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애초에 살 생각 따윈 없었어(3)
뭐라는 거야?
장내가 소란스럽기 시작했다.
은행장들은 일제히 정 회장을 쳐다보았다.
정 회장은 입 주위가 부들부들 떨리도록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정 회장님.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난 현재증권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이슬 그룹이 자진 부도라니요. 뭐라고 말씀해 보세요.”
“정 회장님.”
탕탕탕.
앤드류가 탁자를 거세게 두들겼다.
“조용히 하십시오. 증거도 없는 이야기로 혼란을 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미스터 임.”
재준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스터 임. 자제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앤드류. 정 회장과 잘 상의해서 내 채권에 대한 이자 결의해 주면 돼요. 그리고 나중에 회사 정리되면 원금도 갚고.”
임재준.
앤드류는 묘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임재준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경우도 없고 거칠고 대담했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한 마리 짐승이다.
끊임없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자기 걸 건드리면 모두 죽을 각오를 하라고.
은행장들을 상대하는 것도 놀랍지만.
현 부장판사의 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다니.
도대체 어쩔 셈인가.
너도 약점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
앤드류는 오늘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좀 더 정보를 취합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다음을 기약하자.
탁탁.
앤드류는 사람들을 주목시키고 말했다.
“오늘 채권단 회의는 보신대로 큰 변수가 생겼습니다. 모든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이상, 그랜드월은 이슬 그룹과도 경영 자문에 대해 다시 대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은행장들의 표정에 난감함이 드러났다.
“하지만 경영 자문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새로운 조건과 새로운 해결책을 들고 다시 모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앤드류가 빙글빙글 웃는 재준을 쳐다봤다.
마치 내 것은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채권 이자에 대해서는 이슬 그룹과 상의해서 내일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땡스, 앤드류.”
탕탕.
“이만 채권단 회의를 마칩니다.”
흠흠.
은행장들이 줄줄이 나가고 정 회장은 재준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앤드류가 눈짓을 하자 벤자민이 정 회장을 끌고 가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앤드류가 재준에게 다가오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슬 그룹도 노리는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그랜드월이 이슬 그룹 경영 자문을 맡을 몰랐어.”
“늘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는 겁니까?”
“이게 어때서?”
“너무 거칠어서 주변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후후.
“새겨듣도록 하지.”
“미스터 임. 하나 물어도 됩니까?”
앤드류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뭐든, 내가 대답해 줄 게 있으면 해줄게요.”
“TH유업 루머를 퍼뜨리고 TH 그룹 주식은 왜 매집하는 겁니까?”
이게 뭔 아닌 밤중에 남의 다리 긁는 소리지?
“난 그런 적 없는데.”
“미스터 임 작품 아닙니까?”
“글쎄, 정말 난 처음 들어. 누가 그래? 내가 TH유업 루머를 퍼뜨렸다고?”
앤드류는 눈매부터 입술, 손가락과 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놏치지 않고 살폈다.
인간은 자신이 거짓을 말할 때 아주 미세한 변화를 보인다.
눈매를 살짝 떤다든가, 혀로 입술을 핥는다든가, 손가락으로 무언갈 톡톡 두드린다든가, 안절부절 몸을 주체 못 한다든가.
하지만 재준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긴장하지 않고 있구나.
“아니면 됐습니다.”
“설마…… 약속을 어기고 먼저 TH 그룹 부실채권을 매집한 건 아니지?”
앤드류는 후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상당한 양을 매집한 상태라 재준이 맘만 먹으면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대략 1,000억 정도.”
“어허, 이런, 이런. 이러면 상당히 섭섭한데. 이렇게 서로 믿음이 없어서야. 전화라도 하지.”
“그럼 현재증권이 1,000억 매집할 동안 우린 손 놓겠소.”
“이거 꼭 속는 기분이 드는데.”
“……암튼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난 다른 일이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 기다려 봐.”
재준은 앤드류를 향해 빙글빙글 웃었다.
“또 할 말이 있습니까?”
“있지. 아주 중요한 건데.”
앤드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저 웃음. 자꾸 신경이 쓰여.
“뭡니까?”
“뉴월드 지분.”
“설마…….”
“맞아. 현재증권이 보유하고 있어. 49% 전량.”
앤드류의 머릿속에서 선동방의 선 회장이 무릎을 꿇고 뉴월드 지분을 재준에게 바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후후.
“대단하네요.”
“50억 주고 샀을 뿐이야.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
50억이라.
아직 모르는 건가.
“우리가 60억 드리겠습니다. 파시죠.”
“60억? 뭔 계산이 그래? 최소한 원금 1억 3천만 달러는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모를 리가 없지.
“한 가지 궁금한데. 선동방이 순순히 내주던가요?”
“그럴 리가, 그만 한 기업 하나 남겨드렸지.”
“50억은 아니었군요.”
“당연히.”
앤드류가 먼저 ‘원하는 걸 말해’라는 듯 입을 닫았다.
“내가 먼저 조건을 말해야겠지?”
앤드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TH 그룹 부실채권 넘기고, 플러스 1억 달러. 어때, 내가 조금 손해 보려고. 매집하는 데 수고했으니. 수고비는 챙겨줄게.”
재준을 은근히 주시하던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빨리 결정해야 해. 인도네시아 택시 회사가 성업 중이라는 데. 내가 인도네시아로 날아가서 이익금이 얼마인지 확인하면 안 팔 수도 있어.”
사실 인도네시아 택시 회사는 꽤 성공적이었다.
다만 지금 태국에 머물러 있는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를 덮치면서 파산하고 말지만.
“이번 주 안에 변호사가 갈 겁니다.”
“오케이. 뉴월드 지분 50억은 별도야. 그리고 지불은 달러로. 그랜드월 지분으로 줘도 상관없고.”
후후.
앤드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고 있는 겁니까?”
“뭘?”
“한화 가치가 하락한다는 것.”
“모르면 안 되지. 그래도 나름 증권 밥 먹고 사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재준은 빙글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앤드류는 재준의 저 웃음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슬 그룹 문제도 잘 해결하고. 이자 이달부터 들어오는 겁니다. 그럼 이만.”
할 말을 마친 뒤 돌아가는 재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앤드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도 당한 건가.
임재준, 애초에 TH 그룹 부실채권을 살 생각 따윈 없었어.
***
재준은 앤드류와 헤어지고 바로 현재증권으로 돌아왔다.
경제정책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냉랭한 공기가 사무실 안에 꽉 차 있었다.
원인을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네.
김혜림 주변으로 검은 아우라가 피어올라 아무도 접근이 불가했다.
모두 수북이 쌓여있는 자료 뒤에서 김혜림을 흘깃흘깃할 뿐.
얘는 또 왜 이래?
무슨 일인데?
“자, 점심들은 먹었습니까?”
“아, 아직인데.”
말을 하는 박승하가 고개를 까딱이며 김혜림을 가리켰다.
‘밥 먹을 상황이 아니야.’
그렇다고 굶어?
‘네가 어떻게 좀 해 봐.’
나 참, 밥 먹는 것도 신경 써야 하나,
그래, 어쨌든 다 내 직원들인데 내가 다독여야지. 암.
“자, 여러분 오늘은 내가 요 앞에 문을 연 피자핫에서 쏘겠습니다. 전부 나갑시다.”
피자핫!
모두 김혜림의 눈치를 보면서도 주섬주섬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재준은 눈치 보는 사무보조원에게도 어서 가자고 손짓을 했다.
김혜림은 여전히 시무룩하게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다른 동기들이 사무실을 나가 창에 다닥다닥 매달려서 안을 지켜봤다.
“혜림아, 가자.”
김혜림이 고개를 들어 재준을 쳐다봤다.
눈가가 붉었다.
울었어?
“왜? 너 사고 쳤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왜 이렇게 험한 얼굴인데? 말해 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아니야’라는 듯 또 고개를 저었다.
“야, 저기 봐라.”
재준이 손가락으로 걱정스러운 눈빛의 동기들을 가리켰다.
“우리도 알아야 도와주지. 말해 봐.”
“아니야, 피자 먹으러 가자.”
힘없이 일어난 김혜림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재준을 지나쳐갔다.
무슨 일이래. 평생 명랑 소녀로 살 것 같더니.
재준은 김혜림을 쫓아가서 팡팡 등을 두드렸다.
“말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말해. 도움이 안 돼도 힘은 줄 수 있잖아. 우리 대기업도 쓰러뜨린 사람들이라고.”
김혜림이 재준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하하, 녀석.
조금 기분이 풀린 김혜림을 이끌고 동기들과 1층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갈 때였다.
“혜림아, 김혜림!”
재준과 동기들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림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
남자를 본 김혜림이 얼어붙었다.
“오빠, 여기까지 오면 어떡해.”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걱정 마.”
사내는 김혜림이 위아래로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열, 진기, 승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애인이 있었냐?
모두 김혜림과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혜림이 오빠 김무혁입니다. 아, 친오빱니다.”
아, 친오빠…….
친오빠라는 말에 그들은 무언의 안도를 하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식사하러 가시나 봐요.”
“네.”
“여기, 명함입니다. 제가 서형길 실장님을 좀 뵈러 왔는데 몇 층으로 가야 할까요?”
김무혁이 건넨 명함을 보던 최진기의 눈이 커졌다.
“종금사? 귀족들이 다닌다는 그 종금사 실장이세요?”
“귀족이라뇨, 그 무슨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하하하.”
종금사라니…….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입사 전 최진기는 선배 주선으로 해외 석사인 동기와 함께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진기와 동기는 그녀들의 단아한 모습에 내심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런데 동기가 그녀들이 다니는 회사를 투금사로 지칭하자, 그녀들은 정색하며 진기와 동기를 훈계했다.
-투금사가 아니라 종금사입니다. 귀족이 다니는 회사라구요!
최진기는 김무혁이 내민 명함에서 종금사란 명칭을 보고 있자니 단호하게 내뱉던 그녀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투자금융회사(투금사)에서 종합금융회사(종금사)로 전환된 24개 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우인 종금사.
그곳에 다니고 있던 그녀들은 회사에서 이제부터 투금사가 아니라 종금사라며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하라고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김혜림의 오빠, 김무혁이 우인 종금사 실장이었다.
“투금사에서 종금사로 전환하면 귀족이 될 줄 알았죠. 이렇게 대출을 구걸하러 돌아다닐 줄은 몰랐습니다.”
“구걸이라뇨?”
이때,
“오빠!”
김무혁의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재준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서형길 실장님은 지금 식사하러 나가셨을 겁니다.”
김무혁은 시계를 보더니,
“그렇군요. 그럼 좀 기다려야겠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지금 저희들 식사하러 가는 길인데.”
“아, 저는 괜찮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가시죠. 제가 서형길 실장님에게 전화 걸어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김혜림 씨 친오빠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