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소신껏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2)
투마로우뱅크코리아 행장실.
정 행장은 불편한 얼굴로 재준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시중은행 6곳에서 금 모으기 운동 준비]
재준은 헤드라인 제목을 보고 썩은 미소를 지었다.
“저희 은행을 제외시켰네요.”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린 외국계 은행으로 분류되니까요.”
“참나, 한국 사람들이 일하고 있으면 한국 기업이지. 이러니까 글로벌이 안되는 거야. 좋아요. 저희도 시중은행이 시작할 때 같이 시작하죠.”
“괜찮겠습니까?”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국민이 선택할 일이죠. 이게 꼭 정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도 아니고. 금을 모아 국위 선양하겠다는데 말리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요.”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고 언론이 추켜세우고 있는데 우리가 꼭 적이 된 느낌입니다.”
“우리가 빌런이라고요?”
“빌런이 뭡니까?”
“아, 아닙니다.”
큭큭큭.
재준은 빌런이란 말에 일을 틀어 볼까 생각하며 빙글 웃었다.
“그럼, 확실히 딴지를 걸죠.”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먼저 현재 시세에서 5%를 더 주고 매입합니다. 그리고 은행 홈페이지 메인에 공간을 만들어서 매일매일 들어오는 금의 양과 세공을 맡기는 세공사들을 공지하는 겁니다. 금을 보관하는 것도 저희가 하지 말고 꼭 국내 은행 금고를 이용해서 투명하게 보여주고요.”
“그건 어려운 게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저희 국민은 의례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느 정도는 빼먹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아주 클린한 이미지로. 괜찮죠!”
“클린한 이미지……. 네, 당연히 괜찮습니다만…….”
정 행장은 묘한 재준의 미소가 맘에 걸렸다.
다 좋은데, 꼭 싸움을 거는 사람 같단 말야.
그것도 정부를 상대로.
어째 상대가 점점 커지는 듯한 게 나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국제금평가기관 LBMA의 공인은 꼭 받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조치해 두었습니다.”
원래 금 모으기 운동에서는 LBMA의 공인을 받지 않고 급하게 해외로 수출하여 제값을 받지 못했다.
정말 모를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하게 팔았을까.
달러 한두 달 늦게 들어 온다고 외환고가 바닥이 나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 대통령을 끌어들여서 금감원 단단히 엿을 먹여야 정신을 차리지.
“그럼, 시작해 볼까요?”
재준이 또 빙글 웃었다.
정 행장의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
금감원.
투마로우뱅크코리아(이하 투뱅코)가 금 모으기 운동에 뛰어들고 반나절 만에 시중은행의 실적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모든 사람들이 투뱅코로 몰려들었고 방송국 3사 모두 투뱅코 현장을 촬영해서 방송에 내보냈다.
송출되는 화면 속에서는 금의 무게를 달면 그 즉시로 전광판에 무게가 추가되면서 전체 금의 모금량이 보였다.
일주일이 지난 현재 65톤의 수량이 전광판에 표시되었다.
윤 원장은 허탈한 듯 TV를 꺼버렸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먹는다더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문제가 뭐예요?”
“매입 단가가 차이가 납니다. 저쪽이 시세보다 5%를 더 주고 있습니다.”
금융소비자보호처 금 처장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죽고 싶을 것이다.
아이디어는 대통령 비서실에서 나왔지만, 일의 진행은 은행에서 하자고 제안한 게 금감원이었다.
대략적으로 계산해 봐도 최소 1조에서 잘하면 2조의 돈을 달러로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원래 금 모으기 운동으로 벌어들인 돈은 22억 달러.
“그럼 우리도 5% 더 얹어 주면 되잖아요. 이런 일까지 하나하나 내가 지시를 내려야 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허락을 안 받고 했다가 내가 무슨 봉변을 당하라고.
세 명의 부원장과 한 명의 처장이 모두 같은 생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때, 기획 및 보험을 담당하는 수석부원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투뱅코 홈페이지를 보면 실시간으로 금의 수량과 사용 내역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정한 은행들이 이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저쪽이 그런 것도 준비했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이미 한국세공협회에 공문을 넣어 금세공에 참가를 원하는 업체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들이 한창 수출할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얼씨구, 철두철미하기까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새마음부녀회에서 감시를 허락하여 공정성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저들이 저렇게 준비할 동안 여러분은 뭘 한 겁니까?”
“그게……. 비서실에서 연락 오고 바로 처리하는 바람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당신도 같이 있었잖아.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건데.
부원장은 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윤 원장이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투뱅코의 일 처리가 아주 골 때렸다.
가만.
저놈들이 저걸 다 미리 준비했다고?
“저들이 금 모으기 운동을 우리와 같이 시작했지요?”
“네. 같은 날 시작했습니다.”
“그럼, 그 홈페이지라는 걸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보통 한 달 정도 걸립니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잡아야 할 겁니다.”
“금 모으기 운동에 대한 뉴스가 나간 건 일주일 전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비서실에서 연락받은 건 뉴스가 나가기 하루 전이고요.”
“그렇습니다만…….”
윤 원장은 뭔가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우로 약간 꺾었다.
오호, 이거 봐라.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움직였잖아.
어떻게?
“거기 현재증권 관련 파일 좀 가져오세요.”
맨 끝에 앉아있던 처장이 부리나케 파일을 가져왔다.
여기.
윤 원장은 현재증권의 서류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탁탁탁 집어 가며 내려갔다.
지금까지 주식과 채권 매매 같은 증권사의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던 현재증권이 작년부터 저돌적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현재증권이 갑자기?
윤 원장의 머리에 임재준이 자신을 향해 비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놈과 연관이 있는 건가?
“부원장님. 일전에 현재증권 임병달 회장을 소환했을 때 따라왔던 수행비서. 기억하십니까?”
“임재준 말이군요. 임 회장의 손자입니다.”
“손자요?”
“네. 맞습니다. 뉴스에 한 번 크게 나왔던 적도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놈이 언제부터 현재증권 회장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습니까?”
수석부원장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 옆의 부원장을 쳐다보았다.
자본시장과 회계를 담당하는 부원장이 선뜻 끼어들었다.
“수행비서가 아닙니다. 일반 사원입니다.”
“네?”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정확히 직책은 없는데 굵직한 일을 도맡아서 한다고 합니다.”
“일반 사원 신분으로요?”
“회장 손자니까 전횡을 휘두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거로 꼬투리를 잡을 수는 없고…….
“그놈이 설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입니까?”
“작년입니다.”
윤 원장은 서류를 보며 작년부터 있던 일을 집어 갔다.
작년, 작년이라…….
윤 원장은 현재증권의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투마로우뱅크, 이슬, 선동방, 대한.
다시 보유주식란을 보고 잘못된 정보가 아닐까 생각하며 서류를 가까이 보았다.
그랜드월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
“수석부원장님. 그랜드월이 상장을 했던가요?”
“아닙니다. 상장을 생각하지 않는 헤지펀드 단체입니다.”
“그렇지요. 나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거 봐라.
뭔가 거대한 힘이 뒤에 있는 것 같은데.
투마로우뱅크의 도움을 받고 있는 건 확실하고.
혹시 미국 CIA의 도움이라도 받는 건가?
윤 원장은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이건 또 뭐야?
재경기계의 채무액이 너무 큰데.
“현재증권과 재경기계에 대해 아시는 분 있습니까?”
이번에도 처장이 나섰다.
“그 사건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현재증권이 스스로 작전 중인 펀드 매니저를 고발한 사건입니다.”
이후 처장은 윤 원장에게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군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근데, 그때 황선달이 당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누구?”
“명동 사채 시장 황선달이라고…….”
“그 사람은 나도 알아요. 그런데 황선달이 누구한테 당했다는 겁니까?”
“현재증권에게…….”
“그러니까 정확히 누구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톡. 톡. 톡.
나무로 된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골똘히 생각하던 윤 원장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황선달을 만나야겠습니다. 연락 좀 하세요.”
“네?”
“지금 당장이요.”
“네.”
윤 원장은 일어나서 왔다 갔다 걸으며 생각에 집중했다.
정보, 어디서 확실한 정보를 얻는 게 확실해.
작년부터 현재증권이 기업들 싸움에 끼어들어 이익을 취하고 있어.
그리고 미국…….
불길한데. 아주 불길해.
“수석부원장, 언론사에 연락해서 경제부 특파원을 이용해 미국 투마로우뱅크 본사를 조사하라고 하세요.”
“네.”
“사소한 거 남김없이 싹 털어요.”
“네. 알겠습니다.”
***
명동.
황선달과 마주 앉은 윤 원장은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향이 좋군요.”
“명동에 해외 제품들이 많습니다. 중국 유명한 차도 있어서 자주 애용하는 편입니다.”
“흠, 저도 이곳에서 차 좀 구매하고 가야겠습니다.”
“제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현슬아!”
황선달의 심복이 허리를 구부리고 차를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근데 나랏일로 바쁘실 텐데. 저 같은 일수쟁이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계신 겁니까?”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네. 물어보십시오. 아는 거라면 답해드리겠습니다.”
“재경기계 아시죠.”
끙.
황선달은 자기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과거가 머리에 떠올랐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황성달의 반응에 윤 원장은 확신했다.
황선달이 당했다는 게 맞구나.
황선달은 되도록 차분한 음성을 유지하려 목소리를 깔았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걸 문제 삼으려고 온 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럴 거라면 윤 원장님이 이렇게 직접 오시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맞아요. 하지만 사건은 궁금하더라고요. 어떻게 천하의 황선달이 현재증권에게 당했을까? 제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합니다.”
후.
“아닙니다. 저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긴 했지만 배운 것도 많았으니까요.”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후.
황선달은 한숨 내뱉고 차를 들이마셨다.
“다 아시니까 가감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은 들은 후에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네.”
……….
황선달의 이야기를 들으며 윤 원장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역시 자신의 예감대로 임재준이 중간에 끼어들어 작전을 망친 게 확실해졌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임재준이 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모든 걸 알고 있다…….”
황선달은 그때 재준의 말을 떠올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제 과거에 대해 자세히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때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1985년 일인데 제가 선정한 종목 수, 주식 수량과 심지어 들어간 돈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