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지금부터 나도 당신들을 죽일 거니까(5)
허.
손 회장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회장님, 전자는 버리시는 게 맞습니다. SS전자나 GL전자가 너무 앞서고 있습니다. 차라리 자동차에 올인 하시는 게 그룹의 덩치를 더 키울 수 있습니다. 1992년 인제네널모터스와 폴란드에서 붙어서 고생하신 것 생각 안 나십니까?”
“알지, 어찌나 치열한 M&A였는지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
“그럼, 앞으로 그런 일들이 또 벌어지지 말란 법 있습니까? 보드가 요즘 재우자동차과 동선이 자꾸 겹치던데 은근히 무시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규모가 작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알고 있네.”
“재우의 시장에 SSY의 시장이 더해졌습니다. 이제 SS의 시장이 더해지면 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손 회장은 결정을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회장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재우의 트랜스미션에 SSY의 엔진을 탑재하고 SS의 전자 기술이 합쳐진 자동차.”
후후.
손 회장은 재준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여우라니까. 임 팀장. 그런 차라면…….”
“독일 멘츠와 한번 붙어도 될 겁니다.”
멘츠…….
재우자동차의 트랜스미션 기술은 나중에 NG가 인수할 때 가장 먼저 미국으로 가져갈 만큼 뛰어난 기술이었다.
SSY자동차의 엔진은 독일의 엔진 제작소를 인수해서 만들었다.
즉, 멘츠와 같은 엔진이란 말이다.
거기에 SS자동차의 편의성은 전자 센서에서 나왔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된다면…….
손 회장은 버리기 아까운 그림을 그렸다.
“좋아. 이걸 성사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요.”
이미 SS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재경부 장관을 만나보겠네.”
“감사합니다.”
이게 마지막 부탁이 될 것 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
금감원 회의실.
장운증권은 금감원 여의도 본사 앞에서 진을 치며 농성에 들어갔고 시끄러워지자 재경부가 나섰다.
한창 진행되던 장운증권 퇴출 막바지에 재경부가 덜컥 현재증권의 인수를 승인해 준 것이다.
손 회장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금감원의 심기는 무척 불편해졌다.
결국, 불씨는 불덩이가 되고 말았다.
금감원은 인수 과정에 불법적인 증거가 포착되었다며 임병달 회장을 금감원으로 불러들였다.
재준은 금감원장을 어떻게 만날까 궁리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 임병달의 수행비서로 참석했다.
윤 원장은 임병달에게 빈정대듯이 말을 시작했다.
“전경련 이용해서 재경부에 로비하셨죠?”
“글쎄요. 그런 기억은 없습니다.”
“로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인수 허가가 나왔죠?”
“정부가 권유한 신자유주의에 따른 것입니다. 장운증권에 훌륭한 인재가 있어서 현재증권이 인수했습니다. 뭐 잘못된 겁니까?”
윤 원장은 살벌한 분위기에 전혀 기가 죽지 않는 임병달 회장의 표정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금감원장은 회의실 자리를 청문회장처럼 배치했다.
금감원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자신을 중심으로 좌, 우에 국장 수십 명이 일직선으로 나열해 앉아있도록 했고, 맞은편엔 임병달 회장과 재준, 달랑 둘만 앉게 했다.
무거운 분위기.
기 좀 죽으라고 모두가 두 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전혀 임병달과 재준은 쪼는 기색이 없이 웃고 있었다.
범인을 취조하듯 캐물으면 자존심에 화가 날 만도 한데 전혀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편안하게 시간을 때우자 했지.
편안하게.
“인재가 필요한지 충분한지, 그것은 금감원에서 결정합니다.”
“아, 그러셨군요. 근데 언제부터요?”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태도야.
마치 국내 기업은 다 자기 발아래라는 식이네.
금감원장과 임병달 회장의 기 싸움이 시작됐다.
재준은 계속 임병달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윤 원장의 노기 섞인 말을 뱉었다.
“장운증권은 부도 처리되고 금융계에서 퇴출되어야 하는데 왜 현재증권이 나서서 인수를 추진한 겁니까? 우리가 파악하기엔 장운증권엔 인재는커녕 노사 관계에 분란만 일으키는 세력만 존재했습니다.”
“아, 몰랐습니다. 노사 관계에 분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노사가 같이 당사 앞에서 시위 중인 겁니까?”
윤 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사 결과 조화은행도 현재증권이 손을 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맞습니까?”
“지금 장운증권 이야기로 온 거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조화은행은 왜 꺼내십니까?”
“묻는 말에만 답하세요.”
허.
임병달은 허탈한 숨을 내뱉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윤 원장.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이 정말! 원칙 몰라? 원칙!”
부실기업을 처리하기 위해 본보기로 장운증권을 삼킨 주제에.
그동안 검찰과 언론에 작업한 노력도 무색하게 지붕에 올라간 닭만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누구 맘대로!
단번에 겁박을 주었다.
근데.
임병달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봐요, 윤 원장. 내가 얼마 전에 병원엘 갔습니다. 그런데 보호자 동의 없이 응급수술을 할 수 없다고 환자가 방치되어 있지 뭡니까. 그래서 내가 여기 비서더러 대신 수술비 내주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원칙, 규칙 따지지 않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갑디다. 일단 구하고 봐야지요. 목숨이 위태로운데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칙, 규칙 따지지 않고.
그 말은 자신은 방금 윤 원장이 말한 금감원의 원칙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이며,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윤 원장은 맞받아쳤다.
“아무리 위급 상황이라도 병원 원칙은 따라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내부 기강이 흔들립니다. 제3자의 성급한 판단이 병원을 송두리째 없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임병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내실이 튼튼했다면 응급 환자를 두고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부족하니 병원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병원이 돈이 많아 봐요. 무료로 환자들 다 치료해 줄 겁니다. 다 돈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제가 돈이 많습니다. 그래서 환자 하나 살렸더니 의사가 오히려 원칙을 들먹인 걸 사죄하더이다.”
임병달 화장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금감원장을 보았다.
원칙도 원칙 나름이지 이 양반아.
기업 죽이는 원칙이 무슨 자랑이라고.
금감원장은 그를 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제 말이 우습게 보이시나 봅니다. 그동안 좋게만 봐온 것이 후회되는군요.”
현재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금감원장.
그가 아무리 떵떵거리며 칼을 휘두르고 다닌다고 해도, 임병달의 역사에 비하면 길 가다 발에 차이는 귀찮은 돌멩이 같은 존재였다.
임병달이 누군가.
전쟁 복구를 위해 베트남을 전전했고 다 쓰러져 가는 증권사를 사들여 24시간 밤잠을 설치며 일했다.
아들을 잃은 날에도 회사에 나와 현재증권을 진두지휘했는데, 어딜 책상만 전전하던 인사가 회장과 견줄 수 있을까.
“제 나이가 되면 생각보다 자잘한 행동이 앞서지요. 지하철역 앞에서 동냥하는 사람들 보면 안쓰럽고, 길거리 상인들 물건을 후려치는 사람 보면 화가 나고. 예전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나이가 드니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늘그막에 측은지심이 생겨나지 뭡니까?”
“측은지심 때문에 아무나 도와주다가 칼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금감원장은 임병달 회장을 사납게 물어뜯을 기세다.
냉랭한 눈빛?
등골이 섬뜩?
우스울 뿐이다.
임회장이 곁에 있던 재준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임병달 회장은 금감원장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태연하게 마주 보았다.
“윤 원장, 나를 좋게 봐주신 것에 대한 성의입니다. 그리고 내가 병원에 간 이유는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꾸 마음이 약해져서 혹 죽을 때가 됐나 해서요. 검진 결과 아주 건강하다고 합니다. 건강하면 일해야지요.”
윤 원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건강을 핑계로 자신은 아직 건재하며 만반의 준비가 다 됐다는 눈빛이었다.
“계산 끝나셨나 보군요. 오늘의 입장을 보니, 제가 최근에 현재증권 회장님을 너무 편하게 대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이쿠, 그럴 리가요. 금감원장이 손수 나를 불러줬는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해 드리는 선물이니 꺼내 보세요.”
임병달의 평온한 어투에 윤 원장은 눈을 부릅떴지만, 봉투 안에 담긴 문서가 부실 증권을 인수하겠다는 서류일 수도 있기에 애써 표정을 풀었다.
“저도 임 회장님처럼 좋은 일 좀 하지요. 부실 증권을 모두 인수하겠다는 약조, 그 선물이면 현재증권이 저희를 도와 앞장서는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은행이 튼튼하면 나라 경제도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풋.
재준이 입을 막고 웃었다.
금감원장은 재준에게 시선을 잡아두며 서류를 꺼냈다.
직후 급격하게 표정이 무너지며 재준에게 무시무시한 시선을 쏟아냈다.
“다양한 재주가 있으십니다.”
“제 비책입니다. 맘에 드시는지요?”
“협상 불가라. 금감원이 제시한 증권을 인수하면 노후가 편해지실 텐데. 회장님이 공들이신 일이 우리 금감원 직원들 뇌물혐의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직원들이야 새 사람으로 바꾸면 됩니다. 회장님께서 건강하시고, 열심히 일하고 싶다 하시니, 이젠 제가 도와 드려야겠습니다. 아, 합병해서 좋은 인재들을 쓰신다고 하셨죠. 저희도 합병해서 좋은 인재를 쓰면 되겠군요.”
풋.
다시 재준이 입을 막고 웃었다.
윤 원장은 재준을 노려봤다.
저놈 무척 신경 쓰인다.
불꽃 튀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자네 건방지게 왜 자꾸 웃나?”
재준은 손을 들어 보이며,
“저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하세요.”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어디 수행원 주제에 손을 들어!”
풋.
저놈이 그래도!
“아, 미안해요. 제가 예절을 호주에서 배워서요.”
“뭐라고?”
“근데 지금 이럴 시간이 없을 텐데요.”
“무슨 말…….”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윤 원장이 말을 시작할 시점에 모두의 전화기가 울렸다.
뭐야?
국장 하나가 옆으로 다가와 윤 원장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뭐? 천 국장이?”
[금감원 천성일 국장, 여의도 경찰서 앞에 그동안 금감원의 장운증권에 대한 부정한 행위를 기록한 증거와 함께 자수]
[투마로우뱅크 현재증권 투자 희망]
“이거 봐요. 쓸데없이 기 싸움할 시간이 없다니까요.”
윤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준을 향해 걸어왔다.
“네놈 짓이냐?”
“원장님 시간이 많으신가 보네요.”
“현재증권은 이 시간부터 금감원의 타깃이 될 것이다.”
풋.
또 비웃어?
“원장님. 나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
“정말 현재증권이 당신에게 당하는지.”
“당신이라 했나?”
재준은 팔짱을 끼고 빙글 웃었다.
“한번 붙어 보려고요? 나랑 붙어서 잘 된 사람이 없는데요.”
“어디 감히.”
“이봐요 원장님. 당신은 아무리 나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한다니까요. 뭐, 열심히 노력하면 현재증권 옷자락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법을 들먹여서 제재도 가하고 장운증권처럼 되지도 않는 꼬투리 만들어서 죽일 수도 있고요. 어디 한번 해보세요. 근데 그건 알아두세요. 지금부터 나도 당신들을 죽이기 시작할 거니까.”
모피아.
그리고 모피아의 괴수 윤 원장 당신은 내가 반드시 죽인다.
모피아 때문에 금융계가 변하질 않아.
그러니 어쩌겠어, 내가 살려면 죽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