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한국 가면 넌 죽인다(2)
증권사가 해외에서 달러 차입하기 힘든 건 맞는 말이다.
증권사는 위탁 매매를 위해 세워진 회사지, 은행같이 돈을 빌리고 갚는 데 최적화된 회사는 아니다.
해외에서 신용으로 따지면 증권사는 신생 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종금사는 다르다.
이미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국가가 보증해준 신용으로 착실히 커리어를 쌓은 기업이다.
증권사보다 달러를 끌어오기가 훨씬 수월했다.
재준은 눈을 반달처럼 휘며 말했다.
“대출 금액은 최소 10억 달러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셔야 할 겁니다.”
“얼마요?”
10억 달러?
잘못 들은 것은 아니지?
김무혁은 잠시 멍하게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30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아니 10분, 아니, 아니, 5분. 식사하고 계시면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네.”
꾸벅.
김무혁은 빠르게 밖으로 나가자. 동기들은 재준을 ‘또또또’란 입 모양을 만들고 쳐다보았다.
처음 본 사람도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저 능력 보소.
김혜림 오빠라고 해서 예외는 없구나.
동기들이 불안과 걱정을 던져버리며 재준을 향해 세운 건 엄지 척.
쑥스럽게 왜 그래?
“피자 나왔다.”
재준은 대수롭지 않게 피자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좀 더 주더라도 달러 모으느라 신경을 안 쓰는 게 좋지.
괜히 정부 눈치 보면서 달러 모을 바엔 전문가를 시키는 게 낫다.
뭐, 달러야 만기 전에 100% 이상 이익이니까 8% 정도 주고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잖아.
이제 달러 살 돈을 벌어야겠지?
서형길 실장은 뭐하고 있을까?
***
고련증권.
“현재증권 보유 주식을 사라고?”
서형길 실장이 고련증권 기획실 고민준 실장에게 보유 주식 중 처분할 주식을 정리한 서류를 내밀었다.
고 실장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서형길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서형길은 고 실장을 향해 턱을 들었다.
뭐? 뭘 그렇게 보는데?
나는 뭐 이런 거 들고 다니면 안 되나?
도련님은 현재증권 보유 주식을 나열한 서류를 자신에게 주었다.
1차로 경제정책연구실에서 기업들에게 알려 자사주 매입을 끝내고 2차로 남은 주식이라 했다.
-파이팅! 서형길 실장님. 거기에 있는 거 몽땅 팔아버리세요.
전부 팔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팔라고 하면 팔기야 하겠지만 증권회사가 주식 보유량을 줄인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서형길 실장님, 되도록 제일 싫어하는 사람에게 먼저 가져가세요.
이건 또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일까?
먼저 받은 놈이 제일 좋은 주식을 낚아채는 거 아닌가?
암튼,
“뭘 그렇게 노려봐. 개인적으로 사라는 게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 사라고.”
“왜, 보유 주식을 사라는 거야?”
“포트폴리오 구성을 다시 하래.”
“누가?”
“회장님이.”
아, 회장님이!
고 실장은 서형길이 내민 서류를 심드렁하게 받았다.
“서 실장,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포토폴리오 다시 구성하는 거, 그거 쉬운 거 아니다? 시장이 안 좋아지고 있어서 판을 다시 짜는 모양이다만, 회장님께 충정으로 그만두라고 말해. 펀드 매니저들이 잘 만들어 놓은 포트폴리오를 왜 건드려?”
아유, 뭐 자기는 많이 아는 척하기는.
이래서 이놈이 제일 싫다니까.
“펀드 매니저 같은 소리하고 있네. 고련증권 펀드 매니저는 VIP 없이 수익을 올리는 황금손이냐? 회장님이 엎으라면 엎는 거지 뭔 펀드 매니저 타령이야.”
고 실장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하긴, 그래도 너무 많이 파니까 그런 거 아냐.”
“난 그저 지시에 따를 뿐이야.”
“그래도 걱정이다. 근데 누가 포트폴리오를 다시 짤 건데? 회장님은 아닐 거 아냐?”
별걸 다 알려고 하네.
“내가 할 거야. 내가.”
고 실장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네가 짠다고? 네가 직접 나서는 건 오버 아니냐? 네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다고. 현재증권에 인재가 그렇게 없어?”
이놈이.
부글부글.
뭐라고? 인재?
현재증권 반도 안 되는 증권사 주제에.
서형길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차분히 재준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렇게 둘러대면 됩니다.
“왜 나는 안 되는데, 영업이익 대비 영업 현금 흐름, 부채 비율, 이자보상배율, 매출액 영업이익률, 자산 회전율을 중심으로 다시 짤 거야.”
고 실장은 잠시 멈칫 서형길을 쳐다보더니. 풋 하고 웃었다.
“너 왜 웃어?”
“아이고 서형길. 너도 증권사 실장이라 이거지? 공부 좀 했구나. 워런 버핏 책도 읽고. 그냥 네 주특기인 회장 손자 돌봐주는 거나 계속해. 어설프게 나서지 말고.”
빠직!
도련님, 제가 이렇게 놀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놈에게 좋은 주식을 먼저 팔라고 하시다니.
“아무튼, 이번엔 포트폴리오 내가 짠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암튼. 현재증권 주식 적극적으로 매입해 줄게.”
“언제?”
“기다려 봐. 이런 건 또 좋은 물건이 많을 때 먼저 낚아채야겠지?”
팔기 싫다.
하지만, 도련님 말씀이라 참는다.
“당연히.”
“우리 다음은 누구냐?”
“동남증권.”
“동남? 그럼 이야기가 또 달라지지. 아주 열성적으로 매수해 주마.”
고 실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김 펀드 올라오라 그래.”
1분쯤 지났을까 펀드 매니저 하나가 번개같이 달려왔다.
“김 펀, 이거 현재증권 주식 보유 목록인데 필요한 거 있으면 매매해달래.”
“정말요? 어디 한번 보여 주세요.”
여기.
포트포리오를 펼치고 한 장 한 장 넘기던 김 펀드 매니저의 손이 멈칫하더니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걸 다 보유하고 계시다고요? 생각보다 엄청나네요.”
“총 10조 내외야. 회사 차원에서 보유한 주는 3조 정도.”
네?
눈이 커지는 김 펀드 매니저.
“나머지 7조는 위탁계좌군요.”
“그렇지.”
서형길은 짧고 묵직하게 대답했다.
김 펀드 매니저는 현재증권 보유 주식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형길은 김 펀드란 놈의 표정이 뭐랄까…… 험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데 웃겼다.
자식 놀라긴, 입술 그렇게 깨물면 아파, 임마.
김 펀드 매니저가 결정한 듯 목에 힘주며 말했다.
“저PER주인 태공산업, 대하화섬, 신화란제리, ZK텔레콤, 로데팔성. 저희가 매수하려던, 아니 매수하겠습니다.”
은연중에 말이 헛나온 김 펀드 매니저였다.
매수하려고 했었다고 하면 ‘그것도 매수 못 했냐’고 실력을 의심받는 상황을 실토하는 꼴이 아닌가.
보유하고 싶었지만, 시장에 물량이 없었다.
이제 보니 그 종목들을 현재증권이 다 보유하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시장에 뿌려진 물량 대부분을.
역시 현재증권이란 건가.
이렇게 팔아버리면 다시 모으기 힘들 텐데.
포트폴리오를 다시 짠다고?
이런 보석들을 팔아버리고 무슨 포트폴리오를 짠다고…….
딴소리하기 전에 얼른 거둬들여야 한다.
“전부 매수해도 됩니까?”
고 실장이 눈매를 떨며 목소리가 좀 높아졌다.
“전부 매수하려고?”
“네, 전부요. 전부 매수하고 싶습니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김 펀드 매니저는 목록을 보며 빨간 펜으로 빠르게 체크해 갔다.
“지주회사 계열인 SS화재, 에스월드, 제이제당. 이것도 매수하고요.”
“…….”
“경희, 대서, 서화, 서남은행도 매수하겠습니다.”
“…….”
“종금사 주식들도 매수하겠습니다.”
선별이 끝난 김 펀드 매니저는 세상에 이런 바보도 없을 것이라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이것도…….”
야.
고 실장이 결국 서류를 빼앗듯 낚아챘다.
“고련증권 자금 네가 다 끌어 쓸래? 지금 체크한 것만 해도 얼만 줄 알아?”
“그래도…… 무척 아까운 종목들이라…….”
“적당히 해라.”
“네.”
후.
김 펀드는 서류를 다시 받고 한숨을 푹 쉬었다.
에헤이.
서형길은 김 펀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용기를 북돋워 줬다.
“거, 고 실장, 사람. 참, 못됐네. 아랫사람을 좀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지.”
서형길은 김 펀드에게 계속하라고 손짓을 했다.
“천천히 생각해서 사라고. 천천히.”
“네. 감사합니다.”
서형길은 고 실장이 실장이랍시고 펀드 매니저를 구박하는 꼴을 보니 누군가 아련히 떠올랐다.
참나, 갑자기 강호석이 보고 싶어지네.
아, 담배나 한 대 피우자.
***
텍사스 오스틴.
“이사님. 여기 어떠십니까?”
“와! 땅덩어리 규모가 장난이 아니네.”
“그렇죠. 이게 대국의 클라스입니다.”
강호석과 박민수는 텍사스 오스틴의 중심 메트로폴리스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30평형 정도의 전망 좋은 사무실을 얻었다.
그 사무실이 맘에 든 강호석은 창밖을 보며 연신 감탄을 했다.
박민수는 강호석 뒤에서 같은 풍경을 보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미국에 다시 왔다.
이게 다 임재준 덕분인가.
재준 씨, 무슨 일이든 깔끔하게 처리할 테니 지켜보세요.
“이사님. 여기 좀 계세요. 변호사랑 마무리만 할게요.”
“그래, 천천히 해. 천천히.”
강호석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갑자기 서형길 실장님 생각이 왜 나는 걸까?
서 실장님이 이런 장관을 보며 담배를 한 대 쭉 빨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박민수는 변호사를 만나 유한책임회사(Limited Liability Company, L.L.C.)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유한책임회사는 주식회사와 파트너십을 합해 놓은 하이브리드 형태의 회사로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닌 외국인도 법인 설립이 가능했다.
외국인은 유한책임회사와 C-corporation란 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데, 유한책임회사는 주식회사와 달리 이중과세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한책임회사는 특정한 라이센스를 필요로 하는 전문적인 서비스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이는 미국 고객들을 위한 서비스였고 고객을 상대할 일이 없는 박민수에겐 라이센스가 필요하지 않았다.
“잘 좀 처리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각주마다 관련 법이 달라 복잡했기 때문에 일정이 바쁜 박민수와 강호석은 변호사에게 나머지 일을 맡기고 투자은행으로 향했다.
“가시죠. 강 이사님.”
“박민수 실장, 한국에 있을 때와 너무 다른데.”
“저 원래 미국 바닥 출신입니다. 향수병 때문에 한국 갔는데 미국에 다시 향수병이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여기가 편하다?”
“모르죠. 언제 다시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질지.”
강호석은 피식 웃었다.
미국에 왔음을 실감하니 자신이야말로 벌써 향수병에 걸린 것 같았다.
“근데 강 이사님 가족도 미국으로 넘어와야죠.”
“왜?”
“왜라뇨. 강 이사님처럼 안 되려면 넓은 세상으로 나와야죠.”
나같이?
“그거 방금 욕이지.”
“그럴 리가요.”
“아니야. 욕 같아.”
“이거 봐, 이거 봐. 시야가 좁으니 충고도 욕으로 알아듣고.”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알고.”
“어허, 그건 내려놓으세요. 말하면서 그런 거 드는 거 아닙니다.”
“거기 안 서.”
“그걸 내려놓아야 서지요.”
“일단 맞자.”
“으악! 미국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이 사람 패는 거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놈의 주둥이가 그래도!”
악! 사람 살려.
강호석과 박민수는 티격태격 이렇게 호흡이 잘 맞아갔다.
퍽! 퍽! 퍽!
어허, 찰지게도 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