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뭐해. 임 회장님 손자야. 찍어(2)
“재준아.”
이무열이 현수막을 가지고 달려왔다.
“진기야, 무열이랑 현수막 정면에 걸어.”
둘이 객장 정면에 현수막을 걸려 하자 직원들이 고함을 질렀다.
“뭐 하는 거야?”
“객장을 정면으로 가리면 어쩌라는 거야?”
재준이 서형길을 노려보자, 서형길이 앞으로 나섰다.
“조용히 안 해? 내가 계획이 있어서 하는 거야. 왜?”
아, 네.
서형길의 일갈에 직원들이 물러서자 최진기와 이무열이 객장을 가로질러 현수막을 걸었다.
[현재증권은 망하지 않습니다.]
저게 뭐야?
뭐긴 뭐야. 간결하고 강한 임팩트가 있는 문구지.
복잡하지 않고 뇌리에 쏙쏙 박히잖아.
서형길이 영문을 물어보려 다가가는데 김혜림과 박승하가 카트에 복사된 종이를 실어왔다.
“재준아.”
“저 앞에 가져다 놔.”
찌이이이이잉.
메가폰에서 귀를 찢을 듯한 잡음이 괴성을 질렀다.
사람들이 귀를 막고 다시 재준을 쳐다봤다.
잡음이 줄어들고 메가폰을 통해 재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환매를 원하시면 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재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바로요. 그러니 안심들 하시죠.”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성실한 인상과 단호한 목소리에선 신뢰감이 묻어났다.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 하나둘 안도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선택은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지금부터 1년간 현재증권은 예탁금을 받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환매하시려는 분은 왼쪽, 환매를 원하지 않는 분은 이대로 길 건너에 있는 푸른가든으로 가시면 됩니다. 간단한 식사와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재준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떡밥만 던졌을 뿐.
사람들은 재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푸른가든?
-거기 되게 비싼 곳이잖아.
-그만큼 고기도 끝내주지. 너무 맛있어서 지방 사람들도 먹으러 온다잖아.
사람들은 순간 자신이 환매하러 왔다는 걸 잊은 채 푸른가든의 고기에 대해 수군거렸다.
재준이 말을 더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현재증권에서 지불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이거 어쩌지?
-뭘 어째, 환매하고 은행에 돈 넣어야지.
-현재증권 돈 많다잖아. 그 비싼 푸른가든도 오늘 통으로 전세 낸 모양이고. 환매야 언제든 해도 되지.
-그건 그렇지. 오늘만 지나면 되잖아. 그럼 그냥 푸른가든에나 가자고.
-이봐 같이 가야지.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자, 자. 환매하시려는 분 왼쪽으로 빨리 움직여 주세요. 신청하시면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우물쭈물하는 사람들.
빙글거리며 웃는 재준의 얼굴.
그러나 아직 재준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고참 펀드 매니저 한 명이 재준에게 다가왔다.
“환매? 누가 네 맘대로 이런 결정을 내리라고 했나? 이제 1년 넘은 사원이 어딜 감히 환매니 뭐니 지껄이는 거지? 누가 이런 권한을 줬냐 말이야?”
권한이라…….
재준은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서 고참 펀드 매니저를 내려다봤다.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그 권한.”
“뭐라고? 이놈이 헛소리를.”
고참 펀드 매니저가 재준의 멱살을 잡으려는 찰나.
“야, 어딜 도련님 몸에!”
“야, 너 재준이에게 손대면 죽는다.”
“어허, 물러서.”
“이놈이 감히 내 손자에게 손을 대!”
임병달과 두 부사장, 서형길 실장이 동시에 나섰다.
손자?
직원 전체가 일순 고요해졌다.
뿐만 아니라,
방송국 카메라.
역대급 환매 소동을 촬영하기 위해 3사 방송국이 출동해 있었다.
찍어!
서형길이 카메라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메라 안 꺼?”
도련님!
안 된다, 이놈들아!
서형길 실장은 다짜고짜 카메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뭐해. 임 회장님 손자야. 찍어.
찍고 있어. 그보다 저 달려오는 사람 막아.
카메라맨 이외의 사람들이 서형길에게 달려들어 덮쳤다.
“당장 카메라 꺼.”
막아.
“야, 너희들 뭐해? 당장 카메라 안 뺏어?”
와아아아.
현재증권 펀드 매니저와 애널리스트, 브로커들이 날듯이 뛰어다니며 도망치는 카메라들을 쫓았다.
그리고 이 장면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9시 뉴스에 방송되었다.
[현재증권 임병달 회장의 망나니 손자 또 일내다.]
***
난 무사히 현재증권의 환매 요청을 막아냈다.
지금까지 현재증권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발악했던가.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이 주변에서 나를 경계하는 눈들을 보라.
-그게 그렇다는 거지.
-그래, 그거라니까.
-진작에 그걸 알아차려야 했는데.
-에이, 그게 그렇게 쉽게 되나.
-그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 불편해.”
재준은 출근부터 어제 그 난리를 친 대가를 톡톡히 받고 있었다.
이제 자유롭게 활동하긴 다 글렀네.
엘리베이터로 다가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재준의 뒤로 빠졌다.
수군수군.
띵.
엘리베이터가 서자 재준은 안으로 들어갔다.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재준의 손이 민망해졌다.
왜? 왜 아무도 안타는 건데?
“잠시만요. 같이 가요.”
누군가 엘리베이터로 달려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왜? 너까지 왜 안 타냐고?
“아, 오늘부터 계단으로 올라가기로 했지. 운동 삼아. 맞다. 맞아.”
라며 김혜림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야, 그냥 가면 어떡해.
에라이, 맘대로 해라.
억지로 태울 수도 없고.
재준은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내렸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여기저기서 고개를 숙이며 지나갔다.
저 사람들 내 선밴데.
어, 어, 저 사람은 어제 그 고참 펀드 매니저잖아.
재준은 너무 민망해서 경제정책연구실로 들어갔다.
썰렁~
여기도 마찬가지로 재준이 들어서자 동기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재준을 바라봤다.
웬일일까?
평소에 내가 항상 제일 먼저 출근했는데.
어라, 사무보조원까지 이렇게 일찍 출근하다니.
흠. 흠.
“좋은 아침.”
아무도 나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에잇!
재준은 연구실을 나와 회장실로 향했다.
***
하하하. 하하하.
어제 벌어진 사고가 아침 뉴스에도 나오고 있었다.
한 손에 메가폰을 쥐고 책상 위에서 고객들을 다루는 재준과 카메라를 잡으려고 지랄발광을 하는 서형길 실장의 모습에 임병달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하하하하하하.
임병달은 결국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내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너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데 네가 무슨 재주로 직장 생활을 사원으로 할 수 있겠냐?”
“할아버지. 저도 다 생각이 있었어요.”
저라고 뭐 처음부터 재벌처럼 사는 게 싫었던 줄 아세요?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 그렇지.
그리고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그땐 재벌이란 옷이 안 맞았다고요.
“이제 어쩌냐. 저렇게 뉴스에 나왔으니 대한민국 사람들이 네 얼굴을 다 알아봤을 거다.”
“카메라가 멀어서 제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못 알아 볼 겁니다.”
“신문에 나온 건 어쩌고.”
아, 맞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내 얼굴이 실렸다.
“할아버지, 근데 지금부터 어쩌죠? 사람들이 저를 피하는데요.”
“당연하지. 지금까지 주인을 몰라본 죄책감을 느끼는 거다.”
“직책을 달아야 하나요? 실장이나, 상무 같은.”
“글쎄다. 직책은 다는 게 아니라 주는 거다.”
헐!
그렇게 생각하는 거구나.
“그렇군요.”
“사장을 달든 실장을 달든 우린 별로 소용없다. 네가 누군가를 사장으로 앉히면 넌 사장보다 높은 자리에 있게 되는 거야.”
“그럼 누구 하나 높은 곳에 앉힐게요.”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 거냐?”
“네.”
“누군데?”
“정 실장님이요, 정 실장님을 은행장으로 만들겠습니다.”
“정 실장을 왜?”
“일단 제가 은행장보다 높은 사람이 돼 보려고요?”
“벌써?”
“지금이 기회잖아요.”
“그렇긴 하지. 생각해 놓은 은행은 있고?”
“조화은행이요.”
조화은행?
“이런 도둑놈을 봤나. 이놈아, 1,000억 꿀꺽하려고 은행을 인수해?”
귀신이다.
“겸사겸사하는 거죠. 그리고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뭔데?”
“투마로우뱅크가 조화은행을 인수해서 덩치를 키우는 겁니다.”
“은행 인수한다고 덩치가 커지냐?”
“그건 위장이고, 지금 경제 위기잖아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기업들이 속출할 겁니다. 우리가 기업을 선택해서 대출해 주려고요.”
“이자가 비싸서 우리 돈 안 쓸 텐데.”
12월에 최고금리를 25%에서 40%로 확대한다.
그렇다고 진짜 40%까지는 안 가지만, 은행은 개인과 기업에 대출을 해주고 이자 30%를 받았다.
30%의 이자…….
이걸 과연 이자라고 할 수 있을까?
제대로 이자를 주고 대출을 할 수 있는 기업이 있을까?
왜 IMF는 이런 이자율을 제시했을까?
그건 기업이 대출을 못 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소위 나라를 구조조정 하는 거였다.
죽을 놈들은 빨리 죽으라고.
그래서 난 10% 이자로 대출을 해줄 생각이다.
10% 이자라니, 2022년이면 싸대기 맞는 숫자인데.
대출해줄 곳은 2022년까지 살아남는 건실한 기업에만.
예를 들면 SS전자라든가, POSK라든가, KTT라든가, CZ같은.
한국 알짜 대기업의 채권자가 되기에 딱 좋은 기회니까.
정부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라고?
당연히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
근데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어 놓으면 된다.
임병달은 대출이란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대출? 그만한 돈이 있나?”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출이 많으면 은행 BIS비율이 급격하게 줄어들 텐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기업에 대한 대출금은 회계상 차입금 항목에 기록되지 않게 채권으로 만들어 미국 투마로우뱅크에 팔 것입니다. 투마로우뱅크는 그 채권을 미국 대형은행에 팔고……. 그렇게 되면, 외환위기에 건실한 기업을 대부분 살릴 수 있습니다.”
“대출을 채권으로 만들어 판다? 대출금이 부채로 남지 않게?”
“네. 부채가 없으니 정부가 제시한 BIS비율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임병달이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우리한테 남는 게 없는데.”
“할아버지, 우린 한화로 대출해주고 투마로우뱅크는 달러로 결제하잖아요.”
“그 달러가, 2000원까지 올라간다는 얘기로구나? 이익은 그렇다 치고. 하지만 증권사가 은행을 인수한다? 투기 자본으로 오해할 텐데. 이제 현재증권 이미지도 중요해.”
“소문을 차단해야죠.”
“방법이 있는 것 같구나.”
재준이 잔잔하게 웃는다.
“이번엔 정 실장님을 잘라주세요.”
“뭐?”
임병달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렇구나. 내가 또 나쁜 놈이 되어야 하는 거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자기학대를 하십니까.”
“네가 그렇게 만들고 있잖아.”
“이번에는 설명 좀 하십시오. 지난번에 강호석 선배 한강 물 온도 확인할 뻔했습니다.”
“뭐? 그렇게나 심각했어?”
그렇다고 그렇게 얼굴색이 허옇게 뜨십니까?
“알겠다. 근데 너 정 실장이 껄끄러운 거냐?”
“제가 아니라 정 실장님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 실장님 포지션이 애매합니다. 정 실장님이 불편할 거 같아요. 전 친구의 아들이잖아요. 그리고 정 실장님이 은행장 자리에 계시면 무엇보다 안심이 됩니다. 현재증권과 별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데 나중에 자기 거라고 우기면 안 되잖아요.”
별개의 사업체라는 말에 임병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겠지.
그리고 추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정 실장을 보내고 나면.
그럼, 나는 어쩌란 말이냐.
“네 뜻은 알겠다. 그런데 굳이 은행일 필요가 있을까?”
“투마로우뱅크를 미국 10대 은행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 내 다른 은행들의 신뢰와 압도적인 자금 운용 능력이 필요합니다.”
“알겠다.”
“감사합니다.”
허, 거참. 어디서 또 내 비서를 알아봐야 하나?
재준이 임병달의 걱정을 알기라도 하는 듯 슬며시 몸을 숙였다.
“할아버지, 이 기회에 비서를 없애는 건 어떻습니까?”
“왜?”
“이제부터 할 일이 별로 없으실 것 같아서…….”
“뭐? 이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