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어찌 도와주지 않으리(3)
한성복 행장은 해답을 요구하는 학생처럼 이시형을 보았다.
그러나, 이시형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만 살짝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행장님 말,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미국 은행이 되는 게 껄끄러운 겁니까?”
“아닙니다. 총재님, 저한테는 은행장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돈놀이하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주판알을 튕기고 이윤이 남아야 움직이죠. 그래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미 금융계를 떠나셨는데……. 왜 도우려고 하시는지. 혹시 교수님 뒤에 누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회유에 넘어가실 교수님은 아니시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정계 진출도 물 건너갔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왜 국부 유출을 하려 하십니까?
허허허.
이시형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한 행장을 향해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행장을 다시 빤히 쳐다보았다.
한 행장은 숨이 꼴깍 넘어갈 것 같았다.
내 표현이 부족했나?
원하는 질문이 따로 있다는 뜻인가…….
“총재님…….”
이시형 교수는 말없이 턱을 문질렀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조화은행이 무얼 할 수 있습니까?”
“은행의 본업은 대출입니다.”
“그래서 30%의 이자로 기업에 대출을 해주시겠다는 말이군요.”
30% 이자, 높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총재님. 은행은 엄연히 이윤을 추구하지만, 사회적 책임도 있습니다. 은행이 기업에 대출해줘야 기업이 살아남습니다. 이런 위기에 기업 몇 개는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30% 이자로요? 그거 기업을 죽이는 거 아닙니까?”
“네?”
한 행장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이 총재가 ‘너 기업 다 죽일 셈이야?’라는 듯 쳐다봤다.
“꼭 그렇게 생각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래요? 행장님은 개인적으로 30% 이자에 돈을 빌려 쓰실 수 있겠습니까?”
후.
한 행장은 할 말이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외국 자본인 투마로우뱅크가 이자 10%로 국내 기업에 대출을 해준다고 합디다.”
“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정부가 엄연히…….”
잠깐. 외국계 은행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한국 기업을 돕겠다는데, 정부가 나서서 못하게 막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IMF가 못하게 막는다면 모를까.
“자, 조화은행은 또 뭘 할 수 있습니까?”
한 행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떤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사실, 국내엔 크게 관심 없습니다.”
“아, 그럼 해외에는 관심이 있습니까?”
“총재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을 살리고 싶으신 거겠죠. 하지만…….”
한 행장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천천히 말하세요.”
이 총재는 한 행장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마음속 거센 파도가 잠잠해지자 한 행장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희는 동남아 시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총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트남에 진출을 앞둔 거 압니다.”
아신다고요?
아직 외부로 흘리지도 않은 정보를 총재님이 어떻게…….
베트남 진출 사업은 자신과 몇몇 이사를 제외하곤 논의된 적이 없는 프로젝트였다.
갑자기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지금은 잠시 보류된 상태였는데.
궁금했지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정보의 출처를 물어보는 것은 기업의 정보가 외부로 새나갔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밖에 안 되었다.
이사들을 하나하나 잡고 누가 발설했냐고 묻기에도 우습고.
한 행장이 나직하게 탄식하자 이 총재가 이어 물었다.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한국은 이미 금융업이 포화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직 동남아는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맞는 말이다.
지금 시중은행이 몇 개인가?
국책은행 세 개, 특수은행 두 개, 시중은행 열한 개, 지방은행 열 개, 여기에 새마음금고, 다양한 협동조합까지.
이 작은 땅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그러니 동남아 지역으로 눈을 돌린 건 훌륭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게 다입니까?”
이 총재는 한 행장의 이유가 한참 어설프다 느꼈다.
지금 자신이 묻고 있는 것은 조화은행 인수 건인데, 한 행장은 자꾸 딴 길로 새고 있었다.
은행을 내놓을 건지, 말 건지.
그것만 말하면 끝날 일을 쓸데없이 질질 끄는 것처럼 보였다.
후.
“대기업들 등쌀 때문도 있습니다. 대기업들은 금융권에 뛰어들기 위해 상호신용금고나 투자금융을 세웠다 팔았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또 딴 길로 새고 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대기업은 은행을 인수할 수는 없지만 신용금고나 투자금융, 증권사는 가능했다.
샀다 팔았다 하는 이 짓을 왜 하냐고?
언젠간 법은 변할 거니까.
대기업도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될 것이니까.
그때를 위한 몸풀기였다.
특히 신용금고나 투자금융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기업은 은행이 부실해지면 우회로를 통해 인수하려고 합니다. 은행이 꼭 자력으로 부실해지지는 않는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언론과 정부에 로비도 은행의 부실을 만들어내니까요.”
조화은행이 현재 당하고 있는 것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객관적인 지표로는 독자 생존이 가능했지만, 정부는 다른 은행에 매각하려 한다.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한 것일까.
은행 대형화를 실현하려는 정부의 의지로 노골적인 강제 합병이 진행 중이었다.
“조화은행이 원하는 것은 세계 진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투마로우뱅크가 원하는 것과 똑같은 거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이제 그만 합시다.
“혹시 욕심이 남아 있는 건 아니고요?”
한 행장은 긴 침음을 흘리며 두 눈을 감았다.
왜 모르겠는가.
잘 안다. 이제 물러날 때라는 것을.
하지만 조금 더 자리에 남고 싶은 건 인간이라면, 행장의 자리에 앉았던 이라면, 어쩔 수 없는 마음 아닐까.
“행장님의 욕심에 계열사와 직원들이 길거리에 나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한 행장의 입에 작은 미소가 피었다.
“물러나겠습니다.”
“어려운 선택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계열사와 직원들은 전부 데리고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 행장은 후련하게 숨을 내뱉었다.
안다.
지금은 부도난 기업들 채권을 해결하기 위해 공적자금이 투입되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BIS비율을 맞추어야 정상적인 은행영업이 가능하니까.
근데 왠지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지금까지 하라는 대로 한 것밖에 없는데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너무 억울했다.
솔직히 경쟁 은행에 조화은행이 합병되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지금 가장 경쟁력 있는 은행은 조화은행이다.
그런데 조화은행보다 못한 은행에 인수된다는 건 정말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애초에 총재님이 인수 의사를 밝혔을 때 결정했다.
하지만,
혹시나 총재님이 자신에게 은행을 맡기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걸었었다.
욕심이었다.
총재님의 계속되는 질문이 말해주었다.
이제 그만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깊은 생각에 잠겨 드는 한성복 은행장을 뒤로하고, 이시형 교수는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날세.”
-고생하셨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시형 교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은행?
현재증권이 은행을 인수하겠다고?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건 안 된다고 슬쩍 한번 떠봤다.
임병달 회장의 손자이긴 했지만, 욕심이 과하다고.
하지만,
그놈 언제 그런 눈빛을 지니게 되었는지 아주 맘에 들었어.
온라인 트레이드를 성공시켜 미국과 손을 잡고, 정부를 압박하고, 현재증권을 키우겠다.
이게 가당키나 한 생각인가.
하하하
하지만 그 말에 이시형 교수는 다시 한 번 삶에 재미를 느꼈다.
임재준.
그 젊은이의 눈빛은 시장 건어물집에 있는 푸석푸석하고 말라비틀어진 생선의 눈이 아니었다.
고기잡이 그물을 뚫고 나온 파닥파닥 살아 움직이는 눈빛.
아예 어부를 잡아먹을 듯한 놈이라니까.
그 눈빛에 이시형은 흔쾌히 조력자로 나섰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정중하게 부탁하는 그 태도는 고지식한 자신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전문가의 디테일이 필요합니다.
-숲을 이루려면 조경학자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듯 기업을 인수하고 나라를 살리려면 총재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어른의 지혜를 빌리고 싶다는데…….
어찌 도와주지 않으리.
이시형은 허허허 웃었다.
“대학교에 가서 잔소리 좀 하려 했는데. 좀 더 늦춰야겠어.”
***
현재증권 회장실.
임병달, 이시형, 정 실장, 그리고 재준이 자리에 앉아 TV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미국 투마로우뱅크 조화은행 인수 희망]
“지금 투마로우뱅크는 어떠냐?”
“미국과 교역이 완전히 풀려서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쑥쑥 자라났는데?”
“농장 한 군데를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농장?”
“웨거너 농장이라고 텍사스에 있습니다.”
“농장 하나 뚫었다고 성장씩이나 할 수 있어?”
할아버지, 이거 그냥 농장 아니에요.
면적만 2066㎢ 미국 최대 규모의 농장이다.
제주도 면적이 1848㎢이니까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가운데는 목초지로 소 7500마리, 말 500마리를 사육한다.
그리고 나머지 땅은 1200개의 유정에서 매년 67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해 내고 있다.
석유의 양은 한국 하루 소비량의 27%나 정도 되었다.
재준이 텍사스에 투자사를 만들려는 의도도 이 농장에 있었다.
원래는 2015년에 이 농장이 8천억 원에 매물로 나온다.
이유는 형제간의 재산 싸움이었다.
재준은 투마로우뱅크를 이용하여 웨거너 농장의 장남과 협약을 맺고 한국 소고기 수출을 독점하라고 지시했다.
육류 판매량은 이 당시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지속적인 증가로 2020년에는 18억 달러에 이르기 때문에 투마로우뱅크를 묶어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재준은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박민수가 노발대발했다.
-이 정도 일은 저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
화까지 낼 필요는 없었는데.
박민수도 가끔 한 성깔 한다니까.
어쨌든,
“농장이 제주도 보다 커요.”
“뭐?”
“그게…… 농장이야?”
“7500마리 소를 방목해서 키워요. 석유도 나오고.”
“그 정도면 주요고객이겠구나. 허허.”
허허롭게 웃는 임병달이 이 총재에게 의문을 던졌다.
“금감원에서 허락할까?”
“안 할 수가 없지.”
이 총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재준이 빙글빙글 웃으며 거들었다.
“보험이라도 들어 드릴까요?”
“보험?”
이 총재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고 임병달은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것이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정 실장은 그러려니 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금감원 부실 리스트에 들어있는 지방은행 하나, 증권사 하나를 추가로 인수하는 겁니다. 자기들 걱정거리 덜어 주는데 싫다고 할 리는 없잖아요?”
“좋아할까?”
“티는 내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싫어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어차피 처리해야 하는 거 공적자금 안 들이고 해결할 수 있는데.”
“거기가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