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보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게(5)
이태준 사장은 전화를 끊고 깊은 시름에 빠졌다.
검찰에 불려갔을 때 뭐라고 해야 할까…….
주가 조작이 아니라 계열사가 자금 운용 차원에서 주식투자를 했다?
단순히 주가를 관리한 것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유상증자 신주 배정 기준일 직전에 30% 주가를 띄우는 것은 기업 간의 관행이다.
그리고 보유 주식은 장기 보유할 것이라 말하면 된다.
그래, 이 정도는 그리 큰 문제로 번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불편해.
왜 내가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지?
정작 책임져야 할 민 사장은 멀쩡한데.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받을 기분이 아니라 받지 않고 전화기를 쳐다보기만 했다.
전화벨이 끊기자 곧이어 비서가 놀란 눈으로 들어왔다.
“모던전자에 문제가 생겼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엔 모던전자야?
“내가 따로 전화할 테니 나가서 일 봐.”
이태준 사장은 모던전자 정한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사장, 어쩐 일로 전화를 하셨습니까?”
-이 사장. 2,000억이 들어왔어요.
“뭐라고요?”
임재준, 이 미친놈.
침착하기로 소문난 이태준 사장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무슨 생각인 거냐?
분명 대출은 힘들 거라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
아니, 지금 은행에 도착도 안 했을 시간인데.
“언제 들어 온 겁니까?”
-방금이요.
“연락도 없었습니까?”
-그러게요. 대출을 이런 식으로 하는 은행이 어딨습니까? 모던증권의 지급보증각서는 받으셨습니까?
“네, 방금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지급한 것인가요? 도대체 어떻게 일을 이렇게 처리하는지, 원.
이태준 사장은 재준의 그 떠나기 전의 미소가 떠올랐다.
독이구나.
이 돈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주가를 띄우려고 받은 대출인데 정작 주식을 살 수가 없다니.
방금 금감원이 다녀갔으니.
여기서 더 주식에 손을 댔다가는 주가 조작을 시인하는 꼴이 된다.
“정 사장, 나중에 다시 통화합시다.”
-그럽시다.
저 돈은 돌려보내야 한다.
이때,
띠리리링.
핸드폰이 울렸다.
모던증권 민승재 사장?
여긴 또 무슨 일이지?
“민 사장, 무슨 일입니까?”
-큰일입니다. 현재증권에서 모던전자가 과대평가 되었다는 애널리스트 자료가 나왔습니다. 모던전자 주가가 떨어지고 있어요. 투마로우뱅크에선 다녀갔습니까?
이…… 개 같은 경우가.
-이 사장님. 왜 말이 없으세요?
“다녀갔습니다.”
-지급보증각서를 받으셨습니까?
“네,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 대출이 나오겠군요. 제가 모던전자에 전화를 해 보겠습니다.
“민 사장. 잠시만…… 기다려 봐요.”
-무슨 일입니까?
“우리와 모던상선이 금감원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주가 조작이 들통났습니다.”
-금감원 조사를 받았다고요? 그럴 리가요?
“아주 상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주 상세히.”
상세히?
이태준 사장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서 정신이 번뜩 났다.
설마 민승재 너, 자료를 넘긴 건 아니겠지?
이태준 사장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민 사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 사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모던전자에 일단 연락을 취하고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투…….
단일한 음이 귓가에 맴돌고 이태준 사장은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X발.
민승재 이 개X끼.
자기 살겠다고 날 엿 먹여.
아니야, 아니야. 정신 차리자.
민 사장이 그럴 리가 없지.
그래, 우리가 얼마나 오래된 사인데.
이태준은 뒷목이 뻐근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때,
띠리리링.
핸드폰이 울렸다.
“또 누구야?”
이태준 사장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들었다.
임재준?
이 자식이.
“접니다. 무슨 일입니까?”
-돈은 잘 받으셨나 봐요?
“전화 잘했습니다. 애널리스트 보고서 해명을 들어야겠는데요.”
-애널리스트 보고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건 증권사 고유업무 중 하나입니다.
“이봐요, 증권사는 매도 의견의 리포트를 발간하지 않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기업에 잘 보이려고 보고서를 만들지 않습니다. 소신있는 리포트가 저희 현재증권의 자랑이거든요.
후.
씨알도 먹히지 않는 놈.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전화한 겁니까?”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불법적인 일에 저희 대출금을 사용하지 말라고. 근데 벌써 나쁜 짓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경고하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건방진…… 경고? 감히 누구한테…….”
-화부터 내지 마시고 모던전자 주가를 보세요. 누가 막 사들이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군지 아시겠지만, 이거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아서 전화 드린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끊습니다.”
이태준은 전화기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쾅! 쾅! 쾅! 전화기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민승재, 이 개X끼.”
그사이를 못 참고 모던전자를 닦달하여 주식을 매집하다니.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지금까지 쌓아온 친분이 뭐라고.
그렇게 나오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대로 지켜보고 있으면 자신은 검찰 조사를 받는다.
주가는 떨어질 것이고 자신의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되겠지.
왜.
조금만 서로 대화를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자신만 살자고 모두를 죽이려 들다니.
민 사장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먼저 친다.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한 이태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네, 대검차장님. 이태준입니다.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금감원 원장실.
TV에서 긴급 속보와 함께 모던증권 민승재 사장이 초췌한 모습으로 검찰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어제 오전 모던전자의 주가 조작 협의를 받고 있던 모던증권의 민승재 사장이 검찰에 출두한 후 꼬박 하루 동안 조사를 받고 지금 막 나오고 있습니다.]
픽.
TV가 꺼지고 윤 원장이 쌍심지를 켜고 부원장들을 쳐다봤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후.
수석부원장이 깊게 숨을 내뱉고 입을 뗐다.
“모던중공업 이태준 사장이 검찰에 자진 출두하면서 주가 조작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윤 원장이 한심하다는 듯 수석부원장을 쳐다봤다.
“내가 이미 대통령님에게 모던증권은 빼고 보고했는데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신 겁니까? 차라리 보고 전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모던중공업이 이럴 줄 알았겠습니까?
모두 할 말은 많지만,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입을 닫고 버텼다.
“모던증권 조사하세요.”
“그건 이미 검찰이 조사 중이라…….”
“사람들이 금감원을 어떻게……. 아니, 그보다 대통령님이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수석부원장이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
“수석부원장님. 당신은 보험 담당입니다. 물러나긴 어딜 물러납니까?”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자본시장과 회계를 담당하는 부원장이 나섰다.
“아니, 물러나는 게 해결책이 아니란 말입니다. 답답하네요.”
소비자보호처 처장이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이번 사건을 조사했던 국태희 팀장이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쯧쯧.
윤 원장이 그냥 조용히 입 닫고 있으라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처장은 말을 이었다.
“조사하러 갔던 모던중공업에서 임재준을 봤답니다.”
윤 원장이 처장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임재준이요?”
“네, 투마로우뱅크가 모던전자에 2,000억을 대출해준다고 말했다더군요.”
“뭐라고요? 금감원 승인도 없이 2,000억이나 대출을 해줬다고요?”
“그게, 투마로우뱅크는 외국계 은행이라 저희 관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허.
“그렇다고 칩시다. 이제부터 투마로우뱅크에 대출받은 업체들 전부 알아보세요.”
“그리고…….”
“또 뭐가 있습니까?”
“모던증권은 왜 주가 조작에서 제외했냐며 따졌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사실입니까?”
“네. 국태희 팀장이 직접 그렇게 말했습니다. 불러서 확인해 보셔도 되고요.”
윤 원장은 입을 모로 세우고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임재준, 또 너냐.
왜 이렇게 걸리적거리는 거지?
그럼, 이태준 사장을 움직인 것도 너란 소린데.
그 바위 같은 인물을 어떻게 흔들었을까.
이때,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링.
원장실에 있는 모든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검찰이 기자회견을 한다고 합니다.”
“원장님, 현재증권이 기자회견을 한답니다.”
“투마로우뱅크도 기자회견을 한답니다.”
TV가 켜지고 지켜보는 윤 원장의 이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들이 일부러 동시에 기자회견을…….
장운증권을 몰아붙일 때와 똑같은 진행이었다.
여론몰이와 검찰 수사의 병행.
내가 써먹던 수법을 검찰이…….
검찰…….
대충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번 검찰 수사를 맡은 임진묵 지검장이 발표했다.
[이번 사건은 대통령님의 엄중한 수사 지시가 있었으므로 지위를 막론하고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입니다. 우선 주가 조작의 시작은…….]
검찰의 발표가 끝나고 채널을 돌리자 화면에 현재증권의 서형길 실장이 기자회견 단상에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 현재증권은 이 시간부로 인덱스 펀드에서 모던전자, 모던중공업, 모던상선을 제외할 것입니다. 이는 현재증권의 투자 철학에 엄격히 위배되는 사항이므로 전격적으로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시장의 충격에 대비하여 모던 그룹에 매수 우선권을 드릴 것입니다. 아무쪼록 시장에 우려를 끼치게 된 점 죄송할 따름입니다. 향후 시장의 변화를 지켜보며 다시 편입을 고려하겠습니다.]
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서형길 실장은 차분히 대응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 다른 채널에서 투뱅코의 영업부장이 나와 단상에 섰다.
[투마로우뱅크코리아는 모던전자에 행했던 대출의 조기 회수에 나설 것입니다. 이에 대한 소송을 준비 중에 있으며…….]
그리고,
띠리리링.
울리지 말아야 할 전화벨이 울렸다.
윤 원장의 업무용 전화 반대편에 있는 대통령 직통 전화였다.
윤 원장의 미간이 확 찌그러졌다.
정말 미치겠다.
“네, 대통령님. 윤헌재입니다.”
-에, 지금 내 앞에 보고서가 하나 있는데, 금감원에서 모던증권을 제외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분명 보고했는데 딴소리를…….
주변에 누군가 있구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들어가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에, 겨우 모디스가 한국 장기신용등급 전망을 상향 조정했는데, 다시 내려앉을 수 있습니다.
IMF 사람들이구나.
“아닙니다. 그렇게 나쁘게 볼 일도 아닙니다.”
-에,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이 기회에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할 수 있고 5대 그룹도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시킬 수 있습니다.”
-에, 그건 그러네요. 그렇게 밀고 나갈 수도 있겠어요. 그러나 지금 국민의 원성이 아주 높아요. 이것부터 잠재워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에, 그건 당연한 거고 다른 거 없습니까?
“…….”
대통령, 이 개X끼.
***
윤 원장의 마지막 발악이었을까.
금감위는 55개나 되는 기업을 퇴출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5개 시중은행을 폐쇄하고 조건부 승인은행을 발표했다.
외환매입제한을 폐지하고 예금자보호법을 시행했다.
그리고 모던증권의 주가 조작사태를 책임지고 윤헌재 원장이 사임했다.
결국 ‘겟코리아펀드’는 출시되지 못했고, 모던증권은 매각에 초점이 잡혔다.
“저, 미국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라는 표정의 임병달이 재준을 바라보았다.
“이제 미국 가서 깽판 치려고?”
“아닙니다. 은행 인수하러 가는 겁니다.”
“무슨 은행?”
“뱅크 오브 에이스요.”
“뭐? BOA를?”
드디어 내 손자가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