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소신껏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3)
황선달의 말에 윤 원장이 급하게 답했다.
“아, 그래요?”
“네, 제가 아무리 유명해도 수기로 매매한 기록이라 증권사만 알고 있을 텐데요. 증권사 기록을 뒤진다는 것도 어불성설 아니겠습니까?”
음.
윤 원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그리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건 저만 알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 알게 되었지만, 명동 사무실이라든가 제 차명 계좌 같은 거 말입니다.”
“그래요?”
“네, 마치…….”
“누군가 알려준 것 같은?”
“네, 맞습니다.”
“저도 처음엔 안기부를 의심했습니다. 그 후 나름 조사를 했지만, 임재준은 안기부랑은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군대도 안 갔습니다.”
“임재준을 조사했다고요?”
“네, 그러나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임 회장 밑에서 말썽만 피우다 군 면제되자 호주 유학 4년 다녀오고 현재증권에 사원으로 입사한 게 다입니다. 어떤 단체에 가입한 흔적도 없고 회사에서 일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호주 유학이요?”
“네. 하지만 호주까지 조사하지는 않았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이미 한국에서 조사한 거로 충분했으니까요.”
“그런 하찮은 놈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그게 이상했습니다. 제가 본 임재준은 마치 제가 이길 수 없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냥 모든 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마치 폭탄을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윤 원장은 뭔가 확실한데 확신이 없었다.
폭탄이란 말도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대들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이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마치 어느 순간 사람이 확 변한 것 같은데.
뒷조사를 더 해 봐야 하나.
아니지, 이럴 땐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주변을 조성하는 게…….
이때,
띠리리링.
윤 원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수석부원장님.”
-임재준이 미국 투마로우뱅크 본사의 대주주입니다. 아니, 거의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뭐요?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입니까? 임재준이 왜 투마…….”
윤 원장은 황선달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확실한 겁니까?”
-미국에 있는 특파원이 방금 확인한 결과랍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임재준이 설립한 투자사가 있습니다. 그 투자사가 투마로우뱅크의 지분을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그뿐이 아닙니다.
“또 뭐요?”
-스톡체인이 투마로우뱅크의 자회사입니다.
“스톡체인이 뭔데요?”
-미국 제1의 온라인증권회사입니다. 고객 예치 자산 규모가 7,000억 달러입니다.
“얼마요? 7,000억 달러요?”
-지금 자료가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들어오시면 검토하십시오.
“알겠습니다.”
7,000억 달러.
지금 환율로 따지면 1,000조 원?
대한민국 예산의 열 배가 넘는 돈을 굴리고 있단 말인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황선달은 윤 원장의 표정 하나하나를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통화로 보면 분명 임재준에 관한 것이다.
근데 윤 원장이 왜 저렇게 긴장하는 거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윤 원장이 황선달을 쳐다봤다.
“이봐요, 황 회장. 우리 같이 일 하나 합시다.”
“허허허, 제가 나랏일을 하는 겁니까?”
황선달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윤 원장은 임재준을, 아니 현재증권을 죽이려 한다.
자신이 이 일에 끼어들면…….
만약 실패했을 땐 잘려나갈 꼬리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윤 원장의 무서움도 알고 있다.
여기서 거절하면 금감원의 칼날이 자신을 향해 온다.
하루는 버틸 수 있을까…….
다른 기업을 몰아세울 때는 검찰과 언론을 다 동원하는 걸 지켜보며 오금이 저렸다.
“그럼요. 다 나라를 위해서 제안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윤 원장은 한 시간 후에 명동을 떠났다.
***
투마로우뱅크코리아 행장실.
정 행장의 긴급한 호출을 받고 달려온 재준은 벙찐 표정으로 행장실에서 일어난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왜 정부가 하는 일에 끼어들어서 이 사단을 만드냔 말입니다. 왜 마음대로 가격을 올려서 금을 사고 있는 건지 말 좀 해보세요?”
하우징은행에서 온 사람이 일갈을 날렸다.
“그게 왜 투마로우뱅크의 문제입니까? 다른 은행도 돈을 올려서 금을 매입하면 되잖아요? 잘못은 자기들이 다 해놓고 왜 좋은 일 하는 은행을 몰아세워요!”
금모으기운동감시를위한모임(이하 금감모)에서 온 사람이 투뱅코를 편들며 하우징은행 사람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정부가 정한 정책입니다. 애초에 자격이 없는 투마로우뱅크가 잘못인데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입니까?”
“뭐라고요? 장부가 국민을 착취하는 게 정책입니까?”
이렇게 한 팀이 치고받고 싸우는 중이고.
“금을 내놓으세요. 애초에 정부가 수출하기로 한 금을 왜 은행에서 깔고 앉아서 유통을 방해하는 겁니까? 우리 법적 대응도 검토 중입니다.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당장 금을 내놓으세요.”
투데이종합상사에서 온 사람이 삿대질하며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이때, 그의 앞을 막아서며 팔을 걷어붙이고 같이 삿대질을 하는 이가 나타났다.
“수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국민 다 굶겨 죽이고 하는 그런 수출. 난 반대야. 투마로우뱅크 아니었으면 우리 다 길바닥에 나 앉을 뻔했어. 이게 애국이라는 거야. 이 이기적인 양반아.”
한국세공협회 안 회장이 종합상사에서 온 사람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한국세공협회 안 회장은 꽤 힘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현금 동원 능력이 열 손가락 안에 드니까.
금이라는 게 순 현금장사다.
금괴 몇 개만 들고 와도 만 원짜리 뭉치 몇 개가 왔다 갔다 하니 돈이 없으면 금과 관련된 사업은 할 수가 없다.
암튼 여기도 이렇게 한 팀이 붙었다.
재준은 정 행장을 보고 안쓰러워 혀를 찼다.
쯧쯧.
저 봐, 행장님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네.
저러다 흘러내리겠다. 흘러내리겠어.
이렇게 네 팀이 행장실에 몰려와서 난리 난리였다.
네 명이 아니고 네 팀이다.
그러니까 여기 최소 20명이 떠들어 대고 있는 게 보였다.
남녀의 까랑까랑한 소리가 공기 중에 섞여 머리가 멍할 정도였다.
재준은 슬그머니 정 행장에게 다가갔다.
“왜 부르신 거예요?”
“이거 좀 해결해 달라고요. 지금 한 시간째 이렇게 싸우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일엔 재주가 없습니다. 차라리 천 실장을 부를까요?”
“밖에 기자 못 보셨습니까?”
“아, 봤습니다. 그럼 안 되겠군요.”
“네.”
사건이 터지자 기자들도 잔뜩 몰려와 행장실 밖에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재준은 안팎을 살피고 한숨을 쉬었다.
후.
이거 어쩌지.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고.
이건 내가 미래 지식이 있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인데.
이럴 땐 각개격파가 답이지.
일단 집중 좀 시키고.
“행장님, 혹시 메가폰 있습니까?”
“있습니다. 전에 도련님 하시는 거 보고 혹시나 해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역시.
정 행장은 자신의 책상 아래에서 메가폰을 집어 들고 와서 재준에게 건네주었다.
재준은 메가폰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려 스위치를 눌렀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갑작스런 사이렌 소리에 모두 귀를 틀어막고 재준을 향했다.
밖에 있던 기자들도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모두 찍어!
팟팟팟팟팟!
카메라 플래시가 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재준은 사이렌을 끄면서 말했다.
“자,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모두 재준에게 집중하자 말을 시작했다.
“자, 지금부터 투마로우뱅크코리아에서 제안을 하겠습니다. 우선 금세공업자 분들에게는 저의 은행이 원하는 만큼의 금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단, 지난 1년간 세공한 평균 수량 이상은 안 됩니다.”
“우리도 욕심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맞아, 맞아. 다 같이 살아야지.
금세공업자들은 재준의 말에 찬성했다.
“금을 제공해 드릴 테니 세공품은 종합상사에게 파십시오. 절대 국내 유통은 안 됩니다. 이유는 아시겠지만, 금 모으기 운동의 취지는 달러를 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은 금물입니다.”
맞네. 맞아. 나라를 살려야지.
재준은 다음 종합상사 대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음 종합상사 여러분은 세공품을 사되 어음 1개월짜리로 발행하십시오. 1개월 이상은 안 됩니다. 그리고 30% 이상의 마진을 붙여서 해외에 파셔야 합니다.”
이 시대 어음은 짧게 6개월 길게는 1년짜리를 발행했다.
납품업자는 고생하고 대기업은 돈 쌓아 놓고.
이거 대기업을 살찌우는 아주 안 좋은 악습 중의 악습이야.
과장 조금 보태서 이자만 해도 결제 금액이 나오겠네.
내가 이 꼴은 정말 못 보지.
맘 같아서는 무조건 현금 구매를 지시하고 싶지만, 이 시대 경제 현실을 조금 고려해서 1개월짜리 어음으로 대처했다.
그리고 마진 30%는 국제 금 세공품의 공식 마진이다.
30%는 일반적인 관례이고 정말 훌륭한 세공은 더 비싸고.
그런데,
어디선가 불편한 비명이 들렸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1개월짜리 어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해외에서 정해진 마진으로 사겠다는 업자는 없습니다. 무역은 해보고 얘기하시는 겁니까?”
종합상사 사람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반대했다.
재준이 메가폰을 내려놓고 종합상사 대표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그래요? 그럼 가능한 업체를 선정하면 되겠네요. 자신 없는 분들은 나가세요. 굳이 설득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영세업자 고혈을 쥐어짜고 해외 업자에겐 마진 없이 팔아서 회사 매출 불릴 생각만 하니까 못 파는 겁니다. 아닙니까?”
“뭐요?”
대기업 종합상사 7개가 동원되었다.
아마 서로 죽기 살기로 마진을 줄여서 나중에는 헐값에 내다 팔아 해외 업자만 좋은 일 시킬 것이다.
근데 누가 선정한 거야?
이것도 금감원인가?
“그렇잖아요. 여기 왜 오신 겁니까?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온 겁니까, 아니면 자발적으로 온 겁니까? 우린 부른 적이 없는데. 그리고 왔으면, 얘기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하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애초에 정부가 저희를 지정한 이유는 빨리 처리하란 것이었습니다. 근데 투마로우뱅크가 이를 막고 있는 거 아닙니까?”
“어라? 그럼 정부가 지정한 은행으로 가세요. 왜 남의 영업장에서 소란을 피웁니까? 우리는 정부랑 완전 상관이 없는데.”
“이러다 정부에 찍히면…….”
허.
“찍히면 뭐? 할 말 없으면 정부 타령이야? 우리가 하는 게 정부에도 아주 많이 도움이 되는 거야. 너희도 도움을 주고 싶어? 그렇게 금을 수출하고 싶으면 당신 돈으로 금을 사세요. 그걸로 수출하면 되잖아. 왜 남이 비싼 돈 들여 산 거로 당신 배를 불리려고 하는 건데. 아주 심보가 못됐어. 남의 노동을 기껏 도움도 안 되는 어음 쪼가리나 주고. 마진도 없는 수출을 하는 데 종합상사씩이나 필요합니까?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어요. 이건 금이라고 금. 내놓으면 다 사가는 금.”
“그걸 누가 모릅니까?”
“에헤이, 시끄러우니까 그냥 나가세요. 오늘부로 종합상사는 전부 탈락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