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지금부터 나도 당신들을 죽일 거니까(3)
재준이 차 밖으로 나와 천 실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 실장이 뒤로 물러나자 천성일이 일어섰다.
재준이 천천히 걸으며 녹음기로 손바닥을 톡톡 치며 말했다.
“내가 선택지를 줄게. 하나, 양심선언을 한다. 둘, 금감원장에게 가서 싹싹 빈다. 셋, 지금까지 훔친 돈을 가지고 평생 도망자로 산다. 어때?”
“뭐?”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자세히 설명할게. 양심선언은 거창하게 기자 불러 놓고 하지 않아도 돼. 주요 일간지에 편지를 쓰면 어떨까? 아, 물론 초안은 잡아드릴 테니 글솜씨는 걱정 안 하셔도 되고. 양심선언을 한 만큼 재산은 토해내야겠지? 두 번째는 말 그대로 가서 빌어. 뭐, 윤 원장이 죽이기야 하겠어?”
잠시 빙글 웃은 재준은 말을 이었다.
“기껏해야 재산 몰수? 아, 아닌가? 그 정도로는 모자라겠다. 당신을 비리로 고발해버릴 것 같아. 그지. 자신의 옷에 똥물이 튀는 건 영 못 견뎌 하잖아, 그 사람.”
천성일이 시선이 흔들렸다.
“세 번째는 내가 이 녹음기를 즐겁게 노셨던 사진과 함께 익명으로 언론에 투고하는 거야. 그러니까 멀리 도망가야지. 시간이 조금 늦으면 가정 파탄에, 주변 손가락질에, 평생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재산은 압류되고, 말 그대로 인생 종 치는 거잖아.”
재준이 빙글빙글 웃자 천성일이 ‘X발 X발’ 하고 혼잣말을 했다.
“빨리 선택해. 참고로 난 세 번째를 추천하고 싶은데. 그동안 번 돈이라도 챙겨야 하지 않을까?”
“그거 불법이야. 도청은 죗값이 아주 크다는 걸 몰라?”
“이 사람 정말 말귀를 못 알아먹네. 내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하라고, 네 걱정. 이 상황에서 왜 내 걱정을 하고 그래? 머리 나빠? 지금 그 말이 네가 유리할 줄 알고 내뱉은 거야?”
“너 사람 잘못 건드린 거라고!”
“야, 이 돌머리가 아직도 머리로 계산을 하네. 에이.”
재준이 핸드폰을 꺼냈다.
“천성일 자료 언론에 뿌리세요.”
-네.
단 한마디 하고 핸드폰을 접었다.
“어때, 선택이 굉장히 간단해졌지. 자, 뭐해. 뛰어야지. 아, 돈 챙겨야 하는구나. 저쪽, 저쪽으로 나가면 은행 있어. 저쪽.”
천성일은 재준을 멍하니 바라봤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언론에 뿌렸다?
뭐 협상이나 제안 그런 것도 없이.
천성일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내일을 상상했다.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모습.
등돌리는 금감원 직원들.
견디기 힘든 공포.
천성일은 다리가 점점 떨려왔다.
재준이 천성일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째깍째깍째깍, 시간 가는데. 안 들려?”
재준의 말이 멈추었는데도 천성일의 귓가에는 째깍 소리가 울렸다.
점점 커지는 초침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저, 정말… 가도 됩니까?”
“그럼. 되도록 멀리 도망가.”
후.
천성일은 날숨을 뱉고는 떨리는 몸을 돌리는 순간.
퍽.
천 실장의 주먹이 천성일의 명치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푹,
천성일은 눈앞이 흐려지며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재준이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재차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자마자 상대방이 받았다.
“서 실장님. 준비하세요.”
-네.
다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강 이사님,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Eeverything went well.
“그럼 알려준 시간에 발표해 주세요.”
-OK.
“네, 수고해 주세요.”
-It's my pleasure.
뭐야, 그새 미국인 다 된 거야?
***
미국 텍사스 수출항.
강호석과 박민수, 마이클은 선적될 냉동 육류의 검사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이클 행장님, 축하드립니다. 이달의 우수 은행에 뽑히셨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수출입을 재개한 이후 곡물 수출이 회복되더니 이제는 육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이게 다 LSCompany 덕분입니다. 대출을 삭감한 일이 알려지자 업체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웨그너 목장만 해도 연간 1억 불 이상 수출입니다. 직원들이 바쁘다고 투덜대지만, 그러면서도 표정이 밝아요. 보너스도 두둑하게 챙기고 있으니 일할 맛이 절로 난다고 합니다. 좋은 일만 가져다 주셨으니 이거 뭐라고 감사해야 할까요.”
마이클이 얼굴 한가득 웃음을 지으며 강호석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민망한 강호석이 박민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박민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박민수가 강호석에게 바싹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이사님, 이번에도 임 대표 예측이 맞았어요.”
“참 내. 임 대표는 늘 정확해서 이젠 어떻게 알았냐고 묻기도 민망해.”
“저도 그래요.”
“참, 온라인 브로커 말이야. 시장을 정확히 몰라서 걱정이 좀 돼.”
“온라인 브로커 시장요?”
“응. 온라인 트레이드 프로그램이야, 투마로우뱅크 시스템 회사가 조화증권 프로그램과 동진은행 가상 계좌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기존에 사용되는 프로그램과 똑같이 완성했다지만, 홍보가 걱정이야. 그게 제일 문제지. 누가 이름도 없는 업체 프로그램을 사용하겠어? 지금 찰스 슈왑이 꽉 잡았던데.”
“그래서 임 대표가 무료 정보 사이트 ‘스톡체인’ 개설하라는 거잖아요.”
“그게…… 영, 실효성이 없어 보여.”
“왜요?”
“‘스톡체인’의 장점이 정보라는데 애널리스트가 자기만 아는 정보를 공개할까? 순위 안에 못 들면 무료로 풀리는 거잖아. ‘스톡체인’이 유령 사이트 될까 봐 걱정이야. 안 그래?”
“그건 그래요. ‘스톡체인’, 저도 그게 먹히나 싶어요. 그나저나 우리만 걱정하면 뭐합니까. 임 대표는 확신하는데.”
“그래, 이번에도 믿어야지. 별수 있겠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 있다는데, 임 대표만 보면 그 속담은 거짓말 같아요.”
“그렇지?”
“네.”
마이클이 선적을 마친 서류를 확인하고 강호석에게 다가왔다.
“마이클 대표님, 온라인 브로커 사업, 연락 받으셨죠?”
“네, 이메일로 구체적인 자료도 받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이클은 강호석을 쳐다봤다.
“온라인 브로커 시장에 진출하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빨리 시장에 나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게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습니다. 먼저 시작한 업체들이 증권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잖아요. 더 지체했다간 타이밍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마이클의 확신에 강호석과 박민수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게 되는 거였어?
“그럼, ‘스톡체인’ 사이트는요?”
“그 아이디어는 기립박수를 쳐야 합니다. 브라보. 아주 멋진 생각입니다. 특히, 그 상금이 매력적입니다. 저도 그 사이트에 제 지식과 정보를 올려 볼 생각입니다. 하하.”
재준은 ‘스톡체인’ 사이트에 상금 제도를 도입했다.
그곳에 글을 올리면 정보 제공자 아이디가 글 하단에 노출된다.
사용자들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 아이디를 클릭해서 별을 줄 수 있다.
매달, 별이 가장 많은 아이디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가 매겨지고, 그들에겐 순위에 따른 상금이 주어진다.
1위는 만 달러, 2위는 8천 달러, 3위는 6천 달러.
그렇게 100위까지 차등으로 상금을 받게 된다.
강호석은 재준의 설명을 차분히 생각해봤다.
과연 가능할까.
매달 지출되는 돈은 자그마치 10만 달러인데.
이게 정말 이해타산이 맞아서 시작하는 걸까?
근데 마이클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고민하는 강호석과 즐거워하는 마이클을 본 박민수도 그리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매일 단기투자자들의 투자 패턴을 분석해 보내주세요.
임 대표의 요청이었다.
투자 패턴으로 투자심리를 읽어내겠다는 건가.
-종목 몇 개 분석해서 보낼 테니 스톡체인 시작하면 박 실장님도 글 올려 봐요.
미국에 있는 건 난데 왜 자기가 종목을 분석해?
박민수는 미국에 와서도 최신 기술적 분석과 관련된 논문을 찾아서 착실하게 읽고, 종목도 분석해 보았다.
그럼 뭐하냐고.
자신이 선택한 종목 수익률이 뛴다면 임 대표 종목은 날아다녀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벽이네, 벽이야.
이 벽은 뛰어넘지 말고 올라타야 하나.
스톡체인에 글을 올리면 1등은 따 놓은 당상인데.
혹시 나한테도 상금을?
박민수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강호석은 마이클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마이클, 실시간 증권 정보를 받는 데 문제없나요?”
“문제없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든 나스닥이든 아메리카 증권거래소든 어디든 약간의 수수료만 내면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물 거래도 가능해요?”
“네. 수수료를 내고 거래한다는데 싫어할 리가 있겠습니까? 미국은 수수료를 내고 정보를 사용하는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박민수와 강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 임 대표가 말한 대출 채권 유통도 가능합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한국 기업의 대출 채권인데요?”
“지금 한국은 IMF가 관리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미국 은행들은 IMF를 믿습니다. 구조조정을 위한 대출 채권은 좋은 거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채권 금리가 너무 좋습니다. 12%인데 사지 않는 은행은 바보지요. 투마로우뱅크는 4%만 수익으로 잡고, 8%는 다른 은행으로 넘길 것입니다.”
강호석과 박민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국은 전혀 문제될 게 없구나.
한국에서 정부와 고군분투할 임재준, 네가 걱정이다.
임재준!
눈을 똑바로 뜨고, 머리를 쳐들고 끝까지 한번 싸워 봐.
턱 들고 어깨 펴고, 마주 보고 당당히.
강호석은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내가 옆에 있어야 했는데.
강호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드디어, 오늘!
‘스톡체인’ 사이트를 오픈한다.
그동안 강호석은 재준의 지시에 투마로우뱅크 옆에 있는 건물을 임대해 투마로우뱅크 자회사인 ‘스톡체인’을 설립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트래픽이 발생하지 않도록 서버도 철저히 준비했다.
‘스톡체인’은 매체 광고를 시작하며, 알바로 수천여 명의 대학생들을 동원했다.
그들은 뉴욕증권거래소, 나스닥, 아메리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의 재무제표를 정리했다.
재무제표는 증권 투자의 기본이니까.
뉴욕증권거래소에는 대략 4,800개,
나스닥에는 대략 4,700개.
상장된 기업의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호재도 있었다.
알바들이 입소문을 내서 대학가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수수료가 거의 공짜잖아.
-미친 거네.
그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 중 인터넷 뱅킹이 있었다.
미국은 1992년부터 인터넷 뱅킹을 시작하여 은행 간의 인프라는 잘 돼 있었는데 수수료가 너무 비쌌다.
미국의 은행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그래서 재준의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했다.
‘스톡체인’ 고객이 투마로우뱅크를 이용하면 이체 수수료 무료.
즉, 투마로우뱅크와 ‘스톡체인’ 간의 이체는 공짜다.
단 투마로우뱅크는 도매은행이기 때문에 주식 계좌에 한해서 온라인 입출금만 가능하게 했다.
온라인으로 어떻게 통장을 개설하냐고?
그건 동진은행의 가상 계좌 시스템을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