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84화 (84/477)

제84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죽어(3)

“자네니까 판다는 거네.”

존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처음엔 그저 뱅크오브에이스를 도와줘서 그랜드월이 한국에서 본 손해를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뱅크오브에이스를 가진다면…….

뱅크오브에이스는 상업은행 분야에서 1~2위를 다투었고 그랜드월은 투자은행 분야에서 10위에도 못 들었다.

이건 만회 수준이 아니라 그랜드월이 최소한 투자은행 3위권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단 9개의 투자은행에 부여되는 벌지 브래킷(Bulge Bracket)이 될 수 있다.

미국 은행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으로 나뉘어 있다.

상업은행은 소매은행으로 일반인들의 예금과 적금을 취급한다.

전국에 지점이 지천으로 깔린 우리들이 아는 그 은행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돈은 항상 은행에 보관하니 투자할 돈이 넘쳐 난다.

대부분 상업은행은 투자은행에 돈을 대고 투자은행은 이 돈으로 다양한 투자 활동을 하는 게 정석이다.

뱅크오브에이스가 가지고 있는 4,000억 달러의 여신.

이 돈을 그랜드월이 굴릴 수 있다면…….

“좋네. 내가 한번 발 벗고 나서 보겠네.”

“단, 나의 자리는 약속해 줘야 하네.”

존은 어깨를 들썩인 후,

“당연하지. 자네와 난 친구 아닌가.”

그렇게 둘은 다시 친구가 되었다.

오웬은 존의 눈매가 올라가는 걸 보았다.

“욕심 많은 늙은이. 알겠네.”

오웬은 그랜드월에게 뱅크오브에이스를 넘겨도 자신은 여전히 CEO로 남을 수 있다면 충분했다.

오웬은 존과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누고 그랜드월을 떠났다.

존은 오웬이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부회장 도날드를 불렀다.

“도날드, 40억 달러를 마련해야 하네. 그럼 뱅크오브에이스를 가질 수 있어.”

“뱅크오브에이스라면 상당히 탐나는군요.”

“지금 러시아 사태가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이제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뿐이 아니지. 이 금융위기를 통해 우린 저 위로 올라가는 거네.”

존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하하.

존과 도날드의 눈에 벌지 브래킷이 보였다.

“지금 40억 달러 현금을 가동할 기업이 있을까?”

“현재로선 벨 컴퓨터의 마이클 벨이 가장 유력합니다만, 지금 금융권이 엉망이라 과연 투자할까요?”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은행이 좋긴 한데…….”

“아, 이번에 투마로우뱅크의 주인이 미국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투마로우뱅크라면 한국의 미스터 임을 말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한국에서 1억 달러 손해를 일으킨 그 사람입니다. 하지만 투마로우뱅크와 스톡체인을 소유하고 있어 자금의 여력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희의 대주주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손해를 본 경험이 있지만, 손을 잡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여긴 월가니까요.”

“좋아, 한국에서 앤드류를 불러들이게.”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

뱅크오브에이스 대표 오웬은 그랜드월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존의 눈빛에서 탐욕을 엿봤다.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순 없지.

뱅크오브에이스의 자산이 얼마인데.

오웬은 오히려 그랜드월은 보험으로 남겨두고 실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을 찾았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행장이 뉴욕에 있는 20개의 대형 은행들을 설득해주기만 한다면 각 은행에서 2억 달러씩 대출을 받을 수 있다.

20개의 은행을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지금 찬 피자 더운 피자 가릴 때가 아니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행장 윌리엄은 오웬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웬, 난 뱅크오브에이스가 부도나는 걸 원치는 않네. 최소한 내가 행장으로 있는 기간에는 자네를 도울걸세.”

“이렇게 믿어 주니 고맙네.”

“뱅크오브에이스은 충분히 살아날 능력이 있네.”

“은행들 설득이 가능하겠나?”

“걱정 말게. 은행장들 소집해서 서로 의사를 교환해 보면 될 거야. 다들 자네에게 신세 한 번씩은 진 적이 있지 않은가. 그동안 뱅크오브에이스가 공적자금 투입 찬성에 항상 적극적이었는데.”

오웬은 희망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전국을 12개의 연방구로 나누고 각 지역에 연방준비은행을 두었다.

만약 어떤 은행에 문제가 발생하면 연방준비은행 행장이 회의를 소집한 후 공적자금을 투입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피 튀기는 설전을 거친다.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 나면 은행들이 각출하여 문제의 은행을 돕는다.

한국과 다르게 공적자금을 정부가 아니라 민간에서 집행한다.

연방준비은행과 그랜드월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둘이나 얻었어.

뱅크오브에이스가 어려울 때 도와준 은혜는 잊지 않겠지.

***

L.S.Company 앞.

앤드류는 회장 존의 지시로 재준의 투자사에 도착했다.

-앤드류, 미스터 임이 40억 달러는 힘들어도 20억 달러는 생각해 본다고 했네. 자네와 미스터 임이 안면이 있는 사이이니 최종 협상만 잘 마무리하게. 혹시 그랜드월 지분을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주게.

임재준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그 지분으로 뭔 짓을 할지 모르는데.

멀리서 지켜보기엔 흥미롭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물어뜯는 짐승 같은 놈인 줄 모르는 거야.

정말 질긴 악연이다.

지난날 재준의 섬뜩한 미소를 기억하자 고개가 저절로 저어졌다.

들어가기 정말 싫군.

후.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절대 놈의 수에 말려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다짐을 하고.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디며 사무실로 향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표실로 들어섰는데…….

큭큭큭큭.

익숙한 웃음소리와 난장판인 사무실을 보고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월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직원의 말에 재준이 앤드류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 이게 누구야?”

미스터 임.

후후후, 과연 너답다.

“반가워요, 앤드류. 빨리 와서 앉아요.”

재준은 TV에서 난장판으로 변한 월가의 객장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팝콘과 콜라가 놓여 있었다.

앤드류는 허탈하게 눈꼬리를 내리며 재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재밌습니까?”

“그럼요. 남의 집 불구경이 제일 재밌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 보세요. 허둥대는 꼴이 가관이잖아요.”

“제 나라……. 그냥 일이나 합시다.”

자중해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저놈도 한국인이라 외환위기를 겪었을 테니까.

그때 미국이 한국을 보며 즐거워한 건 부정할 수 없지.

똑같은 놈끼리 서로 힐난해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야.

앤드류는 바로 일 얘기를 꺼내려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이 능구렁이가 왜?

“미스터 임. 왜 존의 말에 응한 겁니까?”

“아, 그거. 나에게 현금이 50억 달러나 있어요. 너무 많아요. 전 현금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베타(변동성)가 제로인 현금이 큰 힘이 될 텐데요.”

“그런가? 변동성이 제로면 당장은 걱정은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장 위험한 자산 아닌가요?”

“시간이라…….”

엔드류는 재준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지금 현금 1억이 10년 후 1억과 같은 것이냐의 문제였다.

1억을 은행에 집어넣고 발생하는 이자로는 5% 물가상승률을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

1998년 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것과 2008년 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 세금도 내야 한다.

요즘도 현금을 은행에 묵혀두는 사람이 있나?

있다면 당장 어디든 투자합시다.

“그럼, 금이라도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격은 올라갈 텐데.”

“금이요? 그 생산성도 없이 주름만 늘리는 쓰레기를 왜 삽니까?”

“쓰레기요?”

“네, 금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 가격이 오르나 목이 빠져라 보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 짓을 왜 해요. 금이 두 개로 분열한다면 모를까. 금이나 튤립이나 다를 게 없잖아요.”

“가격이 오를 겁니다.”

재준이 자세를 고쳐 앉고 한심하다는 듯 앤드류를 쳐다봤다.

“앤드류, 기업 인수만 해서 다른 투자 대상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요. 전 세계에 있는 금을 다 합치면 얼만지 아십니까?”

“글쎄요.”

“대략 15만 톤 정도 돼요. 금액으로 따지면 8조 달러 되겠네요.”

“별걸 다 알고 있습니다.”

“내 취미가 잡학이라. 근데 8조 달러로 살 수 있는 게 뭘까요?”

“8조 달러면…….”

“금액이 너무 크니까 감이 안 오죠? 미국 전체 농지 4억 에이커를 2,000억 달러로 살 수 있어요. 미국 전체 농지를 사는 데 겨우 2,000억 달러. 아직 7.8조나 남네. 그럼 뱅크오브에이스가 40억 달러니까. 뱅크오브에이스 같은 회사를 1950개를 살 수 있어요.”

“…….”

너무 놀란 앤드류는 눈만 껌뻑였다.

“감이 좀 오죠. 매년 농지에서 자란 곡물을 내다 팔고 1950개나 되는 금융회사를 굴려봐요. 아마 5년 안에 8조 달러를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돈을 금고에 모셔놓고 좋다고 하는 거잖아요. 정말 한심하지 않아요? 금 좋아하지 마세요. 그거 다 수작입니다.”

꿀꺽.

앤드류가 마른침을 삼켰다.

괜히 물어봤어.

이제 금이라면 치를 떨게 생겼네.

재준은 앤드류에게 콜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현금이나 금 같은 생산성 없는 것들은 관심 없어요. 전 오직 금융, 돈을 굴리는 금융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러니 경제가 붕괴한다고 호들갑 떨면서 현금을 들고만 있고, 통화가 붕괴한다고 금을 사는 게 제 눈에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겠어요. 공포는 나의 친구라니까. 행복은 나의 적이고.”

“…….”

“왜요?”

“아닙니다. 존의 요구에 왜 응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그럼 20억 달러를 투자 조건을 말씀하세요. 할 수 있는 건 뭐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자세를 고쳐 앉은 재준이 ‘정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랜드월 지분을 주세요.”

앤드류는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를 빠르게 계산했다.

재준은 그랜드월의 주식을 이미 2,000만 주 가지고 있다.

총 주식 수는 2억 8,000만 주로, 2,000만 주면 7% 정도.

우호지분이 전혀 없으니 아직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저놈은 위험하다.

그랜드월 지분을 이용해서 언제 누굴 물어뜯을지 모르는 짐승이니까.

“그랜드월 지분은 안됩니다.”

“그러면 뱅크오브에이스를 넘겨 주세요. 사실 전 뱅크오브에이스가 더 땡기긴 해요.”

“지금 우리가 하는 협상은 뱅크오브에이스를 살리기 위한 건데…….”

앤드류는 재준이 빙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자 말을 멈췄다.

“이봐요, 앤드류.”

이놈 또!

“우리 솔직해지는 게 어때요?”

하아.

앤드류의 입에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럽시다. 당신과 수 싸움은 지겨우니까.”

“맞아요. 이제 딜을 할 자세가 되었네요. 난 뱅크오브에이스를 우리가 같이 먹었으면 하는데. 어때요?”

“우리라니. 그건 무슨 뜻입니까?”

“동업하는 겁니다.”

“동업이요?”

“음. 정확히 말하면 내가 40억 달러로 뱅크오브에이스를 인수하고 운영은 그랜드월에 맡기고 싶은데. 물론 이익은 9 대 1.”

“거절합니다.”

앤드류는 재준을 노려봤다.

이건 사전에 전혀 없던 이야기였다.

뱅크오브에이스는 그랜드월이 인수하고 그랜드월이 운영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그랜드월은 돈이 없다.

그렇다면 미스터 임의 제안도 좋은 조건인데.

9 대 1은 너무 적지 않나?

내 선에서 처리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재준은 물러나지 않고 다가섰다.

“왜요? 난 딱 좋은 거 같은데.”

말려들면 안 된다.

“우린 돈이 필요하지, 은행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에이, 그랜드월이 뱅크오브에이스 먹으려는 거 다 아는데 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