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지금부터 나도 당신들을 죽일 거니까(2)
정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준은 테이블 위에 흩어진 서류를 정리했다.
제 발로 찾아왔다?
분명 어려운 이야기를 잔뜩 안고 왔을 테고.
풀어야 할 숙제가 많겠지.
비서가 문을 열자 이주환 사장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정 실장이 손을 내밀자, 이주환 사장은 두 손으로 맞잡았다.
“불쑥 찾아온 불청객을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사장님을 불청객으로 대할 수 있나요?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 사장이 정 실장 뒤로 보이는 재준을 보고 ‘저 사람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재준이 빙글 웃었다.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이 사장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자 정 실장이 차분하게 소개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의견도 좀 듣고 싶어 제가 현재증권 회장님께 부탁했습니다.”
“아, 네. …근데 혹시 회장님 손자분 아니십니까?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얼굴 다 팔렸구나.
괜히 메가폰을 들고 설쳤어.
정 실장이 이 사장에게 얼른 손을 내밀어 자리를 안내했다.
“일단 앉으시죠.”
이주환 사장은 마음을 잡고 정 실장에게 집중했다.
“요즘 사장들 만나면 현재증권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가요?”
“특히 실장님이 이끄시는 경제정책연구실 실적은 단연 으뜸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번 저희 건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주환 사장은 꽤 차분하게 정 실장과 이야기를 해나갔다.
재준은 이 사장을 보면서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좋네.
재준은 외환위기 때 퇴출당한 금융사 중 유독 세 곳을 눈여겨보았다.
첫 번째는 퇴출 위기에서 흑자 전환까지 성공한 조화은행.
두 번째는 은행 자산 건전성 2위인 동진은행.
세 번째는 금감위 경영평가위원회에서 최고점을 받은 장운증권이었다.
장운증권은 노사합의도 잘 마무리됐고, 모기업 장기운용은행으로부터 500억의 자금을 지원받으면 영업용순자본비율인 150%를 넘길 수 있었다.
영업용순자본비율은 은행의 BIS비율과 같은 의미로 증권사의 건전성을 나타내는 지표인데 150%를 넘지 못하면 경고 조치를 받게 된다.
장운증권은 모기업의 자금 지원 외에도 타기업 자금 지원이나 해외투자유치 계획도 있어서 영업용순자본비율 150%넘기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정부로서는 순조로운 금융권 조정을 위하여 장대에 매달아 태워 죽일 마녀가 하나 필요했다.
대기업과 연관이 없으며 작고 여린 금융기업 하나가.
정부는 장기운용은행의 계열사 장운증권을 선택했다.
이후,
[장운증권 직원들이 고객 예탁금으로 명예퇴직금 잔치]
[고객들의 돈으로 야반도주하는 몰염치한 행위]
[160억 퇴직금, 누구의 돈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요 일간지에서 퇴직금 먹튀 증권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회사는 망해야 해!
-고객 돈으로 자기들 배만 불렸잖아!
돈으로 대중의 감정을 건드리는 언론의 힘은 무서웠다.
평범한 증권사였는데 한순간에 파렴치한 회사로 낙인이 찍혔다.
지금까지 일을 맘에 두는 듯 이 사장이 한숨을 쉬자 정 실장이 다독여줬다.
“신문 기사는 읽었습니다. 고심이 많으시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금감원이 왜 우리를 저격하는지 말입니다.”
사장은 알고 있었다.
언론을 뒤에서 부채질한 게 금감원임을.
하지만, 그 뒤에 정부가 있다는 건 몰랐다.
오직 금감원만 설득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장운증권이 왜 정부의 표적이 되었는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금감원 하나도 어쩌지 못하고 무너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했으며 직원들의 상처만 깊어질 뿐이었다.
“장기운용은행은 왜 안 나서는 겁니까?”
“처음엔 나섰습니다. 장기운용은행 요청으로 저희 장운증권 전 직원이 사직서를 제출한 겁니다. 그 대가로 장기운용은행이 500억을 지원해 주기로 했고요.”
금감원이 자주 쓰는 방식이다.
일단 전 직원 퇴직 처리하고 일부만 수용하는 방식.
이미 몇 개 기업이 이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럼 500억이 들어오는 거 아닙니까?”
“근데 장기운용은행이 핑계를 대면서 저희를 피하는 것 같습니다.”
자금 지원하려는 순간 금감원 윤 원장이 장기운용은행에 전화 한 통 넣었잖아.
직원들에게 사표 받고 퇴직금을 지급하는 건 무슨 경우냐고.
장기운용은행 인가도 취소될 수 있다고.
“버려졌군요.”
“영업정지를 시킨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찍혔으니 기필코 죽이겠다는 거군요.”
“전 직원 사직서를 썼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
“처음엔 50%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00%로 바뀌었습니다.”
“퇴직금으로 지급된 비용은 얼마입니까?”
“160억입니다.”
“퇴직금이 많긴 많군요.”
이 사장은 정 실장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100억은 직원들의 주식 예탁금으로 사둔 주식입니다. 그걸 팔아서 돌려준 겁니다. 100억은 직원들의 돈입니다. 실제적인 퇴직금은 60억입니다.”
정 실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160억, 신문 기사와는 전혀 다르군요.”
정말 억울하다고 호소하려는 눈빛이었다,
정 실장이 이 사장에게 제안했다.
“이 사장님. 500억이면 된다고 하셨습니까?”
그 말에 석상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던 이 사장의 상념이 멈췄다.
“네, 맞습니다.”
조용히 미소 짓는 정 실장.
“신주를 발행하시든 채권을 발행하시든 결정하십시오.”
“500억 신주를 발행하면 현재증권이 최대주주가 됩니다.”
“채권을 발행하면 갚으실 순 있습니까?”
“그건 현재증권이 인수한다는…….”
이 사장은 잠시 말을 흐렸다.
“이 사장님, 사장님 자리와 직원들 자리는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행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주로 하겠습니다.”
“지금 개발하는 시스템에도 따로 투자하겠습니다.”
“그럼,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장운증권과 현재증권이 좋은 인연 맺게 돼서 영광입니다.”
재준이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사장님. 이 사실은 아직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됩니다.”
재준의 목소리에 돌아본 이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자, 제 얘기를 잘 들으세요.”
“…….”
“사장님은 이제 검찰 조사를 받을 겁니다.”
“네? 이미 저희 측 변호사가 문제없다고 했는데요.”
“제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장운증권 담당검사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이를 총장이 뒤집는다.
느닷없이 확대 수사를 지시한 것이다.
“아마 노조위원장이 경영에 책임을 지고 구속될 겁니다.”
“아니, 아니, 그게, 어떻게 노조위원장이 경영에 책임을 집니까? 좀 이상합니다. 노조는 경영 참여도 못 하고 의사결정권도 없습니다.”
“이상하죠. 자, 그럼 노사가 같이 여의도 본사에 가서 철야 농성을 하는 겁니다. 조사를 다시 해달라고. 아주 시끄럽게. 언론이 보도 안 할 수 없을 만큼. 아시겠죠.”
전례 없는 이상야릇한 사건으로 변했다.
죄가 없으니 만들어 덮어씌운 티가 팍팍 났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겁니다. 사장님이 아시는 대로 금감원과 검찰이 동시에 움직였습니다. 사건을 무마하기에는 너무 거물들이 움직인 겁니다. 웃기지 않겠습니까? 금감원이 유죄라 했는데 검찰은 무죄라고 하면 금감원이 뭐가 되겠습니까? 이제 막 국가를 위해 활동을 시작했는데.”
허…….
이 사장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금감원에 증자 계획 승인 요청하셨는데 승인이 안 떨어졌죠?”
“…….”
“저 썩어 빠진 기업들도 다 승인해주는데 자그마치 경영평가위원회에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은 장운증권만 승인이 안 떨어졌다? 이해 가시죠.”
“…….”
“타기업에서 자금 지원하는 계획도 있으시죠. 애쓰지 마세요. 그것도 인정되지 않을 겁니다.”
“…….”
“그리고 홍콩에서 외자 유치하려고 사람 보내시려던 계획도 하지 마세요. 비행기 타는 순간 장운증권 인가 취소됩니다.”
“…….”
재준이 주절이 떠드는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이런 억지스러운 과정으로 장운증권은 사라졌다.
그래서 재준에게 장운증권이 필요했다.
금감원과 한바탕 싸워야 하는데, 먼저 장운증권을 살리고 싸워야 금감원에 더 커다란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까.
“지금부터 할 일은 뭐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의도 본사에 다 몰려가서 드러눕는 겁니다. 아셨죠? 언론에 최대한 노출이 될 때까지 투쟁, 투쟁. 아, 요즘 날이 추우니 오리털 잠바 하나씩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
정 실장은 왼손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회장님이 왜 여기를 누르는지 이제 알겠네.
이때, 재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천 실장님.”
-놈이 도화은행에 들어갔습니다.
“도화은행이요? 알겠습니다.”
도화은행이라는 말에 정 실장이 재준을 쳐다봤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마무리 잘해 주십시오.”
정 실장은 대답 대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화은행이라면 부실 은행으로 지정된 곳인데.
또 누구 하나 죽이러 가시는구나.
***
도화은행 주차장.
재준과 천 실장은 차 안에서 천성일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성일이 뭐가 좋은지 발걸음도 가볍고 휘파람까지 불며 걸어왔다.
“금감원 감투가 좋긴 좋네. 다들 쫄아서는.”
큭큭큭.
천박하게 웃으며 자신의 자동차에 키를 꽂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웠다.
“누구요?”
“그냥 차에 타.”
위압적인 외모의 사내의 사내가 천성일의 손을 잡고 키를 돌렸다.
앞문이 열리고 천성일이 고개를 돌리며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이 내가 누군지 알고.”
“앞좌석 말고 뒤로.”
아악!
사내가 뒷좌석 차문을 열고 천성일을 던지듯 반쯤 구겨 넣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발로 단단히 눌렀다.
천성일이 발버둥을 쳐봤지만 누르고 있는 발은 마치 바위처럼 단단해 꼼짝하지 않았다.
“야, 너 이거 안 치워? 이거 범죄야, 알아?”
“조용.”
“미친놈.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천성일이 고함을 치며 발버둥을 치는데 반대편 문이 열리고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경부은행은 살려준다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성의로.
-참, 사람.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내가 금감원 가서 서류 잘 꾸며서 명단에서 빼 드릴게.
뭐야?
놀란 마음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혹시 금감원 윤 원장이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재준이 빙글 웃으며 녹음기로 천성일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너 뭐야. 어디서 협박질이야?”
“어허, 이 사람, 정말 못됐네. 협박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한 거잖아. 또 하나 틀어줄까?”
재준이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니,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X발, 원장님이 장운증권은 안 된다고 하시니까. 어쩔 수 없잖아. 자, 이거. 받아.
-알겠습니다. 내일 바로 기사 내보내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검찰하고는 이미 이야기 끝났거든. 노조 위원장 바로 구속 수사할 거야. 기사 잘 나가면 다시 만나자고.
재준은 귀중한 정보를 얻은 것처럼 녹음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이거 뭐야? 이거 신문 기자하고 나눈 이야기네. 이런 것도 있었어? 굉장하네요. 실력들이 아주 와. 안 그래? 천 씨.”
“너 이 새끼, 녹음기 이리 내놔.”
아악!
천성일이 손을 뻗으려 하자 천 실장의 발에 더욱 힘을 가해졌다.
그는 오만 가지 인상을 쓰며 포기한 듯 뒤로 머리를 떨어뜨렸다.
우후.
재준은 차에 타더니 좌석에 앉았다.
“더 들을래? 이 테이프가 2시간짜리인데. 여기 꽉 차 있는 것 같더라고.”
“야, 너 대체 누구야. 나 잘못 건드렸어. 알아?”
“와, 이거 굉장히 멍청하네. 그냥 딱 보면 모르나? 다 준비 끝내고 온 거라고 생각 안 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이런, 이런. 내가 금감원의 천성일 국장을 건드려 버렸네. 이거 어쩌지?”
뭐?
천성일은 차분히 숨을 진정시켰다.
“원하는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