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보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게(3)
채권 파킹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A 브로커가 C 펀드에게 채권을 사서 B 펀드에게 보관을 부탁한다.
그리고 C에게 말한다.
“내가 산 채권 B에게 맡겨 놨으니 돈은 나중에 줄게.”
B의 투자 장부에는 B가 C에게 직접 산 것으로 기재가 되고 A의 장부에는 아무런 매매기록이 남지 않는다.
A는 안 산 척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다.
A 회사에서는 A의 거래를 알지 못한다.
A와 B의 거래는 양자의 구두 계약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한 날짜에 A 브로커가 B 펀드에게서 약속한 금리로 채권을 되산다.
약속된 금리라는 게 중요한 거다.
나중에 금리가 오르든 내리든 처음 사기로 한 금리를 말하는 것이니까.
B는 채권을 맡아두는 대신, 수수료 명목으로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고 A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거액의 거래를 할 수 있다.
A의 기대대로 채권 가격이 상승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A의 예상과 달리 채권 가격이 떨어지면 A의 손실이 뒤늦게 장부에 반영된다.
장부에 반영된다는 게 뭐냐면 손실을 봤으니까 투자자의 돈으로 손실을 도로 채워서 막는 것이다.
2021년 채권 파킹은 업무상 배임 행위로 판결 났다.
돈이 급하구나.
이런 유치한 방법을 쓰는 걸 보니.
그럼, 장단을 맞추어 줘야지.
“그래요?”
“그래. 이제 내가 누군지 좀 알겠냐?”
“선배, 그럼 내가 보답으로 대출 좀 알선해 줄까요?”
“대출? 지금 일이억 대출로는…….”
“2,000억.”
“뭐?”
놀라는 거 보소.
덥석 물게 생겼네.
“투마로우뱅크 알죠?”
“알지. 맞아. 현재증권이 투마로우뱅크와 연관이 있지?”
“그렇죠.”
“대출 조건은?”
음.
“그러니까, 모던전자 주식 사려고 돈이 필요한 거죠?”
“그렇지.”
“그럼 모던전자가 대출을 받으면 더 쉽겠네요. 자사주 산다는 데 뭐라 그럴 사람이 없잖아요.”
“맞아.”
“근데……. 모던전자에 담보가 될 만한 게 있으려나.”
“부동산 어때?”
“에이, 그건 이미 저당 잡혀 있잖아요. 모던전자가 보유하는 주식 같은 거 없어요?”
“곤란해. 주식은 그룹 차원에서 관리하는 거라.”
민형기는 썩 내키지 않는 듯 입을 비쭉 내밀었다.
“잠깐 맡겨 놓았다가 다시 사 간다는 조항을 덧붙이면 되잖아요. 어때요? 그러면 투마로우뱅크가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고 돈은 돈대로 융통하고.”
“괜찮네. 그거 좋다.”
이번엔 재준이 못 미더운 표정을 했다.
“근데 모던전자가 돈을 안 갚으면 어떡하죠?”
“뭐?”
“요즘 반도체 설비 투자한다고 돈을 엄청 투자하던데.”
“설마 모던전자가 그러려고.”
“보증을 설 만한 친하신 분 없으세요?”
민형기의 머릿속에 모던중공업 이태준 사장이 번뜩 떠올렸다.
“있긴 한데. 내 선에서 처리하기가 좀 뭐한데.”
아버지에게 말하면 될지도 모르겠는데.
2,000억을 내가 주선했는데 설마 거절하려고.
“선배, 그러지 말고. 제가 모던증권으로 한번 찾아갈게요. 보증 설 분 찾으면 연락 주세요.”
“그래.”
민형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그래 지금은 맘껏 즐겨라.
곧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될 테니.
***
모던증권 사장실.
모던전자 정한두 사장과 모던중공업 이태준 사장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정 행장과 재준이 앉았다.
저 뒤로 모던증권 민 사장 아들 민형기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재준의 악명이야 워낙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사장들이라 인사할 때부터 재준의 말투를 크게 거슬려했다.
가운데에 자리한 모던증권 민승재 사장이 불편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호탕하게 톤을 높이며 회의를 중재했다.
“자, 자, 서로 원하는 걸 말해봅시다.”
모던전자 정 사장은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일을 이렇게까지 벌인 건 모던증권을 살리기 위한 것인데 자신이 대출까지 받아야 하니 심정이 좋을 리 없었다.
물론 주가가 올라서 모던전자 입장에선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모던투신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한다니 썩 내키지는 않았다.
이거 왕 회장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재준은 정 행장과 말을 주고받은 후 모던전자 정 사장에게 말했다.
“모던전자에서 보유한 모던투신 주식 1,300만 주를 담보로 2,000억을 대출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닙니다만, 모던투신의 주가가 떨어져서 나중에 대출금을 안 갚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모던투신 주식은 반드시 회수할 겁니다.”
정 사장이 정색하며 목소리 톤을 높여서 말했다.
뭐 이렇게 화를 내고 그래?
재준도 모던전자 정 사장의 말을 믿긴 했다.
모던투신은 대한민국 투자신탁계 1위이며 모던 그룹의 모든 계열사 주식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회사였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모던증권을 엮으려면 약간의 양념은 필요하지.
“세상일을 너무 단정하십니다. 모던 그룹에서야 모던투신이 중요하지만, 저희한테는 그렇게 중요한 가치가 없잖습니까. 저희가 모던 그룹을 인수할 것도 아닌데요. 안 그렇습니까?”
“인수라니?”
“그냥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럼 조건을 말해 보세요.”
“주가가 떨어져도 모던중공업이 저희가 가지고 있는 모던투신의 주식을 사겠다는 주식 환매청구권 계약이 필요합니다.”
주식 환매청구권은 대출하고 맡긴 주식을 정한 가격으로 꼭 다시 사 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보증만 서 달래서 왔는데 이런 계약을 꼭 해야 하는 겁니까?”
“만약을 대비해서입니다. 연대 보증은 배 째라고 나오면 서류 왔다 갔다 하고 변호사 비용 들어가고 귀찮습니다. 근데 꼭 약속을 안 지킬 분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 말이 아니요.”
보증보다야 권리를 계약으로 맺는 게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다.
권리란 곧바로 효력이 발생하고 지키지 않을 시 재산을 강제할 힘이 있다.
모던중공업 이태준 사장도 못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모던전자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사업가로서 당연히 의심을 해봐야 했다.
만약 모던전자가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바로 모던중공업에 권리를 요구할 것이고 불응 시에 압류가 들어올 것이다.
안 될 일이야.
아무리 같은 그룹이라도 자신이 맡은 기업을 안전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재준은 모던중공업 사장의 표정에서 불안함을 읽었다.
자, 그럼, 엮어 볼까.
재준이 모던증권 민승재 사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민 사장님. 이 모든 게 모던증권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닙니까, 힘을 보태셔야겠습니다.”
“내가 뭘 하면 됩니까?”
“모던중공업에 지급보증각서라도 써 주십시오. 지금 안 믿고 계십니다.”
지급보증각서라는 말에 민 사장이 흠칫 놀랐고,
험, 험.
모던중공업 이 사장이 헛기침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가?”
“솔직히……. 네, 솔직해졌으면 합니다. 이런 계약을 할 때는 다 까놓고 하는 게 좋습니다. 2,000억이 뭔 동네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왜 다들 속내를 숨기고 그러십니까?”
“뭐, 약간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재준의 말투가 미묘하게 거칠어지자 정 행장이 눈치를 줬다.
하지만 이를 눈치 못 챈 재준이 모던증권 민 사장에게 ‘뭐라도 하셔야죠’라는 표정으로 손으로 글을 쓰는 시늉을 했다.
“지급보증각서 하나 쓰십시오.”
민 사장이 곤란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건 이사회 결의를 거쳐야 하니 시간이…….”
허.
재준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들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쯥.
입맛을 다신 재준은 서류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재준의 행동에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민 사장이 서류를 정리하는 재준의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건가?”
“이사회 결의 하고 서류 다 되면 그때 투마로우뱅크로 오세요. 저희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 온 것도 아니고 일 처리가 너무 늦네요.”
서류 전부를 챙긴 재준은 정 행장에게 말했다.
“행장님 가시죠.”
“그러지. 할 일들이 많으신 것 같은데.”
재준이 일어서자 다들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설 수 있는 분위가 아니었다.
이때, 나가려다 말고 재준이 모던증권 민 사장을 향해 돌아섰다.
“아, 참. 민 사장님. 일단 고맙습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민 사장은 이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우리 현재증권이 투자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부분이 CEO의 자질인데요. 여기 모던전자 정 사장님을 뵈니 알겠습니다. 제가 현재증권으로 복귀하면 모던전자 주식을 싹 다 매도해 버릴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도 못 하시고. 믿음이 안 가네요. 과감한 투자네 선진 기술이네 해서 좀 보유했는데. 영.”
민 사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모던주식을 던진다고?
그럼 지금까지 애써온 게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귓가에서 모던전자 주식으로 겨우 버텨 오던 회사의 건정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기다리게.”
“왜요?”
“지급보증각서 쓰겠네.”
민 사장이 아들에게 눈치를 주자 민형기가 서류철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왔다.
[지급보증각서]
모던중공업이 매입하게 된 주식을 1년 이내에 모던증권이 책임지고 매각해주며 이번 계약과 관련해 손해가 날 경우엔 모던증권이 책임을 진다.
모던증권 대표 민승재.
“여기 있습니다. 이 사장님.”
민승재는 지급보증각서를 모던중공업 이태준 사장에게 건넸다.
“그쪽으로 주시면 안 되죠. 저한테 줘야 변호사에게 공증을 맡기죠. 공증 절차가 끝나면 제가 직접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장님 나중에 저랑 재밌는 이야기 좀 나눠야 할 겁니다.
민승재는 재준에게 서류를 넘겼다.
됐다.
재준이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이 당신의 발목을 죄일 때 비로소 족쇄임을 깨닫고 후회하겠지. 평생.
***
경제정책연구실.
재준은 서형길 실장과 회의실에서 독대하고 있었다.
서형길 실장은 재준이 무슨 말을 하나 은근히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다.
재준도 이에 호응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장님. 방송국에 아직 끈이 있습니까?”
“아유, 아직이라니요. 든든하게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저번에 카메라 부숴 먹어서…….”
흠, 흠.
서형길은 마른기침을 한 후,
“그 후에 더 돈독해졌습니다. 하하하.”
“그럼 방송 하나 내보내 주세요.”
“또 토론 프롭니까?”
“아니요. ‘조사 60분’이란 프로 아시죠.”
“알지요. 아주 자~알 알지요.”
도련님 사고 친 거 모아서 ‘망나니 재벌의 실체’라는 에피소드를 만든다고 했을 때 제가 얼마나 약을 쳤는지 아십니까?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먹던 양주가 올라올 것 같습니다.
재준은 신뢰가 담뿍 담긴 표정으로 서형길 실장에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또 나가려는 건 아니고, 제보 하나 하려고요. 자, 가까이 와 보세요.”
“네.”
재준은 방송에 나갈 이야기를 서형길에게 자세히 해주었다.
“그러니까 도련님 말씀은 ‘조사 60분’에 지급보증에 대한 방송을 내보내란 말씀이시죠?”
“맞아요. 아주 적나라하고 속속들이, 보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게 파헤쳐 달라고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제작비는 저희가 댄다고 하고, 아니, 방송 나가면 수고비도 두둑이 준다고 하세요.”
“그렇게나요?”
“2주 안에 제작팀 모두 달려들어서 빠르고 정확하게…… 아니야, 그럴 게 아니라 아예 일주일 안에 방송 나가면 일 인당 천만 원씩 팍팍. 물론 실장님에게도 보너스를 듬뿍. 알겠죠.”
헐.
“네, 뭐. 도련님의 의지가 이토록 강렬하니 제가 당장 가서 성사시키겠습니다.”
“네. 수고해 주십시오. 서 실장님.”
“네, 그럼.”
서형길 실장은 단거리 선수라도 되는 것처럼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회의실에서 나온 재준은 지친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멀쩡한 동기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펀드 연구 이후 편안하게 쉬었더니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구나.
이럼, 안 되지. 내가 얼마나 뛰어다니고 있는데.
“자, 여러분.”
재준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는 동기들은 바쁜 척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 안 들어도 상관없고.
“재우 그룹 텁니다.”
동기들의 고개가 일제히 재준을 향해 급격하게 돌아섰다.
뭐?
네?
미친?
돌았냐?
저런 쌍놈의 새끼.
마지막 누구냐?
사무보조원 너 많이 컸다.
사무보조원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두 손으로 입을 감쌌다.
“이제 곧 실행에 옮길 테니, 그때까지 재우 그룹을 완전히 분해합시다. 속속들이 아주 적나라하게. 전 이만 투뱅코로 갑니다.”
가든가 말든가, 아니 제발 들어오지 않기를 동기들은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