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한국 가면 넌 죽인다(3)
투마로우뱅크 은행장 그레고리 마이클.
그는 ‘Drive the dream(꿈을 향해 나아가라).’ 라는 연설로 오스틴에서 유명했다.
비록 작은 은행의 은행장이었지만,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대학 졸업 축하 연설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 올렸다.
그는 성품, 평판, 전문성을 두루 갖춘 은행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솔직하고 진실된 태도는 직원들의 존경을 받으며 종종 신문기사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거래 기업들의 수출이 막히며 BIS비율이 형편없이 떨어져 버렸다.
발단은 한국 수출이 잠정 보류되면서 발생했다.
보통은 기업이 선적을 완료한 선하 증권을 가져오면, 수출국 은행이 대금을 선납해 주고 수입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수입국 은행으로부터 대금이 입금된다.
오고 가는 금액에 비해 적은 수수료를 챙기는 게 그의 은행이었다.
지금까지는 크게 문제될 일이 없었다.
수입국에서 문제가 발생해 일 년에 한두 건 정도 세관에 물건이 묶여 결제가 늦어지는 경우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국으로 들어간 수출품이 1억 달러 가까이 묶이기는 처음이었다.
투마로우뱅크는 급격하게 상황이 안 좋아졌다.
물론 보험은 들었다.
하지만 사건의 원인이 자연재해가 아닌 이상은 보험금 지급이 곤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연하겠지.
아직 수출품은 수입국 냉동창고에 고스란히 있는데.
이때, 한 투자사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급한 금액 1억 달러를 투자하고 추가로 투자하고 싶습니다. 대신 은행의 지분을 넘겨주십시오.”
마이클은 투자사가 한국인이라는 게 맘에 걸렸다.
그래도 어쩌랴 급한 건 자신인데.
결국 오늘 한국인 투자자가 방문했다.
마이클은 쌓아 놓은 서류를 읽고 있는 낯선 이방인들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애써 담담해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굳은 표정을 차마 풀진 못했다.
박민수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투마로우뱅크가 투자한 축산기업의 영업실적이 점점 악화되고 있군요. 대출도 대부분 회수 못 하셨구요.”
마이클은 악성 채무를 들추는 상대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한국 수출을 위주로 하던 업체들이라 우루과이 라운드만 타결되면 전부 회복할 수 있는 기업들입니다.”
전부라…….
박민수는 마이클이 선택한 단어를 조용히 읊조렸다.
우루과이 라운드.
1994년 각국의 보호무역 추세를 완화하는 무역협상이다.
1997년 7월, 한국 정부는 수입이 제한되고 있는 대부분의 종목을 자유화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큰 반발을 사며 대규모 시위에 직면했다.
정부로서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국내에서 압박하지, 해외에서 압박하지, 대선 다가오지.
그런 상황에서 1996년 일본에서 검출되었던 대장균이 한국에서도 발견되었다고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미국도 주춤하게 만들고 국민도 정부에 관한 관심 좀 끄고.
뭐, 정부가 언론을 이용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고.
그런 정황이 의심된다 이런 거지.
근데 이 일이 크게 확대돼버렸다.
굳이 이름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미국 재무장관과 상무장관에 부통령까지 성질을 부리며 한국에 150억 달러 긴급 차관을 주려다 취소했다.
그뿐 아니라, 슈퍼 301조를 발동해서 한국의 모든 대미 수출을 금지해 버렸다.
수출입이 전부 제동이 걸려 버린 것.
저 대장균 사건만 아니었으면 미국은 한국에 150억 달러를 차관해주고, IMF가 한국을 관리하는 걸 거부했을 것이다.
어쨌든 대장균 사건이 언론에 의해 퍼짐으로써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 사건으로 텍사스 일부 축산업자 중 한국에 전량 수출하던 업체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이클이 말하는 그 업체들이었다.
-우리가 손을 내밀면 잡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박민수는 재준의 말을 되뇌며 또 한 번 그의 신내림에 혀를 내둘렀다.
그 말을 믿고 투마로우뱅크를 찾아오긴 했지만…….
임재준,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구석이 있는 건 확실해.
내일 뉴스라도 보는 건가…….
“살아날 기업이라는 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단, 신용으로 무리한 대출을 진행했더군요. 게다가 투마로우뱅크는 총 대출액의 80% 이상이 축산기업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대출 미수금 규모가 전년동기대비 15배나 증감했고요.”
“……알고 있습니다.”
“은행을 살리고 싶다면, 저희가 제시한 조건으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투마로우뱅크의 자회사도 인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더 검토해 주십시오.”
투마로우뱅크 자회사들도 줄줄이 도산 위기에 처해있었다.
마이클이 원하는 건 본사건 자회사건 식구 같은 사람들을 모두 살리는 거였다.
-자회사가 더 필요합니다. 거기 은행 전산시스템을 관리하는 회사는 꼭 인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인수하지 말고 거절하는 척하면서 어쩔 수 없이 얻어가는 듯. 알죠? 무슨 말인지.
그래서 재준의 지시대로 박민수는 자회사 인수를 거절했다.
“이익을 낼 수 있는 업체가 없었습니다. 긍정적이었다면 저희 측에서 먼저 제시했을 것입니다.”
“…….”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표정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민수는 물에 빠진 마이클에게 지푸라기 한 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인수 합의서에 없던 지급보증분 인수에 수출입 관련 부분을 추가하겠습니다.”
지급보증의 대표적인 게 LC.
LC란 신용장을 뜻하는데, 쉽게 말해 수출 어음이다.
일반 어음은 특정한 날짜에 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지만 LC는 항구에서 배가 뜨자마자 수출업자에게 대금을 선결제 해주는 어음이다.
두 나라 은행 간의 신용 어쩌고저쩌고 하는 문제도 있는데 이걸 알 필요는 없고.
어쨌든,
박민수는 앞으로 있을 수출물에 대해 축산기업에게도 선결제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투마로우뱅크와 연결된 미국 축산업자들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좋은 일이지만 마이클은 의아했다.
자칫 손해가 날지도 모르는데 결제를 진행하겠다?
배짱이 대단하긴 한데…….
마이클은 박민수의 단호한 눈빛을 피해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감사합니다.”
마이클이 고개를 숙이는 사이 박민수가 피식 웃었다.
애초에 수출입 관련 부분은 고려했었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지만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인수 합의서에 넣지 않았을 뿐이다.
완강한 거절 뒤에, 살며시 내미는 손은 상대방의 악의를 거두게 하는 효과도 있다.
게다가 수출이 막혀 자금이 부족한 기업들에 LC 대금을 미리 지급하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
그게 얼마나 한다고.
5,000억이나 들고 있는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마이클의 표정은 무언가 자신을 짓누르는 답답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이 양반, 이 정도론 속이 풀리지 않는 건가.
임재준, 정말 귀신이라니까.
한국에서 마치 이곳 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투마로우뱅크 은행장은 인품이 좋은 사람입니다. 분명 직원 정리해고 문제를 가장 힘들어할 겁니다. 그의 표정을 읽다가 마지막 딜을 하세요.
“직원들도 100% 승계하겠습니다.”
순간 마이클의 동공이 커지며, 그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합의서에 Assistant manager(대리) 이하는 승계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100%면…….”
“네. 전 직원 승계합니다.”
후.
땡스. 땡스 베리 머치.
-피 튀기는 협상에서 이기기 위해선, 무엇보다 상대가 숨긴 두려움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몸짓, 눈짓, 미세한 떨림 등등. 알죠? 비언어적인 표현을 제대로 읽었을 때 타율 100%인 거.
내가 분명히 임재준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째 내가 배우는 기분이 드는 걸까.
-인수자의 진지한 손길과 태도로 상대를 신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적이 아니라 동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안다고 알아. 임재준.
자꾸 재준의 말이 맴돌아서 박민수는 실없이 웃었다.
마이클이 박민수의 웃음으로 안도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직원들이 매우 기뻐할 겁니다.”
말을 마친 마이클 은행장은 모든 걸 끝마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투마로우뱅크는 도매은행으로, 직원은 대략 30명이다.
소매은행이라면 고객의 입출금 및 자잘하고 많은 업무에 직원들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투마로우뱅크는 오직 기업만 상대했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면 지금까지 묶여있던 한국 수출이 재개될 것이고, 막대한 양의 달러가 오고 갈 것이다.
투마로우뱅크의 직원들이 모두 뛰어다녀도 그 업무를 다 처리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전 직원 승계는 당연한 거지.
이제 마지막 딜이다.
화룡점정(畫龍點睛).
이제 마지막 점 하나만 찍자.
“마이클, 투마로우뱅크에서 투자한 농산물기업의 부채가 총 1억 달러 정도이던데, 그 기업들 지분과 교환이 가능하겠습니까?”
투마로우뱅크가 부도 직전까지 몰린 게 축산업 때문이다.
그 기업들의 부채를 탕감하고 지분을 가져가겠다는 말이 마이클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민수는 마이클을 보고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려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저 젊은 사내의 눈빛엔, 두려움이 없다.
마이클은 한국에서 투마로우뱅크를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들었을 때, 옳거니 했다.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은 자신이 판단했을 때 약자였다.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이끌 자신도 있었다.
그들이 보내온 합의서 내용을 살펴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도 ‘감히?’였다.
그래서 협상 테이블에서 부도가 날 때 나더라도 절대 쉽게 끌려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마이클은 작은 은행이지만 20년 이상 기업만 상대해 온 경력자였다.
겉으로 웃고 있어도 가면 뒤에 숨겨진 의도를 그는 포착할 수 있었고 실패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사회 경험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저 젊은이가 마이클의 연륜을 산산조각 내며 흔들고 있었다.
투마로우은행에 투자한다.
지급보증분도 해결해 준다.
전 직원도 승계해 준다.
어려운 기업들 부채도 지분 교환으로 없애 준다.
싸울 이유가 없어졌다.
“지분을 넘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박민수는 ‘당신들 망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는 마이클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괜찮다니까’로 답했다.
재준이 했던 말로 답하면 되겠지.
“축산기업 지분을 인수하는 것은 그 기업들이 투마로우뱅크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거래를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투마로우뱅크를 통해 저희가 할 일이 많거든요.”
마이클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민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마이클.”
박민수가 마이클의 이름을 부르자 마이클은 각오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 것이 왔다.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은 은행장의 직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도 자신 외에 다 살아나서 얼마나 다행인가.
“말씀하십시오.”
“자회사를 인수하지 않는 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창업자가 아니라 전문 경영인으로서 은행을 이끌어 주십시오. 투자금으로 1억 달러를 더 드리겠습니다. 이제 자회사를 살릴지 말지는 당신의 손에 달렸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