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한국 가면 넌 죽인다(1)
김무혁과 같이 가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김혜림이 김무혁을 쳐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빠, 좋게 말할 때 가라!”
김혜림이 전투력을 내보이자 진기, 승하, 무열이 나서서 방어진을 구축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같이 가시죠.”
“서형길 실장님은 재준이와 친하니까. 재준이에게 맡기세요.”
“그럼, 그럼. 혜림아, 우린 괜찮아. 너무 그러지 마.”
재준이 동기들에게 눈치를 주자 동기들이 김무혁을 이끌고 앞서 나갔다.
자, 갑시다.
김혜림의 서슬 퍼런 눈을 피해 동기들은 김무혁을 끌고 저만치 앞서 걸어갔다.
아주 정답게 이야기를 하며.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렇죠.
-별말씀을요.
서로 미남이네 어쩌네, 동안이네 어쩌네.
군대, 학교, 선배…….
김혜림은 고개를 저으며 심통이 난 얼굴을 했다.
“혜림아, 가자.”
재준이 재촉하자 김혜림이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오빠랑 같이 가는 게 그렇게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나 오빠랑 사이좋아.”
“근데 왜?”
“…….”
“말해 봐. 너 오늘 뿔난 게 오빠 때문인 것 같은데.”
후.
“그건 아니야. 오빠 때문이 아니라, 아빠 때문이지.”
“아빠? 아빠가 왜?”
“아빠가 우인 종금사 대표거든.”
뎅! 뎅! 뎅!
재준은 머리에서 종이 세 번 울리는 걸 들었다.
혜림이 집안이 우인 종금사였어?
거참, 이거 어쩌지…….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재준이 놀란 건 김혜림이 집안이 쫄딱 망하기 때문이었다.
외환위기가 지나면 30개의 종금사 중 29개가 퇴출되고 단 하나의 종금사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 하나가 우인 종금사는 아니었다.
즉, 김혜림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아빠하고 싸웠어?”
“아니, 요즘 많이 힘드셔서…….”
당연히 힘들겠지.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있는데 여신이 잔뜩 깔려 있는 종금사가 비명을 안 지르면 이상한 거다.
“얼마나 힘드신데?”
“몰라. 근데 오늘 우리 회사에 온다는 거야.”
“엥? 야, 너 어린애같이 왜 그래? 당연히 영업하러 우리 회사에 와야 하는 거 아냐? 지금 우리나라에 멀쩡한 회사 몇 개 없는데.”
“그래도 싫다고. 창피하단 말야.”
“뭐? 김혜림 아버님 큰일 날 딸을 두셨네. 그럼 그동안 우리 회사에 영업하지 않은 게 너 때문이야?”
“꼭 우리 회사 아니어도 기업들은 많잖아.”
헐!
그런데 딸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재증권을 찾아왔다?
많이 힘드신 게 틀림없다.
힘든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로 망하는데.
살려야겠네.
역사에 보면 종금사 하나만 살아남지만 하나 더 살아남는다고 우리 경제에 큰 파장이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이미 박민수를 미국으로 보내서 미리내증권이 역사에서 사라졌는데.
아닌가? 박민수 빼고 다른 이들이 미리내증권을 창업하려나.
어쨌든 우인 종금사 살리면서 달러도 사고, 김혜림 집안 파산도 막고.
일석이조네, 일석이조.
재준은 빙글빙글 웃으며 김혜림과 걸었다.
걸음을 서둘렀던 동기들은 먼저 피자핫에 들어가고 재준과 김혜림이 조금 늦게 뒤를 따랐다.
재준은 김혜림을 오빠와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지만 마침 창가에 자리가 났다.
먼저 앉은 동기들이 메뉴를 정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박승하가 재준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재준아.”
어.
재준이 손을 흔드는 척 신호를 보냈다.
모두 자리 이동.
오케이.
동기들이 김혜림을 포위하자 재준은 잽싸게 김무혁 앞에 앉았다.
김무혁은 동생의 힐끔거리며 재준에게 말을 걸었다.
“임재준 씨죠? 우리 혜림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오빠!
귀도 밝아.
김혜림의 발악에 최진기가 막아섰다.
“재준이 인물이 남다르긴 하죠.”
하하하하.
김무혁이 재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우인 종금사…….
그래, 생각해 보면 잘된 거야.
안 그래도 종금사와 달러 딜을 한번 해야 하는데.
“종금사가 요즘 너무 힘들죠?”
“맞습니다. 꿈에 그리던 회사였는데. 요즘은 시장이 어떻게 변할까 무섭습니다.”
“잘될 겁니다.”
김무혁은 재준의 위로에 피식 웃었다.
“근데 우리 혜림이 일은 잘 합니까?”
안절부절.
멀리 있는 김혜림는 난처해하면서도 싸늘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러더니 결국, 주먹을 들어 올리며 요란한 경고를 날렸다.
그만해!
재준은 김혜림을 무시하고 김무혁에게 대답했다.
“혜림 씨 일을 참 잘합니다.”
재준의 뜬금없는 칭찬에 김혜림의 눈이 토끼 눈이 되었다.
“혜림 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희는 일을 진행하기가 힘듭니다. 아시죠? 혜림 씨 실력.”
“네. 혜림이가 워낙 악바리죠.”
“도움을 받았으면 고마운 만큼 갚는 것이 동료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현재증권에 대출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재준의 말이 무슨 의도인지 모르는 김혜림은 재준을 노려봤다.
도와준다고?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 임재준.
“그 전에 종금사 이야기 좀 해주세요.”
“다들 즐거운 식사시간인데, 재미없는 얘기를 하기 뭐한데요.”
“괜찮아요. 저희 관심사는 오직 돈이거든요. 돈.”
하. 하. 하.
하긴 서로 같이 이야기할 주제는 돈이지.
김무혁은 허탈하게 웃고는 종금사 상황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아무리 종금사가 황금 시장이라도 6개에서 30개로 한꺼번에 늘어나면 자금의 수요와 공급, 양쪽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너도나도 기업에 돈을 제공하겠다고 덤벼들다 보니 나중엔 종금사끼리 경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정부가 지방 중소기업에 종합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빌미로 지방에 있는 영세한 단자회사 24곳을 종금사로 만들었다.
단자회사는 투자금융회사, 투금사, 단기금융회사라고 거창하게 불렸지만, 이때 단자회사는 부실채권으로 연명하는 채권추심업무가 주였던 회사들이었다.
반면에 종금사는 증권과 보험 빼고 다 할 수 있는 종합금융회사다.
자잘한 여수신 빼고 굵직한 것만 말해보면 기업어음, 외화도입, 기업대출, 투자대행 등 돈을 굴리는 건 뭐든 할 수 있었다.
이러니 단자회사가 종금사로 바뀐다 한들 과연 돈을 잘 굴렸을까?
그럴 리 없었다.
정확한 금융시스템을 모른 채, 종금사들이 국내외를 설치고 돌아다닌 시절이었다.
“그래서 저희 회사가 눈을 돌린 곳이 동남아시아의 투기등급 장기채권입니다.”
김무혁의 말에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박승하가 말했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장기채권은 당연히 금리가 높죠. 예대 금리로만 따져도 남는 장사네요. 설마 국가가 망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시간만 지나면 남는 장사죠.”
맞장구치는 김무혁의 말에 재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는 장사?
미친 소리였다.
금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채권에는 미지급, 즉 디폴트 리스크라는 게 있다.
디폴트 리스크, 지금 재준이 써먹고 있는 거.
일명 BJ, 돈 없으니 배 째라고 드러누우면 받을 길이 없다.
게다가 자금의 수급에는 기간 불일치의 리스크도 있다.
종금사가 단기로 빌려와서 장기로 빌려주는 게 기간 불일치 리스크의 한 종류다.
이 시기에 해외 단기 금리는 2%, 국내 장기 금리는 10% 정도였다.
2%에 빌려와 놓고 시장금리보다 낮은 8%에 빌려준다며 떵떵거린 게 바로 종금사였다.
2% 단기 만기가 도래하면? 연장하면 됐다.
아니면 다른 단기 자금 빌려다 갚으면 됐고.
재준이 미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남는 장사라……. 그래도 부도 위험이 있을 텐데요.”
부도 위험이란 말에 모두 재준을 쳐다보았다.
설마?
혹시?
그동안 재준을 겪었던 팀원들은 ‘혹시?’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혹시?
정말 부도?
모두의 시선을 받은 재준이 작게 한숨을 삼켰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알았어. 얘기해줄게.
“국제 자금시장에서 종금사가 조달하는 자금은 단기입니다. 단기로 빌린 자금을 위험한 나라에 장기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장기 투자한 돈의 만기가 안 된 상황에서 단기 자금의 만기 연장이 거부되면? 더는 단기 자금을 빌리지 못한다면? 그럼, 종금사만 부도나지 않겠습니까?”
“만기 연장 거부?”
-에이, 난 또 뭐라고.
-만기 연장이야 다 해주는 거잖아.
-연장 안 되면 다른 자금 빌려다 갚으면 되지.
김혜림 빼고 동기 셋은 재준의 말을 허투루 흘렸다.
허, 이 사람들 보게.
그 일이 곧 닥친다니까.
“재준아,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김혜림밖에 없네.
이런 나쁜 놈들.
근데 의외로 재준의 말이 김무혁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재준은 김무혁을 마주 보며 턱을 괴었다.
“혹시 동남아에 또 투자하실 계획인가요?”
“네, 저희 실사팀이 까다롭게 선별했기 때문에 위험 요소가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맞는 말이다.
이 시대 실력 있는 종금사는 자사가 개발한 신용 평가 기법을 활용했다.
일반 은행이나 증권사보다 까다로운 대출 심사 기준이었다.
그럼에도 국가 부도를 떠올릴 수는 없었겠지.
그것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줄줄이 말이야.
“알아요. 까다롭게 심사한 거. 하지만 동남아는 까다롭게 심사해도 위험한 곳이잖아요. 아마 우인 종금사에 경험 있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속내를 물어보면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동남아는 아니라고요?”
“네. 동남아에 들어가면 망해요. 이미 들어갔다면 더 이상 투자하지 말고 빠지세요.”
재준이 계속 몰아붙이자 김무혁은 실의에 잠겨 버렸다.
망한다고?
그래도 국가인데…….
김무혁은 자신을 애처롭게 쳐다보는 동생을 보았다.
동생의 숨넘어가듯 자랑하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오빠, 우리 회사에 임재준이라고 있는데 한 번도 예측을 틀린 적이 없어.
-타고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재준이가 망한다면 망한다니까. 정말 신기하지.
망하면 우리 집안은…….
김무혁은 그 아찔한 생각에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싶었다.
재준은 혼란스럽게 엉킨 김무혁의 머릿속을 정리해 주듯 제안 하나를 던졌다.
“혜림이 오빠님, 지금부터 들어오는 달러를 현재증권에 대출하는 건 어때요?”
“달러요?”
“네, 한화 말고 달러요. 엔화도 되고.”
김무혁의 굳었던 표정이 잠시 풀렸다.
달러를 빌려주면 환전 수수료를 절약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다.
1년짜리 단기 대출을 해외에서 들여오는 것은 문제없다.
현재 종금사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이자를 대폭 할인해주고 있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김무혁을 보는 재준.
그의 망설임도 이자일 터였다.
“금리는 8%로.”
김무혁이 안도의 숨을 쉰다.
8%?
물론 종금사 대출이 한창일 때는 12%도 가능했지만, 지금은 8%면 적정하고 괜찮은 거래다.
표정이 풀리는 김무혁을 보며 재준은 또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대출 기간은 1년.”
“네? 왜 그렇게까지…….”
놀랄 만한 제안이겠지.
대출 기간이 1년이면 단기 자금이다.
즉 우인 종금사는 2%에 빌려 8%에 대출해주는 것이다.
그것도 단기 대출 기간으로.
그냥 앉아서 돈을 버는 셈이다.
재준아…….
동기들은 일개 사원이 이런 결정을 내려도 되나 싶었다.
“사실 서형길 실장님으로부터 달러를 매입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잖아요. 우린 해외 대출 기관에서 달러를 빌리기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