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소신껏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5)
정 행장이 옆에 놓인 잡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회장님, 금 모으기 운동에 대한 인터뷰도 잘 읽었습니다.”
“그게 무슨 인터뷰야! 재준이가 적어준 거 잡지사에 전달해준 것뿐인데. 그놈들 와서는 사진 몇 방 찍은 게 다야. 인터뷰야 자기들이 실감 나게 쓴 거지.”
재준이 약간 신이 난 듯 말했다.
“이제 제가 한국은행 가서 담판 지으면 되는 겁니까?”
“잠깐, 그거 정 행장이 가는 게 낫지 않겠니? 네가 가면 영…….”
“영 뭐요? 할아버지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
“도련님. 그렇게 하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어, 이분들, 지금 나를…….”
이때,
똑똑.
비서가 급하게 들어오더니 정 행장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아, 알겠습니다. 지금 받겠습니다.”
정 행장이 급하게 일어나 자리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다.
“네, 대통령님. 정태균 행장입니다.”
대통령?
재준과 임병달은 귀를 쫑긋 세웠다.
“네, 감사합니다. 국가를 위한 일인데.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금도 외환 보유고에 해당합니다.”
-
“아닙니다. 저희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아무리 저희 대주주가 미국 은행이라 해도 저희는 한국에 세금을 내는 대한민국 기업입니다.”
……….
“네, 감사합니다.”
정 행장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재준과 임병달은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임병달이었다.
“정 행장, 대통령이야?”
“네, 저도 너무 의외라 당황했습니다.”
“통화 내용을 보면 우리를 지지해 주시는 것 같던데.”
“네, 달러만 벌어 온다면 주위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
큭큭큭.
재준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임 회장과 정 행장이 ‘이놈 왜 이러는 걸까’라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다시 어깨를 쭉 편 재준이 말했다.
“봐요. 제가 그렇게 세게 나가니까, 이런 좋은 결과가 나오잖아요. 앞으로 너무 소심하게 행동할 필요 없다니까요.”
와, 근데 이건 좀 놀랐다.
대통령이 이렇게 빨리 전화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금감원 윤 원장 썩은 표정이 눈에 훤하네.
재준의 자신감 있는 말투에 임병달은 다시 관자놀이를 콩콩콩 두드렸다.
정 행장은 재준을 애써 무시하며 임 회장에게 통화 내용을 정리해 보고했다.
“일단 금이 모이면 세공으로 나가는 몫을 제외하고 저희가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외환 보유고 이야기가 들리던데.”
“금을 빨리 수출해서 외환 보유고를 채워야 한다길래 드린 말씀입니다. 언제든 한국은행이 요청하면 금을 내주기로 했습니다.”
“그럼 이익이 별로 없겠는데. 우린 채권 발행해서 10년 동안 이자도 나가는데.”
재준은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뭔가 생각나서 말을 꺼냈다.
“정 행장님. 조금 있으면 9개의 공기업을 민영화합니다. 한국은행에 금을 주면서 5,000억 상당은 한국종합기술금융 주식으로 달라고 하세요.”
아, 곧 공기업 중 9곳이 민영화하는구나.
임 회장과 정 행장은 놀랍지도 않았다.
어쨌든, 정 행장은 재준에게 되물었다.
“공기업을 인수하자고요?”
“맞아요. 저희 은행이 벤처기업에 투자하려 하면 외국계라면서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종합기술금융을 보유하면서 우회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골치 아프게 연구할 필요도 없고.”
“한국종합기술금융이라…….”
그게 바로 KBB 네트워크예요.
대한민국 최고의 벤처 캐피털.
그런데 너무 못 키웠어요.
아니지, 잘 키우긴 했는데 제가 키우면 최소한 세계 최대 VC(벤처 캐피털)로 만들 수 있어요.
물론 난 조언만 할 거다. 정말이다.
“알겠습니다. 도련님이 생각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직접 정부에 요청하겠습니다.”
“네.”
자, 이제 금 모으기 운동은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금을 가지고 있다가 가격이 올라갈 때 파는 것도 좋지만 한국종합기술금융이라는 공기업을 하나 얻는다면 더 좋다.
물고기를 얻기보다 낚시를 배우는 거라고 할까나.
이제 정말 한차례 쉬어 볼까?
이때,
띠리리링.
천 실장이다.
“네, 실장님.”
-전에 말씀하셨던 미리내증권이 법인등록을 했습니다.
“뭐라고요?”
-총 4명의 펀드 매니저가 창업을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전에 말씀하신 모던증권이 ‘겟코리아펀드’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쉬긴 개뿔을 쉬어.
미리내증권이 박민수가 없는데도 창업을 했다.
이제 뮤추얼펀드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자그마치 10조 이상이 모이는 대한민국 최대의 펀드 ‘겟코리아펀드’가 시작되었다.
펀드의 시대를 여시겠다.
그럼, 진정한 펀드가 무엇인지 보여줘야지.
그리고 모던증권의 ‘겟코리아펀드’ 저건 꼭 죽여야 해.
저것 때문에 모던전자에 투자했던 모든 증권사가 휘청했거든.
재준은 할아버지를 봤다.
이거 또 방송에 나가라 하시면 아주 대노 하실 텐데.
내가 나갈까?
지금 인기도 급상승 중이고.
아니, 아니.
방송보다 중요한 건 현재증권을 뒤집어엎는다는 거구나.
할아버지가 저 앞에 있는 재떨이를 던지지 않을까?
재준이 눈매를 가늘게 하고 생각에 몰두하자 임병달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또 무슨 일 꾸미는 거지. 방금 통화를 보니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
후욱~.
숨을 깊게 들이마신 재준이 각오가 되었다는 듯 임병달에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
“현재증권에서 펀드를 없애죠.”
“지금 뭐라고 한 거냐? 펀드를 없앤다고? 증권사에서?”
“정확히 펀드를 없앤다기보다는 펀드를 바꾸는 거죠.”
“지금까지 해온 펀드를 바꾼다고? 너 지금 제정신이냐?”
“자, 진정하시고요. 제 말을 들어보세요. 아주 쉬워요.”
재준은 인덱스 펀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
금감원 원장실.
하.
윤 원장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리고 부원장들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하.
다시 숨을 내쉬고는,
“정말 일 처리 이렇게 할 겁니까?”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내가 대통령님에게 뭐라고 해야 합니까?”
“저, 그게…….”
부원장 한 명이 용기 있게 나섰지만, 목소리는 모깃소리처럼 기어들어 갔다.
“비서실의 말에 의하면 언론이 워낙 그쪽으로 기울어서 대통령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
“내가 그걸 몰라서 지금 말하는 거냐고요? 그놈이 설쳤으면 바로 대응을 해야 했을 거 아닙니까? 대응을? 대응 몰라요? 그 사달을 내고 있는데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냐고요.”
“하지만 이미 금 가격은 정해졌고 종합상사의 거래선이 확정된 상태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좀 있었으면…….”
“시간, 시간, 시간. 언제까지 시간 타령만 할 겁니까. 도대체 이제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뭐라고 해야 하느냐고요?”
윤 원장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하나.
해결책이 없어. 해결책이.
차라리 눈을 돌릴 무언가를 만드는 게 낫겠는데.
큰 건 하나 잡아야 해.
이때, 윤 원장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듯 부원장 하나가 윤 원장에게 슬며시 다가왔다.
“저, 원장님. 증권거래소의 시장종합감리시스템에서 모던전자에 이상 징후가 보인다는데, 이걸로…….”
“뭐요?”
윤 원장은 부원장을 보는데 눈가가 살며시 떨렸다.
모던전자?
이거 큰 건이 되겠는데.
금감원이 금 모으기 운동보다는 기업 정화가 우선이라 신경을 미처 못 썼다고 하면 될 일이다.
“자세히 이야기해봐요.”
“불공정 거래 행위가 적발되어 경보시스템을 발동했고 심리지원시스템으로 확인해 본 결과 협의가 있다고 결론이 나왔습니다.”
증권거래소는 하루 2백 건의 이상 징후를 경보시스템으로 확인했다.
다음 심리지원시스템으로 주가 조작 전력이나 증권사 직원, 상장 법인의 주주가 기록된 데이터베이스로 걸러내어 협의가 짙은 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어딥니까?”
“모던증권과 모던중공업, 모던상선이 조직적으로 주가를 조작했다고 합니다.”
“모던 그룹이요?”
“네.”
모던증권이면 민승기 사장?
“조사2국에 괜찮은 직원 있습니까?”
금감원은 조사국이 3개 있는데 1국은 코스닥과 선물, 2국은 증권거래소 의뢰 사건, 3국은 보험 사건을 다룬다.
“2국 10팀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국 10팀이면…… 국태희 팀장. 괜찮겠네. 그쪽에 배당하세요.”
조사국은 아래 12개의 팀을 두고 각 팀에서 2명씩 조를 이루어 조사를 진행한다.
윤 원장은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 여러분. 우린 지금 모던전자 주가 조작 사건을 맡았습니다.”
“저 원장님. 아직 조사가…….”
윤 원장이 콧등을 위로 올렸다.
말을 꺼낸 부원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닙니다.”
윤 원장은 부원장을 향해 시선을 거두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자, 다시. 주가 조작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모던 그룹의 세 곳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이걸 윗선은 아주 언짢게 보실 겁니다. 우리가 대충 마무리를 지어서 보고를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던 그룹에 연락해서 매집한 물량은 절대 매도하지 말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자칫 물량이 시장에 나오면 정말 빼도 박도 못합니다.”
나중에 모던 그룹은 이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주가 조작을 했다면 값이 오른 주식을 팔아서 이익을 챙겼어야 하는데 여전히 해당 계열사들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가 조작이 아니라 계열사가 자금 운용 차원에서 주식투자를 한 것입니다.
“모던증권 민 사장은 빼셔야 합니다. 모던 그룹과 평생을 한 가신입니다. 자신이 몰리는 걸 알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저희도 깊게 연루되어 있고요.”
윤 원장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고 모던증권 자체를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세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기자들이 파고들면 다 알려질 텐데요.”
“이봐요. 부원장님. 모던증권이 주가 조작에 개입했다는 물증 있습니까? 증권사는 수도 없는 거래를 하는 곳입니다. 중공업과 상선처럼 거래 내역이 뻔하게 드러나는 곳이 아닙니다. 증권사를 제외했다 해서 금감원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자, 그럼. 정리가 되었습니다. 모던중공업과 모던상선 둘만 조사 시작하세요. 모두 나가서 일 보세요.”
윤 원장은 자리를 뜨는 부원장들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이 정도는 돼야 금 모으기 운동으로 실추된 금감원의 위상은 다시 회복되겠지.
허나, 윤 원장은 이번 사건도 재준과 엮인다는 걸 꿈에도 생각 못 했다.
***
방송국.
‘오늘의 기업’ 코너.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재준의 출연이 서형길 실장의 로비로 단박에 결정되었다.
사회자가 큐 사인을 받고 방송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오늘의 기업 시간입니다. 오늘은 며칠 전 금 모으기 운동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던 현재증권의 임재준 씨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임재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