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죽어(4)
“그랜드월은 뱅크오브에이스를 인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흥미가 떨어지는데.”
“다른 조건을 제시하시죠.”
“그랜드월 지분도 안 준다, 뱅크오브에이스도 인수 안 한다. 뭔가 퍼즐이 안 맞는 느낌이잖아요. 안 그래요?”
“…….”
“그럼, 그랜드월은 빠지세요.”
“뭐라고요?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니, 뭐가 그럴 수 없다는 거야?
뭘 주면서 거래를 해야지.
“앤드류,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닌가요? 난 그랜드월 말고도 파트너를 삼을 은행은 많아요. 설마 내가 뱅크오브에이스를 같이 먹자고 제안하면 혹할 은행이 없다고 자신하는 건 아니죠?”
“다른 은행…….”
독한 놈.
월가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렸다.
놈이 제안하면 월가의 은행 대부분은 자신이 돕겠다고 나설 것이다.
사실 그랜드월만 해도 뱅크오브에이스를 뜯어먹겠다는 것이지 돕는 것은 아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랜드월 지분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얼마나?”
“20억 달러에 14%입니다.”
“그랜드월이 커졌다고 20억 달러에 14%다?”
“그랜드월도 자산이 늘었습니다.”
“뭐 그래도 돼요. 어차피 이번엔 지분만큼 수익을 요구할 거니까. 설마 수익을 안 주려는 건 아니죠? 상장도 안 된 그랜드월 주식을 먹고 떨어지라는 건 아주 안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히 배당은…….”
“그랜드월에 배당 같은 거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말한 건 배당이 아니라 수익입니다.”
이런 제길 또 말려들다니.
그랜드월이 상장이 안 되어있으니 투자자에게 수익을 배분하는 건 당연하다.
전에 현재증권과 계약한 2,000만 주는 수익 배분에 관한 조항을 뺐다.
현재증권도 그랜드월이 당연히 상장하리라 생각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앤드류는 고민했다.
지금은 그랜드월 전체 수익의 일부를 주느냐, 뱅크오브에이스를 주느냐…….
그랜드월의 2,000만 주는 1억 달러를 투자한 것과 같으니까.
아, 지금은 자산이 10배로 불어났으니 10억 달러를 투자한 셈이 되었다.
자산이 늘어난 건 그랜드월만이 아니다.
월가 전체가 남미 외환위기와 동남아 외환위기로 배가 터지도록 남의 나라 자산을 싹 털어먹었으니까.
기억하겠지만 대한민국 이슬 그룹만 해도 3천억을 투자하여 3조를 가지고 갔다.
아, 물론 이번엔 재준의 몫으로 바뀌었지만.
더군다나 재준은 ‘아주 안 좋은 생각이었습니다’라고 마지막 단어를 과거형으로 끝냈다.
지금까지 2,000만 주에 대한 수익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이었다.
앤드류는 결국 피식 웃었다.
“후, 내가 또 당했군요.”
“그렇다니까. 자, 결론은 나와 있네요. 난 20억 달러를 투자하고 그랜드월 지분 14%를 추가로 소유하며 총이익의 21%를 받는다. 맞죠?”
“네, 맞습니다.”
“전엔 1억 달러로 7%의 지분을 얻었는데 지금은 20억 달러를 주고 겨우 14%의 지분밖에 못 얻었네요. 이거 손해인데.”
“그랜드월 자산이 그사이 10배 이상이 늘었습니다.”
“알아요.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지분에 추가 이익 배분이면 미스터 임도 얻은 게 많은 겁니다.”
앤드류는 쓴맛이 입안 가득 차올랐다.
사실 지분을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랜드월은 상장을 아예 생각도 안 하는 기업이고 200명이 넘는 헤지펀드 복합체가 움직이는 투자은행이기 때문에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크게 염려되는 건 아니었다.
지분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지분을 가지고 있는 투자자에게 돈만 잘 주면 된다.
자칫 위협을 느낀다면 헤지펀드들이 그랜드월을 나가서 새로운 은행을 만들면 그만이다.
이익도 파트너의 수익과 수당을 다 제하고 회사에 귀속되는 돈에서 21%를 주는 것이니 회사로선 큰 지출도 아니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앤드류가 가방을 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재준이 다가와 빙글 웃었다.
저놈의 웃음.
미간을 찡그린 앤드류에게 재준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앤드류, 당신, 뱅크오브에이스의 CEO 하고 싶지 않아요?”
“뭐요?”
“내가 아예 40억 달러로 인수하고 언론에 뭐 좀 흘리면 뱅크오브에이스 오웬을 숙청할 수 있는데. 생각 없어요?”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그마치 뱅크오브에이스의 CEO다.
지점 수만 따지면 미국 최대이고, 평균 잔액은 미국 제2의 은행인 데다, 포춘 500대 기업의 99%와 거래하고 있으며 타임스퀘어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가지고 있는 은행의 주인.
앤드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뭐 하는 겁니까?”
“잘 생각해 봐요. 지금까지 난 약속은 반드시 지켰어요. 상대가 나를 너무 경계해서 꼼수를 부리려다 역으로 당한 거지.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요.”
앤드류는 마른침을 한 번 더 삼키고 역정을 내었다.
“지금 약속을 파기하려는 겁니까?”
“아니,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요.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방안을 생각해봐야죠.”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재준은 양손을 들고 뒤로 물러나며 앤드류를 쳐다봤다.
“뱅크오브에이스의 대표 오웬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는데. 안 그래요? 예전에 비해 총명하지가 않아요. 이번 러시아 투자만 해도 그렇지. 무식하고 욕심만 늘었어요. 그의 우호 세력을 자극하기엔 지금이 참 좋은 기회 아닙니까?”
하하하.
결국 앤드류는 크게 웃고 말았다.
대단해.
너 진짜 대단하다.
완전 미친놈이야.
***
그 후 며칠 동안 시장에는 뱅크오브에이스의 부도설이 나돌았다.
찌라시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살이 붙고 뼈대가 세워지면 그럴듯한 사실로 부풀려져 진실같이 들린다.
거기다 뱅크오브에이스가 러시아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했다는 사실이 조명되자 아예 뱅크오브에이스 때문에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주가 폭락의 원흉으로도 몰렸다.
CNM 경제뉴스 진행자 루 듭스는 주식 하락의 요인은 ‘마진 콜을 가장 많이 누른 뱅크오브에이스’라고 입에 불을 뿜으며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랜드월은 재준에게 20억 달러를 투자받고 다른 투자자를 모집했지만 다들 그랜드월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랜드월도 이제 손을 떼는 게 좋을 텐데.
-뱅크오브에이스의 시대는 이제 갔어.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나?
***
뱅크오브에이스 대표실.
그랜드월 대표 존은 뱅크오브에이스 대표 오웬에게 투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20억 달러뿐이란 말이지.”
“그래, 이것도 투마로우뱅크에 우리 지분과 이익금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받은 거야.”
“투마로우뱅크가 20억 달러를 더 투자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지분은 줄 수 없어.”
“아니, 뱅크오브에이스 지분 5%를 주면 되지.”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그 지분이면 자네를 몰아내는 캐스팅 보드가 될 수도 있어.”
“그렇지, 자네라면 모를까.”
“할 수 없잖은가. 일단 5년 만기 증권 옵션을 팔게.”
“안 돼. 만기가 거의 남지 않았어. 지금 시중의 돈이 죄다 미국 국채에 몰리고 있어. 조금만 버티면 가격이 더 올라갈 걸세.”
“그 조금이 2년이야. 그건 조금이 아니라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냥 팔아.”
“…….”
오웬은 내선 버튼을 눌러 담당자를 호출했다.
“마이클, 5년 만기 증권 옵션 가격이 어떻게 되나?”
-
“알았네. 그럼 시장가에 전부 풀게.”
후.
허탈한 오웬은 아쉬운 듯 숨을 길게 내뱉었다.
“너무 아까워 말아. 기회는 또 올 거니까. 일단 러시아만…….”
띠리리리링.
존이 말하는 도중에 오웬의 책상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내선전화의 불빛이 방금 지시를 내린 마이클이란 사실에 오웬은 수화기를 잽싸게 들었다.
“무슨 일인가?”
-처음엔 계약이 잘 체결되었는데 갑자기 물량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가격이 끝없이 하락하고 있습니다.
“뭐? 누구야?”
-투마로우뱅크가 가장 많은 물량을 시장에 팔아치우고 있습니다.
투마로우뱅크.
왜?
존과 오웬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서로를 마주 봤다.
오웬은 급하게 마이클에게 물었다.
“얼마나 손해인가?”
-현재 1억 달러 이상 손해가 났습니다. 매도를 멈출까요?
이미 늦었다.
가뜩이나 러시아 손실로 휘청거리는 회사에 악재가 하나 더 늘었다.
“우리에게 남은 게 무언가?”
-정크 채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8억 달러 정도입니다.
“다 팔아. 일단 다 팔고 생각합시다.”
존이 무너지는 오웬을 옆에서 지켜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투마로우뱅크에게 20억 달러를 더 사정해야 하나.
***
뉴욕 연방준비은행 회의실.
월가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은행장들이 다 모였다.
앤드류가 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결정이 나는 겁니까?”
“그럴 거야. 더 시간을 끌다간 뱅크오브에이스의 불똥이 다른 은행으로 번질 수 있어. 여기서 진화해야 해.”
“만약 다른 은행장들이 반대하면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은 뱅크오브에이스의 일이지만 언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이럴 때 서로 도와줘야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월가의 암묵적인 약속이야.”
그렇다. 남의 나라조차도 망하면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월가지만 저희끼리는 절대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저, 존. 할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하면 안 되겠는가. 지금은 뱅크오브에이스에 대해 손익을 따지는 데 열중해야 하네.”
“뱅크오브에이스와 관계있는 일입니다.”
존은 앤드류를 슬쩍 바라보며 귀찮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뭐, 새로운 거라면 한번 해보게.”
“투마로우뱅크가 뱅크오브에이스 인수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존은 미간을 좁히며 앤드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지금 그 말을 책임질 수 있나?”
앤드류는 존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속삭였다.
“투마로우뱅크가 인수하고 저희가 운영하면 어떠냐고 제의해왔습니다.”
“뭐?”
존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 은행장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흠, 흠.
존은 미안하다는 듯 손을 들어 아무 일도 아니란 손짓을 했다.
“그게 정말인가? 그걸 왜 이제 말하나.”
“미스터 임이 워낙 엉뚱한 인물이라…….”
앤드류는 한국에서의 재준을 떠올렸다.
마치 당장이라도 회의실에 재준이 들어올 것 같아 자꾸 문 쪽으로 시선이 갔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겠지.
임재준은 반드시 나타난다.
한국에서 이슬 그룹 때처럼.
은행장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뉴욕 연준 총재 윌리엄이 회의를 시작했다.
“다들 오셨으니 시작하겠습니다. 뱅크오브에이스를 살려야 금융시장의 위기를 막을 수 있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은행 컨소시엄을 구성해 구제 금융을 만들어야 합니다.”
연방준비은행 행장 윌리엄이 말하자 대부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도 존재하는 법.
“다른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이미 저희 그랜드월은 20억 달러를 뱅크오브에이스에 투자했습니다. 남의 식탁에 포크 올리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습니다.”
바로 그랜드월의 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