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죽어(1)
할아버지, 그렇게 너무 비관적 얼굴 하지 말아요.
주름이 배는 늘어났어요.
“걱정 마세요. 이제 곧 미국에 금융위기가 닥치면 쉽게 인수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금융위기가 온다는 것이냐?”
“정확히 러시아가 미국에 빌린 돈을 안 갚을 겁니다.”
“그런 징조가 보인단 말이지? 아직은 아니고.”
아, 너무 자신 있게 말했나.
“네, 스톡체인에 쌓여있는 돈을 쓸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겠지. 다녀오너라.”
“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아주 오래 있다 와도 된다.”
왜 내가 미국을 간다니까 할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것처럼 보이지?
하여튼,
1998년 8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
러시아 파산은 우리나라 외환위기는 아주 다르다.
왜? 러시아에 뉴욕 월가가 채권을 잔뜩 투자했으니까.
사실 이건 월가 스스로 자충수를 둔 것과 같다.
욕심을 부려도 너무 부리니까 러시아가 뿔이 났다.
처음에 자금이 궁한 러시아 정부에게 월가 은행들이 수십억 달러의 돈을 빌려주었다.
담보도 없이 빌려주고, 농업채권도 발행해 주고, 러시아 국채 발행도 도와주고.
돈 벌 욕심에 정말 열심히 도와주었다.
시베리아로 가는 비행기 일등석은 전 세계 은행가 사람들로 꽉 찼고, 28개의 러시아 기업을 뉴욕증권거래소에 경쟁적으로 상장도 시켜주었다.
은행마다 러시아 채권을 발행해 주었는데 10억 달러는 기본이고 100억 달러를 넘기는 은행들이 속출했다.
그런데,
뉴욕 월가가 생각 이상으로 러시아를 과대평가한 거야.
돈을 빌려주고 나니 웬걸, 러시아인에게 신용이란 게 익숙할 리 없잖아.
월가도 ‘설마 신용을 모를까’ 하고 가르칠 생각도 안 한 거지.
하지만 곧 러시아의 민낯이 드러났다.
딱 자리 잡은 부패 구조.
불성실한 부채 상환.
이러니 월가가 열 받아 안 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월가의 은행들이 러시아 채권 가격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100달러짜리 채권을 80달러로. 그리고 50달러로.
이러니 러시아는 어떡해?
100달러가 필요한데 50달러밖에 안 주잖아.
그러니 그냥 채권을 마구 발행해댄 거지.
야, 너무 많이 발행했어.
어느 정도 후려친 채권으로 배가 부른 월가는 러시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떠나면서 달러도 챙겨 가는 바람에 러시아 시장에는 달러가 사라지며 빚만 남았다.
나 달러 없어.
루불화 절하할 거야.
이렇게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
바로 이 시국에 내가 미국을 가고 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 직전에.
그나저나 퍼스트 클래스 편하고 좋네.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를 타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저기요.”
재준은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네.”
상냥한 승무원이 재준에게 다가왔다.
재준은 주문했다.
“라면 하나 끓여주세요.”
“네?”
“라면. 달걀 풀어서.”
***
재준은 텍사스 오스틴 시내에 있는 비즈니스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서둘렀다.
박민수는 그렇다 치고 강호석을 만나기 전에 선물을 사야 했다.
얼마 전 강호석의 가족 전체가 텍사스로 이주했다.
“그나저나 사람 보낸다 했는데, 어디 있는 거야?”
설마 저 사람?
공항 출입구 앞에서 뜻 모를 한글로 삐뚤빼뚤 쓴 종이를 들고 서 있는 저 거구의 남자.
거참!
한글이라도 똑바로 쓰던가 ‘밍대둔’이 뭐야?
“헤이, 내가 임재준입니다.”
“오우,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임 대표님을 경호할 폴입니다.”
아, 경호원이었구나.
어쩐지 덩치가 남다르다 했어.
재준은 경호원인 사내와 인사를 나눈 후, 자동차를 타고 도심 중심가로 향했다.
재준의 즐거운 마음을 아는듯 창밖으로 보이는 오스틴의 풍경은 여정의 피로를 날려버릴 만큼 싱그러웠다.
텍사스의 수도 오스틴.
앞으로 첨단 미래도시로 거듭나는 곳이다.
재준이 텍사스를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도시의 청결함이었다. 한국 도시의 삭막함과는 달리 자연의 경치를 맘껏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TV 여행 프로에서 봤거든.
도심 곳곳에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안락함 때문인지 오스틴은 범죄율이 낮다고 했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도시.
동화에서나 볼 법한 아기자기한 건축물과 맑은 하늘.
실제로 보니 괜찮은데.
나도 이곳에서 살까.
투자는 여유 있고, 안정적으로 해야 한다.
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곳에서는 사람의 생각도 막히게 되는 법이다.
네모난 공간에선 네모난 생각만 하게 되니까.
네모난 공간에서 경직된 사고가 잘못된 정보를 걸러내질 못하면, 그 정보에 기생하며 스스로의 양분을 빨아먹는 줄도 모른 채 시들어 간다.
오스틴은 도시 중심부로 콜로라도강이 흐르고 울창한 나무숲, 산, 구릉과 언덕, 호수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텍사스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정이 가는 살기 좋은 도시 오스틴.
“오스틴은 어떻습니까, 대표님?”
좋네요.
재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시작한 폴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의 과거가 썩 궁금하지도 않은데.
왜 군대에 갔으며, 왜 특수작전을 다녔는지 등등.
시끄러웠지만, 자신의 경호를 맡을 사람의 실력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재준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유로운 사람들.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멋진 건물들.
자동차에서 내려 아스팔트를 밟는 순간, 설렘과 긴장감이 뒤섞였다.
재벌인데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분위기 있는 카페들 사이에 아담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구나.
건물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자, 풀이 옆으로 붙었다.
겉과는 달리 건물 내부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고, 곳곳에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명품 숍.
그곳엔 자신의 존재를 과하지 않게 드러내는 명품들이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명품이네. 이름값을 하는구나.
재준은 5층으로 된 건물을 돌아보며 박민수와 강호석에게 줄 선물을 고른 후 건물을 빠져나왔다.
“폴, 갑시다.”
“네.”
자동차로 20여 분을 달리자 강호석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때마침 석양이 광활한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
“임 대표.”
저 배경에 저 사람은 좀 안 어울리네.
집 앞에 마중 나온 강호석이 손을 흔들며 재준을 맞이했다.
강호석의 집에 하루 머무르기로 했기에 폴은 내일 다시 나오라고 돌려보냈다.
두둑한 팁과 함께.
하루 같이 다니다 보니 듬직한 게 맘에 들었다.
“강 선배. 잘 지내신 것 같은데요?”
“이야, 임 대표. 좀 달라 보이는데.”
“달라진 건 선배잖아요. 그 옷부터.”
강호석은 야자수가 그려진 반 팔 난방에 보기에도 가벼운 진을 입고 있었다.
오스틴의 7월은 한국의 한여름 날씨와 비슷했다.
“여긴 365일 여름이야. 임 대표 온다고 해서 나름 차려입은 거야. 하하”
여유로운 강호석의 웃음.
오스틴의 공기가 그를 더 부드럽게 만들어 준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비슷한 옷차림의 박민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임 대표님, 어서 오세요.”
박민수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재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널널한가 보네요.”
“아니요, 아주 바쁩니다.”
“자, 자. 들어갑시다.”
강호석이 모두에게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집안으로 들어온 재준은 또 한 번 탄성을 질렀다.
와!
안도 좋은데.
자식들을 위해 새로 집을 장만했다더니.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단독주택이 즐비하고 텍사스 대학을 비롯한 다섯 개의 대학이 있어 교육환경 또한 좋은 곳.
공포 영화 팬들에게 텍사스 하면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영화가 떠오르겠지만, 여기는 평화 그 자체였다.
그 영화 텍사스 이미지를 왜 박살 낸 거야?
강호석은 죽 둘러보는 재준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임 대표, 깜짝 놀랐지?”
“집이 굉장하군요.”
“임 대표 말대로 대치동 아파트 사서, 월세 놓고, 나머지 돈으로 이 집 렌트 했어.”
“어? 저도 대치동 아파트 샀습니다.”
박민수가 손을 들며 으스대며 말했다.
“저 친구도 꼬드겼어?”
재준은 강호석을 보고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 집이 20년 후에 선배님과 박민수의 보물이 될 겁니다.’
“임 대표님, 저 하늘 봐요. 그냥 하늘이에요. 산이 보이지 않는 그냥 하늘. 이런 하늘 처음 보죠.”
“멋있네.”
“집집마다 잔디밭도 있는데. 무슨 앞마당이 한국 아파트 공원만 해요.”
“애들을 위해서도 좋겠네요.”
“저건 수영장.”
이런 제길. 진짜 심각하게 이민을 고려해야겠는걸.
“여보, 손님 도착했어.”
강호석이 큰 소리로 부르자, 강호석의 아내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나왔다.
재준이 온다는 소식에 야외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준비 중이었다.
“오셨군요.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강호석의 아내가 밝게 웃었다.
“정말 듣던 대로 미남이시구나.”
“…….”
“이이가 얼마나 재준 씨 이야기를 하든지. 처음 뵙는 것 같지 않아요.”
“미인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미인요…?”
임재준 너 그런 말도 할 줄 아니?
재준의 말에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레했다.
“사람 볼 줄 아네. 우리 와이프가 미인이긴 하지.”
“어머, 이이 좀 봐.”
강호석 아내는 손사래를 치며 주방으로 향했다.
“얘들아, 내려와서 인사해야지.”
강호석의 부름에 말괄량이처럼 와당탕 2층에서 뛰어 내려온 세 아이가 동시에 아빠 품에 와락 안겼다.
“다쳐, 조심해야지.”
괜히 좋아 보이네.
한국을 떠나 왔고, 노을이 아름답고, 그 배경에 가족들이 있고.
그래서 그런지 사소한 일상에도 재준의 감성이 열렸다.
“다들 갑시다.”
모두 야외 식탁에 둘러앉았다.
강호석이 바비큐 그릴 위에 다양한 고기와 소시지를 구워서 자리로 가져왔다.
그 맛에 감탄하며 엄지까지 치켜드는 박민수를 보며 강호석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후엔 비교적 평범한 대화들이 오갔다.
뭐 일방적으로 재준에 대한 것이었지만.
언제까지 있을 것이냐,
여자 친구가 있느냐,
잘생긴 삼촌 같이 살아요.
막내 아이가 박민수에게 빅 테디베어라며 그의 무릎에 앉아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준이 박민수를 쳐다보자, 박민수가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선물입니다.”
“그게 뭐야?”
강호석의 눈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커졌다.
“소주입니다. 비행기 타는데 두 병이 한계여서 더는 들고 오지 못했습니다.”
“임 대표, 센스 있는데.”
재준이 다시 가방에서 긴 상자를 꺼냈다.
“이게 진짜 선물입니다.”
강호석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발렌타인 30년? 이거 꽤 비쌀 텐데.”
강호석은 발렌타인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돈 쓰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럼 어디 마셔볼까?”
“아직입니다. 선배님.”
재준이 가방에서 포장된 상자를 강호석 아내에게 내밀었다.
강호석은 상표에 있는 영어를 읽었다.
“이건 뭐라고 읽는 거야? 로위스뷰통?”
“로이비통입니다.”
“디자인이 아주 심플하네. V잔가?”
강호석 아내도 처음 보는 상표라며 신기한 듯 쳐다보며 좋아했다.
“네, 이렇게 작은 가방이 필요했는데. 아주 맘에 들어요.”
“그럼 다음 선물.”
“또?”
“이번엔 공주님들 머리띠입니다.”
“펠라가모? 이렇게 읽는 거 맞아?”
“페레가모입니다. 요즘 유학 다녀온 집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머리띠입니다.”
계속되는 선물 공세에 강호석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있습니다.”
재준은 강호석과 박민수에게 한 개씩 주었다.
“선글라스?”
“네. 그것도 페레가모라고. 한 자리 차지하시는 사장님들이 쓰시는 겁니다. 텍사스 태양이 뜨겁다고 해서 샀습니다.”
강호석이 재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임 대표. 근데 이름들이 다 생소해.”
미국 온 지가 얼만데 아직도 명품을 몰라보다니.
“아주 비싼 겁니다. 나중에 가격표 보고 기절하지 마시고요.”
“이거 참.”
“자, 끝났습니다. 이제 술이나 한잔하시죠.”
하하하.
이후에도 강호석의 잔소리과 박민수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이 시대로 온 뒤로 나만 이 시대에 적응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이들을 나한테 적응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오늘은 술이나 왕창 먹는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전쟁을 앞뒀으니 마지막 만찬으로 이 정도는 괜찮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