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보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게(4)
일주일 후 조사 60분에서 지금까지 방영한 프로 중에 가장 무서운 편이 방송을 탔다.
재준은 방송을 보면서 소름이 확 끼쳤다.
오우, 저렇게까지…….
완전 공포영화 저리 가라인데.
이제 슬슬 모던중공업으로 가봐야겠네.
***
모던중공업 사옥 앞.
재준은 이태준 사장을 만나기 전에 한 통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띠리리링.
“네, 천 실장님.”
-
“알겠습니다.”
금감원 국태희 팀장이 10분 후에 도착한단 말이지.
그럼, 대충 밑밥을 깔아 놓고 기다리면 되겠네.
잠시 후.
재준은 사장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어서 오세요. 변호사를 시켜도 되는데 뭐하러 힘들게 오셨습니까?”
“저도 모던중공업 사장실 좀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자, 이리 앉으세요.”
이태준 모던중공업 사장.
업계에서는 과묵하고 뚝심 있기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며 일을 시작하면 무식할 정도로 몰아붙이는 스타일로 알려졌다.
모던증권의 민 사장과 함께 모던 그룹 왕 회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재준은 앉자마자 모던증권의 지급보증각서와 공증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태준 사장은 지급보증각서를 유심히 보며 작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재준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봤구만, 봤어. 어제 조사 60분 봤어.
“생각보다 좀 늦었습니다.”
“꼼꼼하게 살피느라고요.”
금감원이 빨리 안 움직이니 내가 시간을 좀 끌 수밖에.
하여튼 게을러터져서는.
이태준 사장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준은 슬쩍 시계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차 한 잔 주십시오.”
“이런, 미안합니다.”
차가 나올 동안 재준은 슬쩍 이태준 사장을 떠봤다.
“근데 모던전자 주식을 왜 사들이는 겁니까? 자사주 매입이라 하기엔 꽤 큰돈인데.”
이태준 사장은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말했다.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야 도와 달라니까 도와줄 뿐이지만.”
“그렇군요. 어쨌든 제가 은행에 가면 바로 입금 처리하겠습니다.”
“수고 좀 해주십시오.”
이태준 사장은 재준에게 깍듯하게 예를 차리면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 보통은 아니구나.
그럼 흔들어 드려야지.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재준이 일어나는 척하면서,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근데, 이사회 결의가 없는 지급보증각서가 업무상 배임이라는데. 모던증권이 이사회 결의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럽니까? 아닙니다.”
재준이 짐짓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닌데……. 어제 분명 조사 60분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재준이 혼잣말로 작게, 그러나 이태준 사장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중얼거렸다.
조사 60분이란 말에 이태준 사장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재준은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사장님, 제가 맘에 걸려서 그러는데 이사회 결의 하고 가죠. 저야 상관없는데 나중에 문제가 생겨서 모던증권 사장님이 오리발을 내밀면 어쩌시려고요.”
이태준 사장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재준이 ‘그게 안전하지 않나요’라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이태준 사장도 잠시 고민이 되는지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지 걱정이 안 되면 사람이 아니지.
자그마치 2,000억을 독박 쓸 수도 있는데.
“모던 그룹을 얕보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일어서서 나가려던 재준은 한 번 더 멈춰 서며 정말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근데 혹시 주가 조작 하는 건 아니죠? 투마로우뱅크가 클린한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불법적인 일에는 대출을 안 해주거든요.”
“걱정 마세요. 아닐 겁니다.”
“네. 네.”
부러 작게 한숨을 쉬는 재준.
“주가 조작에 업무상 배임이면 검찰도 그냥은 못 넘어갈 텐데. 한 10년 정도 살려나.”
재준이 또다시 혼자 중얼거렸지만, 이태준 사장 귀에는 선명히 들렸다.
험, 험.
이태준 사장이 기분이 언짢은 듯 헛기침하며 일어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이번에야말로 재준이 나가려는 순간 비서가 들어왔다.
“금감원 국태희 팀장이 왔습니다.”
“금감원?”
“금감원이요?”
재준은 이태준 사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심각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아직은 제가 갈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 일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니요. 제가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분명히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저희는 불법적인 일에 대출하지 않는다고.”
이태준 사장도 금감원에서 왜 찾아 왔는지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금감원이 왔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라 생각했다.
하나는 모던중공업의 대출 비율이 금감원이 정한 200%를 넘었을 경우.
하지만 이건 중공업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정부도 인정한 부분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주가 조작.
아니야. 철저하게 했다고 했어.
그러면 금감원이 온 것은 대출 비율이다.
“좋아요. 확인시켜 주겠습니다.”
비서에게 들여보내라는 손짓을 했다.
금감원의 국태희 팀장이 사장실로 들어서며 이태준 사장과 재준을 날카롭게 살폈다.
“어서 오세요. 금감원이 저희에게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모던전자 주가 조작 정황이 포착되어서 조사하러 왔습니다.”
이태준 사장이 표정을 급하게 굳혔다.
최대한 속내를 보이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조사 단계니까.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 모던중공업이 주가 조작 같은 일을 했겠습니까? 그냥 몇 가지만 묻고 가겠습니다.”
국태희 팀장이 부드럽게 나오자 이태준 사장도 얼굴에 안도감이 감돌았다.
“자, 일단 앉으세요.”
재준은 이태준 사장에게 자신은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둘이 이야기해.
옆에서 다 들어 줄 테니까.
재준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며 미소를 잃지 않는 국태희 팀장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사람도 선수네.
국태희 팀장이 편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세한 건 담당자를 호출해서 물어볼 겁니다. 사장님은 대략적인 것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물어보세요.”
“모던 그룹 계열사가 모던전자 주식을 매매한 건 총 9만여 건입니다. 이 중 8만여 건이 모던중공업에서 발생했는데 아십니까?”
“모르는 일입니다.”
“네, 사장님은 모르시는군요. 모른다.”
국태희 팀장은 질문한 내용 옆에 작게 ‘모른다’라고 적었다.
“그럼, 모던상선과 주식거래가 활발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편법으로서, 모던증권이 관리하는 계좌 내에서 서로 맞는 가격과 물량을 짜 맞춰 놓고 그에 따른 매수와 매도 주문을 낸 통정매매는 아십니까?”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 그럼, 총 3천6백여 차례 주식 매매를 한 것도 모르시겠고요.”
“내가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을 일일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요.”
“모른다. 네, 그럼 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낮은 가격에 수만 주씩 대량 매수 주문을 내서 일반 투자자들이 보면 마치 매수가 활발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 시초가 형성을 위한 동시호가 때는 금액이 공개되지 않고 잔량만 나타나는 점을 이용해 마음껏 주문한 것 또한 당연히 모르시겠네요.”
“모르는 일입니다.”
와, 저게 무슨 대략적인 질문이야.
아주 탈탈 털어서 조사한 것 같은데.
“모른다. 알겠습니다. 다 되었습니다. 이만 저는 가보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다야?
재준은 국채희 팀장이 서둘러 일어서는 모습에 황당했다.
어허, 그냥 가면 안 되지.
제일 중요한 상황이 빠졌는데.
“잠깐만요.”
국태희 팀장이 일어서려 하자 재준이 손을 뻗어 잠시 멈추게 했다.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이태준 사장은 재준을 보며 인상을 썼다.
“회사 일입니다. 나서지 마세요.”
“아, 죄송합니다. 옆에서 듣다 보니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요. 왜 모던증권은 주가 조작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해서요.”
재준의 말에 이태준 사장이 ‘그러고 보니 왜?’란 표정으로 국태희 팀장을 봤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조사 중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에헤이, 조사 중은 무슨. 이미 다 말해 놓고. 통정거래가 모던중공업과 모던상선만 했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9만 건 중 8만 건이 모던중공업에서 발생했으면 모던상선과 모던증권은 겨우 만 건이라는 소린데. 통정거래 빼면 모던증권은 주가 조작에 가담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빼신 거죠?”
국태희 팀장은 재준을 매섭게 노려봤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남의 일 아닌데.”
“남의 일입니다.”
“거참, 금감원은 일하는 태도가 정말 불량하네.”
“뭐요?”
“그렇잖아요. 지금 내가 여기 왜 있겠어요? 모던중공업과 일이 있으니까 있는 거 아닙니까? 이게 왜 남의 일입니까, 분명한 내 일이지. 지금 2,000억을 대출이 걸린 문제인데. 왜 맘대로 남의 일이네 마네 판단을 하는 겁니까?”
“누가 금감원 허락 없이 그런 큰돈을 대출하라 했습니까?”
“어라, 이거 정말 웃기는 사람이네. 허락을 받으라고? 아니 내 돈을 내가 대출해주겠다는데 금감원이 왜 튀어나와요? 이거 열심히 살아보는 건실한 은행을 겁주네.”
국태희 팀장은 재준을 노려봤다.
“당신 알고 있습니다. 임재준 맞죠?”
“참나, 이제 유명인이 다 되었다니까. 어디 사인이라도 해 드릴까?”
“우리가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거 관심받으니까 어깨에 뽕 들어가겠네. 고맙습니다. 지대한 관심.”
국태희 팀장은 더는 말하지 않고 이태준 사장에게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사장실을 나가버렸다.
입술을 꽉 다문 이태준 사장이 재준을 쳐다봤다.
“알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보셨잖아요. 저도 처음 듣는 소립니다. 그나저나 사장님. 대출은 제가 돌아가서 행장님과 상의한 후 처리하겠습니다. 근데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기 힘들겠네요.”
이태준 사장은 차라리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재준은 이태준 사장을 보며 빙글 웃어 보였다.
재준은 사장실 문을 나서며 핸드폰을 꺼냈다.
“네, 행장님. 잘 처리되었고요. 지금 모던전자에 돈 보내십시오.”
-
“네, 걱정 마세요.”
자, 이제 윤 원장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려나.
***
모던중공업 이태준 사장은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증권거래소와 금감원을 너무 얕봤어.
모던증권 민승재 사장,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왜 모던증권은 빠졌냐 말이야.
이태준 사장은 전화기를 들어 모던상선 최인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사장, 접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방금 금감원에서 다녀갔어요. 우리 거래를 다 알고 있더군요.”
-아니, 뭐라고요?
“아마 그쪽도 찾아갈 겁니다.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허, 난감하게 됐군요.
“최 사장, 그런데 모던증권은 이번 조사 대상에서 빠졌답니다.”
-뭐라고요? 이게 다 모던증권 살리겠다고 한 건데. 자기만 쏙 빠졌단 말입니까? 이런 못된 사람.
“우리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군요. 신의를 이렇게 저버리다니.
“아직은 단정하지 마세요. 모던증권은 증권사라 증거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금감원이 저희를 검찰에 넘길 거 아닙니까. 우린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요. 차라리 모던증권이 무너지게 놔두고 윗선에서 처리했으면 공적자금이라도 투입됐을 텐데.
“그럼 민승재 사장이 물러나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나선 거 아닙니까?”
-민 사장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이 사장은 그 사람과 친할지 몰라도 전 아닙니다. 전 이대로 당하지 않을 겁니다. 죗값을 받아야 할 사람은 민 사장이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