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정상에 단 한 명만 올라갈 수 있네(1)
두 명의 경호원이 달려들어 오웬을 끌어냈다.
오웬은 자신의 팔을 잡아채는 경호원을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제 발로 걸어 나간 후 거세게 문을 닫았다.
쾅.
회의실에 감도는 잠깐의 적막.
여기저기 수군대고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저벅저벅.
윌리엄이 재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를 하게 되는군요. 미스터 뱅크오브에이스 프레지던트.”
“…….”
와, 월가 인간들 정말 대단하구나.
순식간에 태세 전환을 하네.
역시 돈이 무섭네. 무서워.
재준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윌리엄은 재준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뱅크오브에이스 이사회를 소집하고 주총을 열어 마무리 짓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네.”
의외로 굉장히 좋아하네.
오웬이랑 친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하긴 정승이 죽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윌리엄과 악수를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존이 앤드류와 함께 다가왔다.
“미스터 임, 그랜드월 대표 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약수를 하는 재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앤드류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재준은 존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그랜드월과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존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죠, 미스터 임.”
“뱅크오브에이스의 CEO는 앤드류가 맡았으면 합니다.”
“가능합니다. 능력도 있구요.”
“전 뱅크오브에이스 운영에 절대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다만?”
“저와 그랜드월이 동업에 준하는 사업을 하는 만큼 40억 달러의 절반인 20억 달러에 해당하는 그랜드월 지분 14%를 가지고 있겠습니다. 물론 제가 투자를 했으니 순이익의 21%도요. 물론 매매나 위탁 등 지분에 대한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앤드류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익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존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하는 척했다.
윌리엄이 존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존, 뭘 고민하나. 당연한걸. 그 정도는 해줘야 미스터 임이 그랜드월을 믿을 거 아닌가? 맨입으로 뱅크오브에이스를 맡는 건 안 될 일이지.”
윌리엄이 존을 타박하듯 말했다.
역시 은행 간 중재에는 탁월한 인물이었다.
“좋습니다. 조만간 변호사를 보내 합의서를 작성하겠습니다.”
“그랜드월과 협력 관계가 돼서 영광입니다.”
됐다.
그랜드월,
이제 너의 파트너들을 흔들어 상장시키는 일만 남았다.
같은 유대인들이기에 서로 끈끈한 유대관계라고 생각하겠지.
어디 돈 앞에서 얼마나 서로를 믿는지 두고 보겠어.
덤으로 뜻밖에 다른 은행들과도 지분 관계로 엮여 있으니 사용할 수 있는 지점은 거의 미국 전역을 뒤덮고 남았다.
도대체 적립식 펀드를 시작하면 얼마나 돈이 들어올까?
미국 총 증권 예탁 자산 42조 달러 중 10%만 들어와도 4.2조 달러.
4.2조의 돈이 주식으로 이동하고 5년을 주기로 100%의 수익만 올려도 미국 금융가를 쥐고 흔들 수 있다.
그냥 신이 되는 거지.
미국 증권사에서 20년간 꾸준히 10% 이상 수익률을 내는 펀드는 거의 없다.
그런데 하물며 100%라니. 우리 펀드에 돈을 맡기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 온다.
문제는 2022년 이후 미래는 나도 모른다는 거지만.
알 게 뭐야. 그땐 일선에서 물러나서 놀아야지.
벌어 놓은 돈이 얼마인데.
***
뱅크오브에이스를 인수하고 정비하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사실 내가 한 게 아니라 앤드류가 동분서주 뛰어다녔지만.
어쩌겠어, 자그마치 미국 제1의 상업은행으로 거듭나려면 굴러야지.
재준은 뉴욕 월가에 있는 호화로운 바에 홀로 앉아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고 입안에서 한 바퀴 굴렸다.
버터 향의 달콤한 맛 뒤에 깊은 풍미가 일품이었다.
한잔을 거의 다 먹고서 내려놓은 술잔을 톡톡 건드리자 바텐더 미키가 조심스럽게 잔을 채웠다.
“미키, 고마워요.”
재준은 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내 기억으론 코로나 전 2020년 세계 기업 순위에서 중국 빼고 1위는 JP스탠리, 2위는 버피 해서웨이, 3위는 사우디 알라콤, 4위가 뱅크오브에이스였는데.
그 뒤를 애풀, AT&D, 알파오메가, 잭슨모빌, 마이크로SF, 한국의 SS전자가 이었고.
조만간 뱅크오브에이스와 투마로우뱅크가 합병하면 회사 이름으로는 투마로우뱅크를 사용할 것이다.
뱅크오브에이스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으니까.
큭큭.
이렇게 은행 하나를 역사에서 지워버리다니.
큭큭큭.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건지 원.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재준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앤드류. 어서 와요. 행장 일로 바쁜데 내가 괜히 부른 건 아니죠?”
“은행 일에 치여 죽을 뻔한 걸 구해준 겁니다. 제발 좀 자주 불러 주십시오.”
“하하, 위스키 한잔하실래요?”
“그 전에 여기 미스터 임이 말했던 제일 친한 파트너를 데려왔으니 인사 나누시죠.”
재준이 고개를 돌리자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파트너치고는 젊은데?
“리처드 맨틀입니다.”
재준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임재준입니다. 미스터 임으로 부르면 됩니다. 전 직위가 없거든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수를 나눈 뒤 재준이 위스키를 권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잔에 술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혀로 입술을 적시던 앤드류가 재준을 돌아봤다.
“클랜파클라스입니까?”
“네. 여기 미키가 추천하길래 스무 병 샀어요. 마셔보니 달달하고 좋네요.”
재준은 바텐더 미키에게 엄지를 들어 올렸다.
앤드류는 재준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만 달러짜리 술을 스무 병이나 사다 놓았다고요?”
“가끔 혼자 술 생각이 나면 한 병씩 먹으려고요. 술은 많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양껏 들어요. 할 이야기도 많은데.”
허.
물론 비싸긴 해도 앤드류가 마시지 못할 술은 아니다.
그래도 스무 병이면 20만 달러인데.
앤드류는 기가 막혔지만, 향을 맡아 본 후 잔을 비웠다.
옆자리에 앉은 리처드도 잔을 단번에 들이켜고 맛을 음미했다.
앤드류가 문득 생각해 보니 바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조용한 바는 또 어떻게 알고 찾았습니까? 뉴욕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네요.”
후후.
앤드류의 말에 미키가 조용히 주먹을 입에 대고 웃었다.
재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샀어요.”
뭐라는 거야?
“이 바를 샀다고요?”
“아니, 이 건물을 샀어요.”
“술을 마시려고 20층 건물을 산 겁니까?”
“요즘 은행들이 부동산 매물을 많이 내놓아서 그중 가장 낡은 건물 하나를 고른 겁니다.”
“이 건물은 낡은 게 아니라 고풍스럽다고 하는 겁니다.”
“어쨌든요.”
“이것도 투자입니까?”
“그럼요. 월스트리트가 없어지지 않는 한 건물 임대료는 계속 나올 테니까요. 제가 말한 생산성 있는 물건이죠.”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생각은 하는데 선뜻 나서지는 않는다.
하지만 임재준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즉시 행동한다.
이 점이 항상 앤드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그런데 저랑 가장 친한 파트너는 왜 부르신 겁니까?”
그랜드월에서 파트너는 최상위 계층의 포식자이다.
누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존도 그랜드월 대표라고는 하지만 파트너 중 한 명일 뿐이다.
“저랑 손잡고 그랜드월을 먹는 건 어떨까 해서요.”
네?
뭐라고요?
앤드류와 리처드는 그 말에 똑같이 놀란 얼굴을 했지만, 당연하게도 놀라움의 포인트가 달랐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이런 미친놈을 봤나?
리처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천 달러 지폐를 집어 던졌다.
“이거면 술값은 충분할 겁니다.”
리처드가 재준을 노려보더니 휙 돌아서 나가려 했다.
쯧쯧.
재준이 리처드의 등에 대고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파트너라면 냉정하고 사려가 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이번에 존을 내리고 내가 그 자리에 앉으면 그때는 나를 어떻게 보려고 그러는지. 하여튼.”
가던 리처드의 발걸음이 멈췄다.
“당신,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세요.”
“리처드, 나에게 그럴 게 아니라 지금의 당신 행동을 보세요. 당신은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맞아요. 당신 회사의 대주주입니다. 주총을 열어 존도 당신도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어요.”
“우린 주총이 아니라 파트너 회의에서 모든 걸 결정합니다. 지분 따위로 어쩔 수 없는 게 그랜드월이란 걸 모르셨나 보군요.”
“아, 주총이 아니라 파트너 회의군요. 근데, 그 파트너에게 내가 손을 내밀면 몇이나 거부할 것 같습니까? 아니지, 내 손을 잡지 않는 파트너들이 뱅크오브에이스의 자금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알기론 뱅크오브에이스 운영은 그랜드월의 소관일 텐데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내 은행인데. 내가 그렇게 못 하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그랜드월 지분 따위야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
리처드와 재준의 싸움에 앤드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어.
“자, 이제 나와 이야기를 할 자세를 좀 갖춰야 할 것 같은데……. 나도 굳이 앤드류의 친구에게 매몰차게 대하기는 싫거든요.”
리처드는 앤드류를 보고 ‘이런 일이라면 오지 않았다’라고 말하듯 눈을 부라렸다.
앤드류가 리처드에게 다가가 달래듯 차분하게 말했다.
“리처드, 너무 무례했네. 자네는 파트너야. 어떻게 파트너가 냉정을 잃을 수 있지? 우린 그 사항에 대해서 싫다, 좋다만 이야기하면 끝나는 일이야. 그게 그랜드월이라도 말이지.”
후.
리처드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네. 앤드류. 미스터 임.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나도 그랜드월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니까요. 자, 다시 앉아 봐요.”
리처드는 이성을 찾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재준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리처드를 봤다.
“리처드, 잘 들어 봐요. 지금 발의되어있는 금융개혁법안에 대통령이 사인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금융개혁법안이라……. 그 법안은 우리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모든 금융 기관이 인수 합병으로 인해 Financial Holding Company(금융지주회사)로 향한다는 것이었고요. 분명히 서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할 겁니다.”
“맞아요. 지금은 러시아 채권 사태로 인해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뿐이지. 곧 덩치 키우기에 돌입할 겁니다.”
재준은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리며 앤드류를 쳐다봤다.
“앤드류, 미리 준비해 놓으세요. 투마로우뱅크와 뱅크오브에이스, 스톡체인을 금융지주회사 아래에 묶을 겁니다.”
“그 법안에 대통령이 정말 사인을 할까요?”
“안 할 수가 없죠. 지금 은행과 보험이 편법으로 합병을 하고있는 상황인데. 괜히 비용과 시간만 낭비되고 있어요.”
“일단 팀을 만들어 준비하겠습니다.”
리처드는 앤드류가 재준에게 깍듯이 대하는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