니까? 단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약속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한 처벌 규정도 없어요. 여긴 엄연히 회사이고 전 회사의 내규에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네가 말한 그 약속이 회사 규정보다 더 중요하단 걸 모르는 거야?”

“그 약속에 타인에게 지분을 양도하지 말라는 규정도 있을 텐데요. 왜 존은 지분을 미스터 임에게 팔았나요?”

“천만에, 전체에게 이득이 될 때는 얼마든지 양도할 수 있어. 우리 수당에 전혀 관계없는 지분이야. 그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7%를 주고 인도네시아 택시회사를 얻었고, 14%를 주고 뱅크오브에이스 은행을 얻었어.”

“저도 저의 결정이 회사의 이익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가정일 뿐이야. 확실히 눈에 보이는 걸 내보여야지. 단순히 그럴 것이라니, 그걸 말이라고 하나? 택시회사도 은행도 다 눈에 보이는 거야, 이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너의 지분은 무효야.”

“아니요. 이건 정당한 저의 지분입니다. 그리고 이번 승자는 저희가 된 겁니다. 이제 뱅크오브에이스와 합병을 진행할 겁니다.”

“천만에. 그걸 내가 용인할 것 같은가?”

리처드와 존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으르렁거릴 때였다,

“에이, 거, 꼰대 양반. 졌으면 승복할 것이지 치졸하게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고 있네. 유치하게. 나이 먹고 그럼 안 돼요. 옆에 자라나는 새싹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존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미스터 임?

재준을 확인한 존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어지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얽혀서 좋은 꼴을 보지 못한 놈이다.

이익이 있긴 했지만 험하게 당한 뒤에 얻은 것들이었다.

인도네시아 택시회사도 뱅크오브에이스도, 전부 다 주도권을 쥐고 차지한 게 아니다.

재준이 휘두른 칼에 피투성이가 된 걸 던져준 것에 불과했다.

지금도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지분을 왜 리처드에게 양도했을까?

아니, 양도한 게 아니라 잠시 빌려줬겠지.

하지만 빌려줬다는 증거를 내밀지 못하면 따질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저 지분……. 왜 빌려줬을까?

단지 뱅크오브에이스와의 합병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존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작게 기침마저 나왔다.

쫓아내야 한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

“미스터 임. 여긴 파트너 회의입니다.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존이 엄한 표정으로 몰아가자 재준이 빙글 웃으며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아이고 죄송해요. 제가 워낙 급해서 이렇게 무례하게 들어왔어요.”

“급한 일이 뭡니까?”

“내 지분을 그랜드월에 돌려줬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랜드월과 관계를 끊으려고요.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존 혼자 처리하기엔 버거울 것 같아서 파트너들 다 모인 김에 발표하려는데. 괜찮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귀가 잘 안 들리시나? 절교하려고요. 절교. 알지요? 절교. the end. 게임 오버.”

“협의서는 공증을 받은 서류입니다. 손해 배상을 청구하면 이길 수 없을 텐데요.”

“아, 청구하세요. 그거 몇 푼 한다고. 그걸로 내가 겁이라도 먹을 것 같아요? 어디 한번 해보죠. 나도 변호사를 세울게요. 세상 사람들이 이 사건의 내막을 알게 다 까발려 봅시다. 이거 완전 팝콘 각인데.”

존은 넋이 나간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이 협의서를 어기고 약속을 깨뜨린 건 맞다.

우리가 충분히 승소할 것이고 손해 배상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월가의 눈들이 이번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다면 과연 좋은 시선으로 볼까?

당연히 아니다.

금융개혁법안이 발효되기 전에 인수와 합병을 통해 거대 은행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 젊은 파트너의 계획을,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짓밟은 꼴이니.

“왜 이러는 건가?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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