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64화 (64/477)

제64화 어찌 도와주지 않으리(1)

대통령이 바뀌었다.

재우 그룹이 SSY자동차 인수를 최종 확정했다.

재준은 손 회장과 다음 먹잇감으로 SS자동차 인수를 의논했다.

환율 변동제 폐지로 인해 달러가 2,000원을 돌파했다.

현재증권은 보유한 달러를 시장에 쏟아부어 달러 상승을 멈추게 만들었다.

1차로 10개의 종금사 인가가 취소되었다.

그중에 우인 종금사는 빠져있었다.

김혜림은 재준을 볼 때마다 아무 말 없이 울었다.

금융감독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신자유주의 정책.

IMF가 정부의 개입을 차단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기라고 압박했다.

정부는 이 정책의 일환으로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용관리기금의 4개 감독기관을 통합하여, 공공기관인 금융감독위원회를 신설하고 산하에 금융감독원을 두었다.

다시 말하지만 공공기관이다.

공기업이 아니란 소리다.

즉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헛소리를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이제부터 금감원이 기업에 칼질해도 정부 책임이 아니다.

드디어 진짜 무식한 정치가 시작되었다.

금융감독원 회의실.

윤헌재 초대 금감원장은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IMF가 기업 대출 이자를 권고하는 서류였다.

말이 권고지, 강요와 다를 바 없었지만.

서류를 보면 볼수록, 그의 머릿속은 맑아지기는커녕 점점 물먹은 솜덩이가 꽉 들어차는 것 같았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앉아 있는 임원들.

기획/보험을 담당하는 수석부원장,

은행/중소서민금융을 담당하는 부원장,

자본시장/회계를 담당하는 부원장,

금융소비자보호처 처장,

등등등.

그들은 윤 원장의 모습을 지켜보며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윤 원장이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이자가 높아야 시중의 돈이 은행으로 몰린다. 이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이자를 29.5%로 정해요?”

“부실기업을 솎아내고 금융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하…….

휴…….

윤 원장의 입에서 탄식과 한숨이 쏟아졌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따르란 거지요. 지금.”

“…….”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만 숙일 뿐.

“금리가 29.5%인데, 과연 살아남을 기업이 있을까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금융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박입니다.”

“자기들이 직접 우리 기업들을 취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

“나쁜 놈들!”

금융을 손에 넣으면 대출을 해준 기업들은 자연히 손안에 쥐게 된다.

탁, 탁. 탁.

탁자를 두드리던 윤 원장의 손이 멈췄다.

“우리가 먼저 칼을 빼 듭시다. 금융개방은 안 됩니다.”

“그러시다면…….”

“기업의 부채 비율은 200%가 적정선이라고요?”

“네.”

“부채 비율 200%가 넘는 기업은 실적을 개선하든지 아니면 계열사 정리하라고 지시하세요.”

“하지만 원장님, 기업들도 빨리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음. 그럼 전부 부도 처리 합시다.”

“네?”

남의 손에 죽이느니 내 손으로 죽이겠다.

임원 중 한 명이 윤 원장에게 읍소했다.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봐줄 것은 봐주면서 해야 합니다. 부채가 많다고 해서 그 기업이 부실기업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원칙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어떤 회사는 봐주고, 어떤 회사는 칼을 대고.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원칙이 흔들립니다. 적정선인 200%로 넘기면 다 잘라버리세요.”

윤 원장의 별명은 ‘원칙주의자’였다.

“기업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내가 저승사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 정부에 피해가 가지 않습니다. VIP 입장도 고려하셔야죠.”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세요.”

부채가 많다고 부실기업은 아니다.

하지만 IMF의 강한 압박으로 궁지에 몰린 정부는, 결국 제법 탄탄한 기업까지 부실기업으로 몰아가며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IMF가 선진화된 정책이라며 떠받들던 신자유주의 정책.

개뿔이 신자유주의.

여기서 ‘신(新)’이란 말이 있다고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부가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케인즈주의에 반하여 나온 정책으로, 정부는 시장에서 손을 떼라는 보수자유주의에 가깝다.

케인즈주의에 의해 정부의 힘이 강력해지며 오일쇼크, 영국(막장지랄)병,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과거로 돌아간 정책일 뿐이다.

가장 웃긴 건 신자유주의에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짬뽕되어서 내놓는 철학도 제각각이란 거다.

아니, 보수와 자유의 구분도 못 하는 이들이 천지에 깔렸었다.

보수와 자유가 뭐냐고?

한 단어로 보수는 성장, 자유는 존중이다.

그러니까 보수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는 ‘나 좀 돈 좀 벌려고 하니까 건들지 마라’겠지.

이 지랄맞은 신자유주의가 만든 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맘대로 해보라고 시장에 맡겨 놓았더니 아주 생지랄을 해서 천문학적인 돈을 해 쳐드시고 세계를 수렁으로 빠뜨렸다.

이건 이거고.

지금 금감원의 윤 원장께서 하는 폼이 신자유주의는 아닌데…….

왜 시장에 맡기지 않고 자기가 칼춤을 추는 걸까?

아, 공기업이 아니라 공공기관이다?

“지금까지 남의 돈으로 누릴 만큼 누렸으면 이제는 고분고분 말을 들을 때도 됐습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책임을 져야지요.”

윤 원장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임원들은 윤 원장의 거친 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가 국가를 걱정해서였을까?

천만에.

그동안 자신들이 기업한테 받은 돈은 품위를 유지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철판을 깔고 그 기업들을 부도 처리해야만 했다.

그 부담감.

그 무게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윤 원장은 그들은 표정을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왜 모르겠는가.

품위 좋아하고 있네.

아니, 욕을 섞어야 말을 듣겠지.

“여러분, 고개 드세요. 지금까지 당신들이 해 처먹은 거 내가 다 압니다. 과거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청탁으로 업무 집행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며 우선 그놈부터 죽일 겁니다. 뇌물? 내 눈에 걸리면 각오하세요.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금감원의 원칙은 오직 하나입니다. 부채 비율 200% 넘기면 다 죽인다. 아셨습니까?”

그 엄포를 끝으로 윤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자, 부원장들은 부리나케 그 뒤를 따라나섰다.

“원장님, 10대 그룹도 손을 봅니까?”

윤 원장이 미간에 힘을 주고 뒤를 돌아봤다.

“그 기업들은 제가 직접 처리할 테니 놔두세요.”

“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자리에 남은 원장보와 국장들은 서로 탄식을 쏟아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우리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지.”

“금융감독위원회가 대통령 바로 밑인 건 알아. 그런데 국회의원과 엮여 있는 기업은 어쩌라고?”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달랐다.

‘단단히 챙길 좋은 기회다.’

‘대놓고 돈 받는 놈이 어딨어. 나만 안 받으면 손해지.’

‘부실기업 명단에서 빼준 대가로 이번엔 해외에 있는 부동산으로 받아야겠다.’

이렇게 대기업은 대부분 조용히 넘어갔다.

또한 부실기업이 아닌 몇몇 기업들은 한밤중에 날벼락을 맞았고, 건실한 기업으로 둔갑했던 부실기업들은 몇 해 후 부도를 맞기도 했다.

***

현재증권 회장실.

“정 실장하고는 마무리 지었고, 이제 네 계획을 말해봐.”

금감원의 출현으로 재계와 금융계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모두 눈치를 보며 돈이 되는 것은 전부 팔아 버렸다.

부채 비율 200%를 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임병달을 보는 재준은 빙글 웃으며 사악한 손자로 돌아왔다.

“정부의 금융 정책에 제동을 걸어볼까 합니다. 정부가 책정한 금리가 29.5%라는데 좀 웃겨서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저희가 앞장서서 10% 금리로 대출을 해 줄 겁니다.”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이러는 걸까?

웃기는 소리지.

10% 이자로 빌려주면서 무슨 기업을 살려?

기업 입장에선 10%만 해도 곡소리 나는 이자인데.

그보다는 금감원 열받게 한 다음 윤 원장이랑 대차게 한번 붙어 보려고 그러는 거지.

“담보는?”

“당연히 받아야죠. 주식이나 부동산, 뭐 돈이 되는 건 뭐든지요.”

“음.”

할아버지를 설득할 땐 조금 심각하게.

“고금리는 은행으로 흘러 들어간 돈을 시장으로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화폐유통이 경색되어 경기가 악화되고, 기업은 줄줄이 도산해요. 이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희는 저금리로 대출을 해줘야 합니다.”

“기업 선정은?”

“기업 선정도 서류를 까다롭게 실행해 건전한 기업으로 한정할 겁니다.”

이미 제가 다 준비했습니다.

썩을 대로 썩은 기업의 도산까지 막아줄 필요는 없습니다.

“재준아, 저금리로 대출을 하다간 정부와 마찰이 일어날 거다. 정부를 우습게 보지 마라. 기업을 향해 휘둘렀던 칼을 현재증권에 휘두를 수도 있다.”

정부?

그래, 정부는 IMF와 미국 재무부의 압박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현재증권의 행보에 태클을 걸겠지.

하지만,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할 방법은 있습니다.”

“설마, 네 그 정보력을 이번에도 사용할 거냐?”

“맞습니다. 비밀을 털어 검찰 조사를 받게 할 수도 있고, 은행에 압력을 행사해 대출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만…….”

“안 돼. 관료들을 만만하게 봤다간 평생 불구로 살 수 있다.”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세요.”

“그래?”

설마 저들의 장점이 공작과 선전인데 그걸로 싸울 순 없죠.

“이번엔 미국을 이용할 겁니다.”

“미국을 뒷배로 세우겠다는 뜻이냐?”

“그것과 비슷합니다.”

“미국을 움직이기는 어려운 일이야.”

“할아버지, 요즘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IMF와 미국 재무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상식을 벗어난 고금리로 미국 재무부는 IMF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고, IMF는 우리의 권한이니 참견하지 말라며 재무부를 무시하고 있다고.”

임병달 회장이 재준을 빤히 봤다.

손자지만, 참 알 수 없는 놈이네.

정보력이 한국을 넘어 미국까지 있는 건가?

어떤 루트로 아는 것인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강호석이 따로 정보기관이라도 차린 건가?

“계속해 봐.”

“미국이 저희 손을 먼저 잡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어떻게 설득할 작정이냐?”

“미국 증권 시스템을 이용하면 가능합니다.”

“시스템?”

“네. 미국 증권 시스템을 장악할 겁니다. 온라인으로 쉽게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10조 달러 이상의 돈이 온라인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근데 시스템을 운영하는 회사가 망해서 멈춘다? 그들은 상상하기도 싫을 겁니다. 시스템이 멈추면, 한 나라의 경제는 단숨에 맨홀에 빠지니까요.”

“그래서 재준이 넌, 그 시스템으로 협박을 하겠다?”

“협박이 아닙니다. 미국이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미국에서 준비 중이라고?”

“네.”

아이고 머리야.

임병달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꾹꾹 눌렀다.

“넌 어째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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