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공사를 하다 말라고? 일부러?
임병달과 말이 안 통하자 곽형택은 재준에게 향했다.
“재준아 네 생각은 어떠냐?”
강남? 어디?
“사옥을 어디다 지을 건데요?”
“무역센터 건너편이잖아. 몰랐니? 이번에 건설사들 부도나서 아파트 가격이 마구 내려가요.”
네? 무역센터면 삼성동?
“몇 평인데요?”
“3만 평 조금 넘지?”
이런 X~~~발.
설마 지금 대치동 말하는 거야?
그것도 도로변 3만 평?
“아저씨. 잠깐만 기다리세요.”
“기다리라고?”
“네. 생각 좀 해보고요.”
“그래, 아주 쌈빡한 아이디어 좀 내주거라.”
“당연하지요.”
“그래, 그래.”
곽형택은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 사옥…….
현재증권 신사옥은 임병달 회장의 숙원 사업이다.
곽형택은 그것을 알기에, 잘 지어서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10년 전 강남 아파트 건설 붐에 힘입어 강남에 사옥 부지를 사들였다.
한국종합무역센터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높으신 분들에게서 살짝 접하자마자 바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20층 높이의 건물이 강남 한복판에 서 있는 모습.
현재증권의 위상을 떨치기에 좋은 자리였다.
상상만 해도 벅찼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러다 사옥의 꿈은 물거품이 될지도 몰랐다.
건물을 올리려는 이 시점에 경제위기라고 여기저기서 나돌고 있으니, 차라리 팔았다가 다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부동산은 가격이 떨어져도 건물만 올리면 나중에 제값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대지를 사려고 받은 대출 규모가 1,000억이 넘어서 이자만 1년에 120억 이상이었다.
건물은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땅값만 1,000억.
게다가 대출 만기가 다가오자 은행은 대출 기간을 연장해 줄 수 없다고 통보하기까지.
재준이 생각에 잠긴 시간이 길어지자 곽형택이 재촉했다.
“재준아, 팔아야 하는 게 맞지 않냐. 대출 이자도 아껴야 하고. 나중에 땅값 떨어지면 다시 사면 되지.”
“잠깐, 기다려 보세요.”
재준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 아저씨가.
그 땅을 팔면, 우리가 다시 살 때까지 안 팔리고 그대로 있기나 한대요?
가뜩이나 그 앞에 한국종합무역센터가 건립되는데.
대출 이자가 얼마나 한다고.
가만, 대출?
“대출 은행이 어디예요?”
“조화.”
조화은행.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토종은행으로, 외환위기에 대기업들의 부도로 타격을 입고 결국 정부의 공적자금을 받았다.
CB은행, KW은행과 합병하며 재기를 다졌지만 2,000년 재우 사태와 SSY양회 부실로 입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정부의 2차 금융구조조정에 따라 에스월드금융지주에 매각됐고.
조화라…….
그렇다면 훗날 조화은행과 대출 관련해서 딜을 할 수 있겠는데.
이런 개이득이 있나.
재준은 곽형택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아저씨, 그냥 공사 시작하세요.”
“갑자기 공사를 시작하라니? 땅을 파냐 마냐 결정을 해야지.”
“아니요, 일단 바닥만 다지세요. 토목 공사만.”
“허, 그건 왜? 네 말뜻을 모르겠는데.”
“토지도 아니고 건물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만들라고요.”
“애매한 상태? 공사를 하다 말라고? 일부러? 내가 부동산을 지금껏 해왔지만 이런 괴상한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토목 공사만 하고 중단되면 건물가격산정이 어려워집니다. 그럼, 은행에 담보에 대한 대출금 산정을 다시 요청하는 겁니다.”
“그게 뭐야? 대출금 산정을 다시 해? 그게 가능해?”
“이런 일에 대한 관련 법이 없으니까요. 은행에선 다시 대출금 산정이 가능한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울 겁니다.”
공사중단 장기방치 건축물의 정비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2016년이 되어서야 나온다.
1997년엔 이런 황당한 경우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은 건물이라고 하면 땅이라고 하고, 땅이라고 하면 건물이라고 우기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은행에 건물이니까 대출금 산정을 다시 하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은행이 대출 만기 연장 안 해준다면서요?”
“그렇지.”
“조화은행이 대출 산정을 잘못해서 대출을 적게 받았다. 대출 산정을 잘못하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고 소송을 거는 겁니다.”
“뭐야. 그게. 우리가 지금 건물 올리고 우기는 거잖아.”
“맞아요, 우기는 거. 시간을 끄는 거죠. 원래 건물 올리려 준비 중이었다고 하면서. 1년만 시간 끄세요. 지금 1,000억을 한꺼번에 갚을 수는 없잖아요.”
재준은 자신감의 표현으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1년 후면 현재증권은 IMF에서 살아남고 보유한 부동산, 한화, 심지어 달러의 가치도 두 배 가까이 오른다.
적게 잡아도 이익만 2조, 충분한 여유 자금이 생긴다.
그때 은행 빚을 갚고 건물을 올려도 충분하다.
아, 애초에 조화은행이라 갚을 필요가 없구나.
은행이 없어졌는데 어디다 갚아?
그냥 꿀꺽하는 거지.
그래도 정부에서 갚으라고 박박 우기면 절반으로 퉁치고.
어쨌든.
강남 중앙에 자리 잡은 20층, 아니 40층으로 올릴까?
그냥 63층을 능가하는 64빌딩을 올려?
서울시 허가가 안 나오려나…….
곽형택은 고개를 모로 세우며 생각했다.
“1년 후라…….”
“은행에 소송을 걸겠다고 엄포를 놓으세요.”
“대출 산정도 제대로 되지 않은 대출이라고?”
“네.”
“허, 이걸 내가 믿고 저질러야 하나…….”
“그리고 아저씨, 만약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서 대출금보다 부지 가격이 낮아지면 은행에서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대출금 달라고 하겠지.”
“대출금 갚기 싫다고 부동산 그냥 경매에 넘기라고 하면요?”
“대출금보다 부동산 가격이 낮으니 난감하겠지.”
“그때 이자 빼고 원금만 받으라면 받을까요?”
뭐?
곽형택은 재준의 제안에 며칠 자신을 괴롭혔던 두통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아, 그러니까 지금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도 문제없다?”
“그렇지요.”
“이자는 안 줘도 된다?”
“안 주는 게 아니라 나중에 딜을 하는 거죠. 우리가 도둑도 아니고 왜 돈을 떼어먹어요?”
“그러다 경매에 넘겨 버리면?”
“그럼 더 땡큐죠. 우리가 낙찰받으면 되니까.”
“와, 너, 진짜 나쁜 놈이구나.”
“은행은 좋은 놈인가요? 같은 나쁜 놈끼리 붙은 건데.”
“은행이 왜 나쁜 놈이야?”
“이자 받잖아요.”
“이자 받으면 나쁜 놈이야?”
“이자 받으면 누군간 파산하거든요?”
“뭐?”
곽형택은 두 눈을 껌뻑이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표정을 했다.
당연히 모르겠지.
이 시대는 아직 자본주의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일단 자본이라는 돈만 알지, 자본주의라는 정신은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거다.
정확히 누군가 이자를 갚으면 누군가는 파산한다.
은행이 자본주의에서 최고의 빌런일 수밖에 없는 무조건적인 이유, 그게 이자이다.
음, 이걸 설명하고 가야겠지.
쉽게 말해, 중앙은행이 100만 원을 찍었다.
A가 냅다 은행으로 달려가서 10% 이자에 100만 원을 빌렸다.
다만, A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110만 원을 은행에 갚을 수 없다.
왜? 중앙은행이 100만 원밖에 안 찍었으니까.
시중에 돈이 100만 원밖에 없으니까.
그럼, 그럼. 이러면 안 되지.
중앙은행이 다시 10만 원을 찍어서 A를 돕고자 했다.
그럼 10만 원을 누가 가져가야 할까?
맞다. A의 물건을 사줄 B에게 대출을 해줘야 한다.
자, 이제 A는 B에게 물건을 팔아 110만 원을 마련하여 은행에 이자와 원금을 갚았다.
그럼, B는? 파산이지 뭐.
봐! A가 이자를 갚으니까 B가 파산하잖아.
그럼 이제 어떡하냐고?
그래서 중앙은행이 B를 위해 1만 원을 찍었다.
자, 이제 B도 열심히 일해서 이자와 원금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보이나?
시중에 유통되는 돈의 양과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돈의 양이.
즉, 중앙은행은 늘어나는 이자만큼 끊임없이 돈을 찍어 내야 한다.
그렇게 또 돈이 늘어나고, 또 이자가 발생하고, 또 찍어 내고, 또 발생하고.
그래야 이자를 갚아도 파산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돈이 늘어나고 늘어나면?
공급과잉으로 펑 하고 터지는 것이다.
돈이 휴지가 되는 것이지.
그럼, 그 상황이 되면 중앙은행은 돈을 안 찍어 낼까?
천만에.
이미 시장에 풀린 돈은 휴지가 되기 전에 한군데에 잘 모여서 더 큰 시장으로 대출이 실행된다.
알지? 기업 간 대출이라든가, 국가 간 대출이라든가.
이제 시장에 돈이 걷혀서 안정됐으니 서민은 다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일단 시장에 한 번 풀린 돈에 대한 이자는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이러니 은행이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갚으라고 하는 자체가 자본주의 최고의 빌런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물론, 은행원이 이런 사실을 알고 대출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나가 봐.”
임병달이 결국 곽형택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갈 겁니다. 가서 토목공사나 할게요. 나 원 참. 나이를 먹더니 심술만 늘어서.”
“뭐라고, 저놈이.”
임병달이 벌떡 일어서자 곽형택이 부리나케 밖으로 도망쳤다.
“으유. 머리야. 내가 이 나이에 나잇값 못하는 놈이랑 사업을 하니 안 늙을 수가 없지.”
후훗.
재준은 임병달을 보고 작게 웃었다.
이때,
띠리리링.
“네, 천 실장님.”
-도련님, 고련증권이 곧 부도를 발표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
재준은 시선을 달력으로 향했다.
지금은 10월, 원래 역사라면 고련증권은 12월에 부도가 난다.
“자세히 말해보세요.”
-아직 언론에 발표는 안 했지만, 내일 들어오는 어음을 막지 못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재준은 핸드폰을 끄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감았다.
그럼, 일주일 후 동남증권인데.
“재준아.”
임병달의 부름에 눈을 떴다.
“네, 할아버지.”
“저놈은 누구냐? 누군데 한국 경제가 디폴트라고 얘기하는 거냐?”
-K모터스와 이슬, 재우 등 천문학적인 부채 위에 세워진 이른바 한국의 재벌 기업이 문제의 시작점입니다. 10대 재벌의 부채 비율은 500%를 웃돕니다. 상상하기 힘든 수치지요. 이들 재벌이 부채상환 불능상태에 이르면서, 11월이면 은행까지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질 겁니다.
월리엄 콜 전 ST은행 부행장이 기자가 내민 마이크에 거침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저 미친놈.
재우를 왜 여기서 꺼내는데?
재준이 벌떡 일어섰다.
“재준아, 어디 가려고?”
“네, 뭐 좀 사려고요.”
“뭐?”
“메가폰이요.”
“뭐? 왜?”
“할아버지, 저 갈게요.”
임병달은 멍하니 재준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메가폰? 국회라도 가서 시위라도 할 참이냐?
***
일주일 후.
경제정책연구실.
“태국 바트화가 폭락,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폭락, 대만이 외환 방어 포기, 홍콩 증시가 폭락. 이게 뭔 일이래.”
모두 재준을 쳐다봤다.
“재준아, 정말 네 말대로 돼 버렸다. 이제 어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내가 저지른 짓도 아닌데.
“흠흠, 진기야. 정부 환율 방어에 대해 조사한 거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