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62화 (62/477)

제62화 뭐해. 임 회장님 손자야. 찍어(1)

“현재 우리나라 외환 보유액은 306억 달러야. 달러가 올라갈 때마다 당국이 개입하며 달러를 내리고 있는데, 그 비용이 매번 3억 달러 이상이었어.”

3억 달러?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입을 턱 벌렸다.

“3억 달러면 한화로 2,700억. 1년 예산이 84조인 것을 감안하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액수는 과한 정도를 넘어섰어. 지금까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소비한 달러가 300억 달러. 이보다 더 심한 문제는 외채가 늘어났다는 거야. IMF에서 권고하는 외화 보유액 대 부채의 비율은 2.5배.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3.4배야.”

김혜림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부가 외채는 1,040억 달러라고 발표했는데. 지금 외환 보유액이 306억 달러면 3.4배인데 조금만 노력하면 맞출 수 있는거 아냐?”

재준이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부는 사실을 숨기고 있어. 실제 외채는 1,600억 달러 이상이야.”

1,600억 달러?

5배가 넘잖아?

이제 동기들은 재준이 말하면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어 버렸다.

“IMF 권고를 무시하며 잘못된 정보로 국민을 속이고 있는 거야. 정부도 어쩔 수 없긴 해. 부채가 많은 나라에 아무도 투자하지는 않으니까. 외채는 1,000억 달러도 많아. 조만간 외국계 자본이 한국에서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투기 자본만이 남아 있겠지.”

모두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는데, 외면하고 싶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정부가 내놓은 자료가 잘못됐음을 알지만, 대책을 세울 만한 처지가 아니어서 더욱 답답했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재준이 또 결정타를 날렸다.

“지금 환율 시세는 897원이야. 9월엔 900원대가 무너지고. 11월이면 1000원이 넘고 12월에 2000원까지 올라가.”

“설마 그렇게까지?”

“안 오를 것 같아? 나랑 내기할까?”

도리도리.

김혜림이 재준의 말에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임재준, 어디서 내 돈을 먹으려고.

“항복. 지금까지 너의 예언이 틀린 적이 없으니 굳이 내 돈 빼앗기면서 내기할 이유는 없지.”

아쉽다.

할아버지에 이어서 동기들도…….

“자, 그럼 10분만 쉬었다 할까?”

커피라도 한잔하자.

동기들이 자판기를 향해 우르르 몰려나갔다.

재준은 창가로 가서 밖의 풍경을 봤다.

1997년.

정부는 우울, 근심, 답답함, 슬픔, 고민, 무능, 비관, 허무…… 이런 어두운 단어들로 사람들의 활기를 빼앗아버렸다.

소중한 것을 내어놓으며, 이 모든 것이 계절풍이기를 희망하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는 한산했고 재준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90% 세일, 폐업합니다.

이런 종류의 안내문뿐이었다.

그리고,

저기 사방에서 사람들이 현재증권을 향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올 것이 왔다.

헐레벌떡 충분히 놀란 얼굴로 박승하가 연구실로 뛰어 들어왔다.

“재준아. 큰일 났어. TV 틀어봐.”

박승하가 급하게 TV를 켜고 동기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동남증권 부도]

역시 고련증권에 이어 정확히 일주일 후에 또 하나의 증권사가 부도가 났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

동기들은 뉴스를 보면서 모두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증권사가 부도가 나지?”

“주가는 다 파란색이야. 전부 하한가라고.”

“달러가 가격제한폭까지 치솟았어.”

환율이 변동제한폭 10%까지 올랐다.

이제 3일간 환율은 변동제한폭을 채울 것이다.

거기다 이 변동제한폭도 올해 폐지되면서 환율은 정말 끝도 없이 올라갈 것이다.

TV에선 격앙된 앵커의 목소리를 통해 해외 반응도 흘러나왔다.

[모건스탠리, 아시아를 떠나라 충고]

[블룸버그, 한국 가용 외환 보유고 20억 달러]

해외 반응이라기보단 해외 비난에 가까운 뉴스였다.

이걸 듣고 있는 국민은 어떨까?

2022년 같으면 폭동이 일어나고도 남았다.

모두 광화문에 모여 촛불, 아니 횃불을 들었을 거다.

지금 밖에 환매하려고 몰려드는 투자자들의 분노가 차마 정부를 향하지 못하고 증권사를 타깃으로 삼은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당할 순 없지.

바로 오늘 사건으로 현재증권이 부도를 맞았는데.

“자, 모여 봐.”

재준이 비장한 표정으로 동기를 불렀다.

“자, 주목해 봐.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움직여야 해.”

“왜 시간이 없다는 거야?”

“객장으로 내려오면 알게 될 거야.”

“우리가 뭘 해야 하는데.”

“무열이는 경영지원실에 가서 내가 의뢰한 현수막 가지고 객장으로 와.”

현수막?

그런 건 또 언제 주문했대.

“혜림이는 이거 200장 복사해서 객장으로 오고. 승하야 네가 혜림이 좀 도와줘.”

200장?

뭐야, 이건 현재증권 자금 사업 현황이잖아.

이게 왜 필요한 거야?

“진기는 나랑 지금 바로 객장으로 가자. 서둘러.”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동기들은 재준의 목소리가 유난히 가라앉아 있자 위험을 감지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만 버티면 된다.

“진기야 가자.”

재준은 책상 아래에서 메가폰을 들었다.

“메가폰은 왜 들고 가는 거야?”

“혹시나 해서.”

“뭐가 혹시나 해서야?”

재준이 벽시계를 힐끔 쳐다본 후, 대답했다.

“따라와 보면 알아.”

연구실을 나오자 다급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탁탁탁. 탁탁탁. 탁탁탁.

벌써 시작된 건가?

재준은 최진기를 데리고 객장으로 내려갔다.

객장 상태를 본 최진기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

“이게 다 뭐야?”

최진기는 재준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일이……?”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긴 이게 왜 별거 아니야.

재준은 주변의 상황을 살피며 메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최진기는 객장 안부터 시작해 밖까지 끝도 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최진기가 재준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저 사람들 뭐야?”

“자기 돈 찾으려고 몰려든 사람들.”

“돈이라니? 우리가 무슨 은행도 아니고 왜 돈을 찾으러 몰려와?”

“이미 증권사 두 곳이 무너졌잖아. 사람들이 환매를 요청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는 폭락하는 판에 은행이자는 오르니까 주식을 팔고 안전하게 은행으로 옮기려고 하는 거야.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방어 기제랄까.”

“어림잡아 천 명은 되는 것 같은데,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냐?”

“큰일 날 소리.”

재준은 최진기를 어이없는 듯 쳐다봤다.

경찰을 동원하다니.

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괜한 공포만 조장할 뿐이지.

“경찰은 안 돼. 자칫 고객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어.”

“그렇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두고 볼 수는 없잖아?”

“계획이 있어.”

뭐? 계획?

이걸 예상해서 계획을 세웠다고?

아니 무슨 환매 요청을 예상해?

동남증권은 오늘 부도났는데.

재준의 표정과는 반대로 최진기는 울상이 되어갔다.

이거 정말 난리 나겠는데.

대체 너는 왜 이리 차분하니?

최진기는 무심하게 객장을 둘러보는 재준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정말로 재준이에게 계획이 있다면…….

나는 그냥 지켜보면 되는 건가?

재준이 최진기와 좀 떨어진 곳에서 핸드폰으로 통화를 했다.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네. 준비해 주세요.”

자, 내가 등장할 시기가 어디쯤일까…….

***

객장에 브로커와 고객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허,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뉴스에 다 나왔는데.

-그게 우리가 아니잖아요. 우린 현재증권이라고요.

-증권사면 다 같은 증권사지. 돈이나 내놔.

-주식은 지금 팔아 드릴 수 있는데. 돈은 이틀 뒤에 찾을 수 있다니까요.

-싫어. 당장 줘.

웅성거리며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고객들,

다급함을 알리는 통화 소리,

안절부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직원들.

그리고 점점 허공을 가득 채우는 고함 소리.

-내 돈 돌려줘.

-역시 은행이 안전해.

-당장 주식 팔아.

-여기 내 얘기 좀 들어보라고.

-왜 무조건 안 된다는 거야?

객장 분위기는 몹시 혼잡해 정신이 없었다.

“고객들 정리 좀 해.”

나이 지긋한 브로커의 고함이 객장에 울려 퍼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서형길 실장이 객장 직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실장님.”

뒤이어 펀드 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이 몰려왔다.

“그래, 너희들 잘 왔다. 전부 잘 들어. 지금부터 전부 앞으로 나가서 고객들 대응해. 설득하란 말이야.”

“네.”

현재증권 전 직원이 고객들을 향해 다가가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욱 더 많은 고객들이 몰려들면서 소란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이때,

임병달과 두 부사장이 등장했다.

임병달의 거친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주목해 주십시오. 주목해 주십시오.”

사람들의 일제히 임병달을 바라봤다.

“저희 현재증권은 여러분의 환매 요청에 충분히 대응할 현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질서를 지키세요.”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충분한 현금?

-거짓말 아냐? 요즘 돈 있는 기업이 어디 있어?

-맞아, 고련증권이나 동남증권도 환매 요청에 대응하지 못해서 부도난 거잖아.

-잘못해서 쪽박 차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은행이자가 더 높아.

살기등등한 그들의 모습에도 임병달은 살기로 맞섰다.

“여러분의 걱정은 잘 압니다. 하지만 현재증권은 해외 투자도 하고 있고 달러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습니다.”

-해외 투자?

-그럼, 달러를 번다는 거잖아.

-그냥 묻어두어야 하나?

“잘 생각해 보시고 판단해 주십시오. 저희 현재증권은 여러분의 현명한 선택을 존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더 과격해졌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그럼 당장 돈을 보여줘 봐. 어디 있는데?

-현재증권이 언제부터 해외 투자를 했다고. 그러면 신문에 나와야지. 난 한 줄도 못 봤다.

-다 필요 없고 당장 내 돈이나 내놔.

임병달이 뒷목이 갑갑한지 목을 뒤로 젖혔다.

“어, 회장님.”

최효범 부사장이 임병달을 부축했다.

돈 내놔.

돈 내놔.

돈 내놔.

사람들의 항의가 거세어졌다.

“진기야, 뒤를 맡긴다.”

재준이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내가 나갈 차례다.

재준은 메가폰을 든 손을 위로 들고 스위치를 눌렀다.

에엥-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뭐야?

에엥-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길게 울어대는 사이렌 소리에 사람들은 귀를 틀어막고 재준을 바라보았다.

재준은 뒤에서부터 천천히 걸었다.

임병달과 부 사장 둘을 지나면서 짧게 인사를 했다.

허허, 웃으며 임병달과 두 부사장이 재준의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서형길 실장이 따라오며,

양쪽으로 갈라서!

라고 입 모양을 그려내면서 양손을 좌우로 휘둘렀다.

재준이 앞으로 나아가자 직원들이 양쪽으로 비켜나며 길을 내었다.

-누구야?

-경제정책연구원이잖아.

직원들이 서로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이내 재준이 맨 앞에 다다랐다.

웃차!

쿵.

재준이 고객 바로 앞에 있는 데스크 책상 위로 뛰어오르더니, 천천히 고객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공포에 휩싸여 달려 나온 사람들.

그들에게 안도를 선사할 수는 없다.

무턱대고 달려든 것엔 연민도 느낀다.

하지만 타협은 하지 않는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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