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한국 가면 넌 죽인다(4)
“은행 인수가 끝나면 은행장님은 CEO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역에서 덕망이 높은 사람을 내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쪽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무구한 눈빛.
순간, 마이클은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한 방 먹은 기분이네.
평생 은행에서 살았다.
그런 자신이 은행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심했었다.
이 자리를 놓치기 싫어 고집을 부려 볼까 마음을 먹고 협상에 나선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졌네.
난 두려웠는데.
저 젊은이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적의 두려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였다.
마이클 은행장은 천천히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Thank you.”
박민수도 일어서서 손을 잡았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했다.
단 한 사람, 한마디 말은커녕 옆에서 지켜만 보던 강호석만 인정받지 못했다.
난 여기 왜 온 거지?
***
박민수와 강호석은 인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밖으로 나와 걸었다.
강호석은 박민수를 신기한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박 실장, 혹시 독심술 배웠어?”
“그건 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예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 뭐 이런 책 읽는 거 아니야?”
“그런 책도 있어요?”
“진짜 안 읽었어?”
“전 경제 관련 책만 읽습니다.”
“아니, 그 마이클한테 내 생각과 똑같이 말해서 진짜 깜짝 놀랐잖아.”
“아, 이사님 생각과 똑같았다고요? 어느 지점에서요?”
“은행장한테 CEO 제안한 거.”
“이사님도 그걸 생각하셨어요?”
“그래, 나도 그 자린 마이클 은행장이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예? 전 아닌데요. 전 원래 이사님이 했으면 했어요. 재준 씨가 반대해서 무산된 거지만.”
“뭐? 그럼 내가 은행장이 될 수도 있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이런 나쁜 임재준.”
박민수는 강호석의 반응에 피식피식 웃었다.
“왜 웃어? 내가 못 할 거 같아?”
“참 내, 이사님은 하라 그래도 은행 대표 거절하실 거잖아요.”
강호석이 박민수를 잠시 쳐다봤다.
“독심술 배운 거 맞네.”
강호석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이제 다 해결한 것 같고…….”
“아직 아닌데요.”
“아니라고? 또 뭐가 있어?”
“이사님이 직접 회장님에게 보고해야죠.”
“내가 왜?”
“그럼 제가 해요? 전 임 대표 담당이고 이사님이 회장님 담당이에요.”
“언제부터?”
“그걸 꼭 언제라고 말해야 아나요? 당연한걸.”
“임재준 대표가 말하지 않을까?”
“그건 그거고 실무진이 한 번은 보고해야죠.”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디 보자, 지금이 몇 시지? 음, 아마 지금쯤 임재준 대표가 회장님에게 먼저 연락하라고 했을걸요?”
“뭐?”
띠리리링.
때마침 강호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런 제기랄!
“여보세요. …네, 회장님. 협상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중입니다.· …네. 현재증권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네, 네. 그 건은…….”
이후로 강호석의 전화 브리핑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임재준!
한국 가면 넌 죽인다.
***
현재증권 회장실.
후비적후비적.
누가 내 욕을 하나?
재준은 가려운 귓속을 손가락으로 후볐다.
“왜? 누가 너 욕하는 거 같으냐?”
“설마요, 누가 제 욕을 해요.”
“이놈아, 너를 벼르는 인간이 어디 한둘인 줄 알아?”
“그래요?”
“모른 척하기는.”
하하하.
그러든가 말든가.
뒤에서 욕해도 앞에선 웃을 거면서.
외환위기에서 살아남으면 어차피 주식이나 채권 때문에 찾아올 것이다.
찾아와서 함박웃음을 짓겠지.
신주나 채권 발행해서 돈 좀 만들어 달라고.
“이번에 대한 그룹과 선동방 그룹에서 얻은 금융사들은 어찌할 셈이냐?”
“일단 저희가 지분을 100% 가지고 있으니 자회사로 편입하고 영업은 저희 지침대로 하라고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우리 지침이 뭔데?”
“대출 방향이요.”
“대출은 신용등급으로 해주는 거 아냐? 무슨 방향씩이나 만들어?”
“신용등급 그거 별로예요. 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고를 겁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그런 걸 만든다고?”
“이미 만들어져 있어요.”
“어디에?”
“종금사에요. 종금사에서 사용하는 자체 대출 심사 기준을 손보면 괜찮은 게 나올 겁니다.”
“그래? 그다음은?”
“능력을 키워서 계열사로 만들어야죠. 언제까지 업어 키울 순 없으니까요.”
자회사는 자식, 계열사는 친구라 생각하면 된다.
자회사는 하나에서 열까지 관리해야 하지만 계열사는 관리하는 게 이상하다.
친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면 발끈할 테니까.
‘네 일이나 잘하라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
어쨌든 대한창업투자, 선동방투자신탁운용, 선동방신용금고를 얻었으니 잘 다듬어서 계열사로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은 대한 그룹이나 선동방 그룹의 돈줄 역할 하느라 개고생했겠지만 이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면 훌륭한 사업체가 될 것이다.
“정 실장이 그러는데 거기에도 괜찮은 인재들이 있다고 하더라. 그들이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느냐?”
“당분간 기업대출에 문 걸어 닫고 코스닥 상장 주식이나 채권에 70 대 30으로 투자하라고 지시할 생각입니다.”
“코스닥? 작년에 상장한 그 애송이들 말하는 거냐?”
1996년 5월에 코스닥 시장이 개설되었다.
“맞습니다.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면 가장 혜택을 받는 게 그 애송이들이잖아요.”
“거, 녀석. 이번엔 너답지 않다. 코스닥 회사라고 하는 놈들이 매출 20억 안팎인데. 웬일로 조그만 놈들에 신경을 쓰고 그래?”
“매출과 주가는 다르니까요.”
“주가? 그렇긴 하구나.”
주가가 매출과 무슨 상관인가?
쭉쭉 올라가는 게 코스닥 주가인데.
물론 나는 신경 끄고 살 거다.
지금 조 단위 돈이 눈앞에 있는데 코스닥을 들여다볼 이유가 없다.
허허.
재준이 웃자 임병달이 알겠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재준아, 알고 있느냐? 그랜드월이 1억 달러에 해당하는 2,000만 주를 가져가라 하더라.”
“네? 정말요?”
이놈들이 머리에 샷건을 한 대씩 처맞은 거 아냐?
그냥 해본 말인데, 주식으로 주겠다고?
“왜 그렇게 놀라는데?”
“아닙니다. 그냥 의외라서.”
가만, 가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랜드월은 아직 미국에 상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상장은 1999년 지금부터 2년 후에 발생한다.
그랜드월이 상장했다면 1억 달러에 해당하는 주식을 현재증권에 넘길 리는 없었다.
말이 안 되는 짓거리지.
그랜드월이 상장하는 주식 수는 6,900만 주이고, 주당 53달러로 총 36억 달러.
현재 상장 전 1억 달러에 해당한다고 내준 주식 수는 2,000만 주.
그럼, 10억 달러?
재준의 머릿속에서 기록을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랜드월,
유태계 자본의 투자은행.
은행이라기보단 헤지펀드 집단이다.
현재 최상위층은 221명의 파트너라 불리는 유태인들이다.
그리고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코자인과 폴슨.
현재 코자인이 폴슨보다는 권력의 핵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1999년 폴슨이 코자인을 실각시키며 그랜드월을 주식시장에 상장으로 이끈다.
전형적인 쿠데타였다.
코자인이 실각한 이유는 미국 7위 은행인 맬런은행을 인수하려고 한 것인데, 이는 그랜드월이 실적 악화인 상황에서 진행되어 회사 전체에 악영향을 일으킬 뻔했다.
아, 뉴월드.
그리고 인도네시아 택시 회사.
코자인, 너, 인도네시아 택시 회사를 매각하고 그 돈으로 맬런은행을 인수하려는 플랜이었니?
그래서 코자인으로서는 뉴월드 지분을 어떠한 형태로 가져가야 하는 상황?
그런데 왜 지분으로 지불했을까?
현금으로 지불해도 될 텐데.
흐음, 코자인…… 너 돈이 없구나?
아직은 코자인이 그랜드월의 CEO이고 폴슨은 COO인 상태.
코자인의 결정이면 221명의 파트너들 중 다수를 설득할 수 있겠지.
가만, 가만. X발 머리야 돌아가라.
그래, 그렇지. 코자인을 밀어줘야겠는데.
역사완 다르게 폴슨을 실각시켜야겠어.
이거 이거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데.
그랜드월을 이용해서 재우 그룹을 해체하고 투마로우뱅크를 키운다.
큭큭큭.
그리고 어쩌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그랜드월을 삼킬 수도 있고.
너무 큰가?
알 게 뭐야? 약해지면 삼키는 거지.
지금은 시가 총액이 330억 달러이지만 2022년엔 1조 2천억 달러짜리 기업이 그랜드월이다.
한화로 하면 1,400조 원.
후우, 심장 뛰어.
할아버지, 몇 년만 기다리세요.
금방 머리 빳빳이 들고 다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박민수랑 강호석이 잘해야 하는데.
“할아버지, 강호석 이사와 통화는 하셨어요?”
“그래, 투자사를 통해 도매은행 인수했다는구나.”
“잘했으니까 보너스 좀 챙겨주세요.”
“그래야지.”
하하하하.
재준은 속으로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있는데.
이때.
똑똑.
“곽형택 부사장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곽형택이 문을 열자마자 재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꼭 닫았다.
그런 뒤 까치발을 하고 다가와서,
“재준아, 너 있다고 해서 왔다.”
“절 왜요?”
“머리 좀 빌리려고.”
에잉, 쯧쯧.
“왔으면 인사 좀 해라.”
곽 부사장이 임병달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재준부터 찾자 곽 부사장에게 일침을 가했다.
“형님.”
“회장님이라니까.”
“알겠습니다. 형님 회장님.”
“됐다. 이거 원, 엎드려 절받기지. 뭔데?”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말씀드린 강남 사옥 건 말입니다.”
재준의 기억에 뭔가 번쩍 떠올랐다.
아, 이것도 있었지.
무리하게 사옥을 짓다가 자금만 묶인 부동산.
이것도 현재증권이 자금난을 겪는 데 한몫했다.
“시작하려고?”
“지금 상태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동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럴 땐 팔아서 현금을 쥐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부동산을 팔자고? 재준이는 부동산을 계속 사라고 하던데.”
“재준이가요?”
“그래, 저번에 미레도백화점 부지도 그렇고 부동산은 계속 내려갈 거니까. 기업들이 내놓는 부동산 계속 샀으면 하더라. 돈이 없어서 그렇지.”
“아니, 그건 지방에 있는 나대지잖습니까. 그게 떨어져 봐야 얼마나 떨어진다고. 하지만 저희 사옥 부지는 강남이라고요. 자칫 불똥 튀면 사옥이고 뭐고 간에 건물이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빨리 파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마침 산다는 기업이 나타났는데.”
“그래? 어디서?”
“SS전자도 있고 POSK도 있습니다.”
“근데 시장이 왜 불안한데?”
“요즘 부동산 업자들이 쉬쉬거립니다. 이러다 나라 망하는 거 아니냐고요. 윗선에서 암암리에 부동산을 팔아 달러 챙기는 것이 심상치 않다고 말입니다. 저희도 빨리 손을 써서 좋은 값에 팔아버리고 현금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와! 이 와중에 높으신 양반들 대단하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니까요. 고집은 정말.”
“안 돼. 우리도 이제 사옥을 가질 때가 되었어. 이번 위기만 넘기면 건물 올릴 거다.”
“형님, 그게 제 꿈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부동산 금융팀을 맡은 거고.”
“아무튼,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