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죽어(2)
다음 날.
투마로우뱅크.
“오우, 프레지던트 임.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도 마이클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지네요.”
KFCC 할아버진 줄 알았어요.
둘은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강호석은 마이클 옆에, 박민수는 재준 옆에 앉았다.
“현재 스톡체인 수입은 어느 정도입니까?”
“하루 총 매매 금액은 고객 예탁 자산의 1%인 100억 달러이며 수수료는 2,000만 달러입니다.”
미국은 매수할 때 한 번, 매도할 때 한 번 수수료를 낸다.
매도할 때 0.0005% 미국 증권위원회세를 더 낸다.
하루 수입이 한화로 대략 240억 원.
한 달에 20일을 영업일로 하면 4,800억 원.
일 년이면 5조 7,600억 원.
생각보다 적은데.
일 년에 20조는 벌어야 순위권에 들어갈 텐데.
아직 갈 길이 머네.
광고라도 더 때려야겠다.
“광고를 더 해 주세요. 우리의 목표는 분기 매출 50억 달러입니다.”
“네? 일 년이 아니라 분기 매출이 50억 달러요?”
“네. 분기입니다.”
“현재 스톡체인 연 매출이 50억 달러입니다.”
박민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여긴 인구 5천만 대한민국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세계 1위의 소비국가에서 연간 200억 달러는 벌어야 하지 않겠어요?”
“…….”
아니, 여기 대한민국이 왜 나오는 건데?
그리고 미국이라고 꼭 더 많이 번다는 보장이 있나?
박민수는 말을 잃었고, 강호석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러시아 채권 파악했습니까?”
여기.
재준이 한국을 떠나기 전 러시아 채권 현황 조사를 지시한 상황이라 강호석이 자료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재준은 자료를 보며 역시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꼼꼼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이번 달 러시아가 월가에 지급할 달러가 총 얼마인지 아시지요?”
“400억 달러 정도 됩니다.”
“이 폭탄이 월가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폭탄이라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러시아가 지급을 거절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단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음.
마이클은 별일이 있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스톡체인의 고객 예탁 자산이 1조 달러를 넘어가고 있었다.
미국 전체 예탁 자산은 42조 달러.
400억 달러라면 큰돈이지만 월가가 이 정도에 흔들릴까.
박민수와 강호석 또한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크게 동요가 일어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산술적인 계산으로는 겨우 400억 달러로 월가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남아가 외환위기로 휘청거리고 미국의 금융 지배가 전 세계를 하나의 금융 사슬로 묶어 놓은 게 화근이었다.
겨우 400억 달러.
신자유주의 깃발 아래 통제 없이 전 세계로 흘러 들어가 돌아오지 않는 달러.
여기에 공포가 더해지면? 겨우 400억 달러로 월가에서 호러 영화 한 편 찍는 거지.
그 전에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지금 금리 50%인 러시아 채권이 50% 선에서 거래되고 있습니다. 되도록 아주 천천히 시장 상황을 체크할 정도만 매집하도록 하세요.”
금리 50%인 러시아 채권이 50% 선에서 거래되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100달러짜리 채권을 50달러에 살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일 년에 50달러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단 말이다.
물론 나중에 원금 100달러도 받는다.
즉, 50달러 투자해서 채권 만기가 되면 150달러가 되어 돌아온다.
이게 말이 되냐고?
이 당시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에 더해서 모라토리엄이 선언되면 러시아 채권은 50%가 아니라 10%에 살 수 있었다.
금리도 50%가 아니라 200%까지 치솟았다.
“러시아 채권은 정크에 가깝습니다. 아무도 사지 않아요.”
“그래서 사는 겁니다. 다만 서두르진 마십시오. 10%까지 떨어지면 전부 사들이시고요.”
혹시 러시아가 돈을 안 갚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사람 있나?
안 갚으면 더 땡큐다.
가스나 석유로 달라고 하면 되니까.
아마 러시아가 더 좋아할걸.
마이클은 반대하고 싶었지만, 재준을 믿어 온 강호석과 박민수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고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그리고.
재준은 숨을 크게 쉬고 마이클과 강호석, 박민수를 차례로 쳐다봤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온 것은 뱅크오브에이스를 투마로우뱅크와 인수 합병하기 위해서입니다.”
뭐라고?
인수! 합병?
마이클은 재준을 바라보았고 박민수는 머리를 도리질했으며 강호석은 저기 멀리 창밖을 건너다보았다.
합병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수라니.
합병은 서로 합의하에 두 개 이상의 은행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미국은 은행 합병에 미친 나라니까.
1970대엔 약 140건의 은행 합병이 있었고 1980년대엔 약 500건의 은행 합병이 있었다.
미국 은행에서 합병이란 그냥 일상적인 기업 행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인수는 은행을 사들여야 한다.
단순 합병과는 달리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가며 미국 전체 은행들의 신경전에도 대응해야 한다.
이번엔 강호석과 박민수, 마이클이 놀라는 걸 넘어 아주 강하게 반대했다.
“인수는 덩치가 너무 큽니다. 자금만 1,000억 달러 이상이 들어갈 겁니다. 지금으로선 무리입니다.”
하지만 재준은 여유로웠다.
“저도 그렇게 많이 돈을 쓸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 제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모두 얼굴에 모락모락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재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먼저 뱅크오브에이스가 5년 만기 증권 옵션을 대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그것과 똑같은 5년 만기 증권 옵션을 10억 달러 정도 사들이세요.”
증권 옵션은 미국 국채 선물을 말한다.
이는 은행이나 증권사라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옵션도 주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매수가 많으면 상승하고 매도가 많으면 하락한다.
5년 만기 증권 옵션은 마지막에 뱅크오브에이스가 현금을 마련하려고 시장에 내다 팔 비장의 카드다.
나오기만 해 봐.
쏟아부어서 가격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10억 달러란 말에 다소 긴장했지만, 마이클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현금으로 들고 있으나 옵션으로 들고 있으나 유동성은 거의 비슷하니까.
“네.”
“그리고 박 실장님. 미국 주식 방송의 제일 명성 있는 셀럽 한 명 섭외해요. 아니, 구워삶아 주세요. 한 100만 불 정도 안겨주면 뭐든 할 겁니다.”
“뭘 하라고 할까요?”
“뱅크오브에이스 때문에 러시아 모라토리엄이 발생했다고 방송에 떠들어 대게 만들어 주세요. 실제로 뱅크오브에이스가 가장 많은 투자를 했으니까요.”
“언론까지 동원하는 겁니까?”
“원래 덩치가 큰 놈이랑 싸울 때는 끊임없이 몰아쳐야 이길 수 있는 겁니다.”
마이클은 거침없는 재준을 보며 한기가 올라왔다.
허. 이 사람과 한 팀이라는 게 다행이네.
아니, 투마로우뱅크 인수 때만 해도 순한 양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디 지옥이라도 갔다 온 건가?
“이렇게까지 뱅크오브에이스를 인수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돈에 깔려 죽어 보려고요.”
“네?”
하하.
농담입니다.
“적립식 펀드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마이클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증권사에서만 계좌를 개설하잖아요.”
“그렇습니다.”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뱅크오브에이스 지점을 이용하겠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아직 은행은 증권 계좌 개설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거 이제 1년 안에 풀립니다.”
뭐?
지옥뿐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갔다 온 거야?
재준이 뱅크오브에이스를 노리는 것은 바로 지점 때문이었다.
적립식 펀드를 팔기 위해선 은행 지점만 한 곳이 없다.
1999년 미국 대통령이 금융개혁법안에 서명하면 바로 시작하기 위해 사전 작업을 준비 중이었다.
마이클은 처음 본 재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 놀라고 있었다.
“아, 이번 인수 과정은 꽤 재미있는 구경이 될 겁니다. 팝콘과 콜라를 준비해 주세요. 아주 많이.”
네?
그건 뭔 소리예요?
***
재준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가 전격적으로 90일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거기에 더해 루블화를 절하해 버렸다.
그럼 어떻게 될까?
은행이란 족속들은 자기 돈이 없는 기업이다.
다 남의 돈으로 돈놀이한다고 봐야 한다.
대규모 자금이 남미와 동남아 금융위기로 빠져나가 있는 상태에서 러시아에도 나머지 자금이 투자된 상황이었다.
금리 50%짜리 채권인데 투자를 안 하면 바보라는 인식이 팽배했으니까.
가장 안전제일주의를 추구하는 그 JP스탠리도 2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충격적인 뉴스가 나가자 은행에 돈을 빌려준 예금주들이 돈을 내놓으라 난리 쳤다.
여기서 예금주는 일반인보다 기업의 수가 더 많다.
은행에 돈이 없다?
평상시라면 다른 은행에서 빌리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 전역에 있는 은행이 전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서로 돈을 빌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미국의 월가가 세계 금융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고 했다.
그럼, 미국 다음은? 남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남미와 엮여있는 유럽, 다음으로 아프리카.
전 세계가 겨우 400억 달러에 시름시름 병이 들어갔다.
이런 거 보면 미국도 선진금융이라면서 학습효과가 없나 봐.
2008년에 똑같은 꼴을 당하고 2010년에도 또 당하고.
어쨌든.
은행은 급하게 러시아에 투자한 투자사에 마진 콜을 눌렀다.
마진 콜이 발동되면 투자사는 빌린 돈을 조기에 갚거나 담보를 늘려야 한다.
투자사 중 헤지펀드도 다수 있었는데 이들에게 담보가 있을 리 없다.
마진 콜에 놀란 헤지펀드가 돈을 갚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시장에 내다 던졌다.
연쇄적으로 주식시장이 폭락하며 손실액이 점점 불어났다.
시장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미국 정부는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왜? 신자유주의 정책이니까.
너희들끼리 지지고 볶고 다 해 보라고.
아마 팝콘과 콜라도 옆에 있었을걸?
사실은 약간, 아니 많이 방치한 면이 있다.
미국의 금융은 정부가 손을 댈 수 없는 독립체였기에 이번에 크게 혼나면 정부에 구해달라고 손을 내밀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그걸 빌미로 슬쩍 구제금융으로 정부 발아래 두고 싶었던 게 아닐까?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
그랜드월 본사 회장실.
뱅크오브에이스의 대표 오웬은 그랜드월 대표 존과 마주 앉아 있었다.
둘 다 70이 넘은 나이지만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지금은 두 눈이 퀭하게 들어가 90은 넘어 보였다.
뱅크오브에이스는 가뜩이나 캘리포니아 전력회사 경영난으로 재정이 심각한 수준인데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으로 투자한 40억 달러가 전부 날아가게 생겼다.
빌어먹을 깡패 러시아.
러시아가 90일이라고 말했지만,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절대 90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다시 미국 은행들이 러시아에 투자하지 않는 한 러시아가 갑자기 어디서 달러가 생겨날 리 없었다.
“존, 40억 달러가 필요하네.”
“40억 달러는 너무 많은 금액인데.”
존과 오웬은 15년 동안 여러 일을 도모해온 절친.
하지만,
“오웬, 그냥은 도와줄 수 없네. 40억 달러를 다 만들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고.”
철저히 사업적인 절친은 이럴 때 전혀 필요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친구가 안 된다면 대주주는 어떨까?
“그냥 해 달라는 건 아니네. 뱅크오브에이스 주식을 넘기겠네.”
“뱅크오브에이스를 팔겠다는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