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애초에 살 생각 따윈 없었어(2)
다음 날.
이슬 그룹 회의실.
그랜드월은 시중 은행 중 빅5라 불리는 제이, 조화, 사업, 항상, 도시은행장들과 같이 자리를 했다.
9천억이 넘는 대출이다 보니 긴장감이 팽팽했다.
여기에 부실채권은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 하신 은행장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번 이슬 그룹의 경영 자문을 맡게 된 그랜드월 팀장 앤드류입니다.”
이미 부도 그룹과 산미 그룹의 부도로 부실채권이 가득 쌓여 있고, 대한 그룹과 선동방 그룹의 해체 문제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
은행장들은 그랜드월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저희가 분석한 바로는 이슬 그룹 중 ㈜이슬, 이슬건설, 이슬종합식품, 이슬맥주는 정상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머지는 정리 기업으로 분류하여 매각과 청산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매각은 그나마 돈이라도 얼마 돌려받을 수 있지만, 청산은 한 푼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은행장들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또 부실채권으로 인해 은행 건전성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정상화 과정 첫 번째 단계는 부도유예협약을 맺자는 것입니다.”
부도유예협약.
한마디로 당장 부도가 나야 할 기업이지만 잠시 뒤로 미루는 것으로 합의를 하자는 말이다.
그다음 말이야 뻔하게도,
“다음, 채권행사유예 및 기업심사를 다시 하는 겁니다.”
채권행사유예.
‘돈을 좀 늦게 받아라’를 좋은 말로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출금 상환을 연장하며 금리 우대 조치도 주어 정상화를 시키자는 게 저희 그랜드월의 결론입니다.”
“금리 우대 내용이 뭡니까?”
은행장 하나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기존 고금리의 단기 대출을 저금리의 장기 대출로 전환하자는 내용입니다.”
이자도 깎아주고 대출금도 천천히 갚겠다.
쉽게 말해 은행은 죽고 기업은 살자, 뭐 이런 표현이다.
이때,
“반대요.”
누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앤드류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누군지를 확인하고 미간을 좁히며 쳐다봤다.
임재준?
어쩐 일로?
은행장들도 재준의 등장에 인상을 쓰며 한마디씩 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오는 겁니까?”
“밖에 사람 없습니까?”
“누군지 신분을 밝히세요.”
“방금 뭐라고 한 겁니까? 반대라니요.”
재준은 터벅터벅 걸어서 회의실 중앙에 섰다.
“천 실장님.”
천 실장이 재준에게 서류 한 장을 전달했다.
“현재증권의 경영정책연구실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여러 은행에서 저희에게 넘긴 부실채권 목록이 있습니다. 이 목록에 의하면 현재증권은 총부채 4조 7천억 원 중 부실채권으로 분류된 3조 8천억 원의 채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즉, 최대 채권사란 말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참석하는 데 이의 있으십니까?”
은행장들의 뇌리에 일제히 기억이 살아났다.
얼마 전 이슬 그룹의 부실채권을 현재증권에 넘겼다는 보고였다.
솔직히 이슬 그룹이 부도 직전 워크아웃을 신청할 때 주요 사업체 외에 나머지는 100% 손실을 봐야 한다고 예상했다.
받지 못할 채권이기에 10% 이하에라도 처리하는 게 당연했다.
근데 그걸 전부 사들였다고?
대충 어림잡아도 3,000억은 될 텐데.
왜?
My mistake.
아차 하는 벤자민의 표정을 앤드류가 눈치챘다.
벤자민도 이슬 그룹 분석하랴 TH제과 신경 쓰랴 이슬 그룹 부실채권은 미처 신경 못 썼다.
하지만 그랜드월은 이슬 그룹 정상화를 위해 경영 자문으로 계약이 된 상태.
채권단과 협상이 깨졌을 때 책임 한도는 상상 이상이 될 것이다.
기업 경영 자문, 즉 기업컨설팅은 대책만 세워주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랜드월은 이슬 그룹이 정상화가 되도록 자금도 투입해야 한다.
채권이든 신용 대출이든 신주 발행이든 뭐든지 간에.
그랜드월이 무조건 마무리 지어야 했다.
“미스터 임. 왜 반대하는 겁니까?”
“잠깐만, 앤드류.”
재준은 천천히 걸으며 은행장들을 바라봤다.
“모두 책임지기 싫은 표정인데, 맞아요? 자기들 돈 아니라 이거죠? 대충 그랜드월이 제시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정부에 아쉬운 소리 좀 하면 넘어가겠지. 아닙니까?”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은행장 하나가 재준에게 소리 질렀다.
“아, 제이은행장 되시는군요. 제가 감히 당신의 생각을 읽어서 화가 나신 겁니까?”
“말조심하시오. 우리는 이슬 그룹의 정상화를 원해서 모인 겁니다.”
“그래요? 근데 이 부실채권 왜 파신 겁니까? 그렇게 이슬 그룹의 정상화를 원하시는 분이.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건 은행이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요. 우리도 BIS비율을 생각 안 할 수 없으니까.”
“아, 어디서 들으시긴 했나 보네요. BIS비율이라……. 근데 아직 우리나라에 적용되지 않았잖아요. 앞으로 언제 될지도 모르고. 될 수 있으면 한국엔 적용 안 되도록 정부에 로비도 하실 거고. 변명할 때나 사용하려고 알아두신 같은데. 뭐 뻑하면 은행 건전성을 들먹이십니까?”
“그건…….”
“거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이슬 그룹 정상화를 원하는 제이은행이 우리에게 제일 많이 파셨던데. 자그마치 8천억이나.”
7%에 구매해서 560억 정도 들어갔지만.
제이은행장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재준은 고개를 돌려 다른 은행장들을 바라봤다.
모두 험한 눈으로 재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아직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언제 부실채권으로 당한 적이 있어야 잘못인지 알지.
사실 따지고 보면 이슬 그룹에 대출해준 것도 부실채권으로 분류한 것도 자신들의 의지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정부가 뒤에서 지시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정확한 건 아니고, 이 시대는 관치 금융이 대부분이었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어쨌든 은행장으로 있으면 책임은 져야지.
다른 은행장들이 자신들이 판 부실채권의 여부를 두고 서로 속닥이며 이야기를 했다.
재준은 은행장들의 입을 막았다고 생각하고 앤드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앤드류, 우리 두 번째 만남이네요.”
“미스터 임. 왜 반대하시는 겁니까?”
“워크아웃은 안돼요. 아, 화의도 안 됩니다. 되도록 법정 관리로 갑시다.”
워크아웃은 법원이 개입하지 않고 채권단과 기업이 합의에 따라 진행하고 화의는 법원이 개입한다는 게 워크아웃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법정 관리는 경영자가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야 한다.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지금 정 회장님은 빚을 제대로 갚을 능력이 없어요. 저 사람에게 기업을 다시 맡길 순 없습니다.”
뭐?
지금까지 자리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이슬 그룹 정 회장이 벌떡 일어섰다.
“근거가 무엇인가?”
“근거를 왜 나한테 물어요? 자신이 대야지. 전 채권자예요. 대체 어느 경우에 채무자가 채권자한테 근거를 묻습니까? 채무자면 채무자답게 말해요. 난 이렇게 이렇게 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닌가요? 일어선 김에 근거를 대 보세요.”
“그건…….”
“잠깐만요.”
정 회장이 대답하려 하자 앤드류가 만류했다.
하여튼 눈치는 빨라.
“회장님은 어떤 말씀도 하시면 안 됩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기록되고 있습니다.”
“…….”
정 회장이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풋.
“그냥 앉는 거예요? 난 또 대단한 뭔가 있는 줄 알았네.”
저놈이.
회장님!
재준의 말에 다시 발끈하는 정 회장을 앤드류가 제지했다.
“미스터 임. 이슬 그룹이 가지고 있는 이슬재팬을 매각하면 어느 정도 자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아실 겁니다. 이슬재팬은 현재 일본 소주 판매 1위 업체입니다. 이에 대해 정 회장이 결단한 상태입니다.”
이슬재팬, 재준의 기억으론 이슬 그룹과 그랜드월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그랜드월은 이슬 그룹이 이슬재팬을 죽어도 못 팔게 법정 싸움까지 벌였다.
그런데 내가 나타나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랜드월이 이슬재팬을 팔려고 하고 난 못 팔게 막고.
이건 좀 웃긴데.
풋.
재준은 이번에는 앤드류를 보고 비웃었다.
“이봐, 앤드류. 앤드류. 생각은 있는 거예요? 이슬재팬의 가치가 높기는 해. 근데 거긴 그냥 큰 도매상 수준이잖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그걸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애초에 이슬재팬의 소유권이 이슬홍콩에 있는 건 아나?”
이슬홍콩?
앤드류가 미처 몰랐다는 표정으로 정 회장을 노려보았다.
이슬 그룹 계열사 목록에 없으니 당연히 모르지.
이슬재팬 서류 들여다봐야 그나마 알 수 있으니까.
“쯧쯧, 앤드류 아직 일본에서 서류를 못 받아 본 모양이네.”
저 능구렁이 정 회장이 보여줄 리가 없지.
왜 이슬홍콩까지 세워서 이슬재팬을 관리하고 있었을까.
그건 이슬홍콩의 주식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달렸다.
바로 싱가포르 회사가 보유하고 있다.
정 회장의 지인이 관리하고 있으면서 해외로 도피했을 때 매번 자금줄이 되어주던 바로 그 회사.
즉, 이슬재팬의 이익은 싱가포르에 고스란히 쌓이는 구조였다.
그래, 이 정도는 관계를 꼬아놔야 나중에 한국에서 탈출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거니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앤드류, 이슬홍콩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슬홍콩 주식을 사버리면 끝나는 문제니까. 뭐, 정 회장님에게 양도받을 수도 있고. 정말 중요한 건 만약 한국에서 이슬재팬으로 소주를 공급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예요.”
앤드류의 미간이 좁아졌다.
“허수아비…….”
“맞아. 그게 바로 이슬재팬이란 말이야. 그게 뭐 대단한 물건이라고 판다는 겁니까? 샀다가 공급 안 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회사를. 누군가 이슬재팬을 산다면 내가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만든 워크아웃 안이 맘에 안 든다는 거군요.”
“댓츠라잇. 정 회장은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채권에 대한 이자 당장 지급하세요. 유예 같은 거 저한테 의미 없어요.”
“미스터 임. 그건 불가능합니다. 채권 금리가 12%입니다. 월 400억에 가까운 돈입니다. 이슬 그룹을 정상화시킬 수 없습니다.”
“앤드류, 또 얘기해야 하나요? 난 이슬 그룹 정상화시킬 생각이 없다니까요. 안 되면 다 팔아버리면 되는데 뭐 하러 뒷돈이나 챙기는 사람에게 회사를 맡깁니까?”
정 회장이 벌떡 일어섰다.
“뒷돈이라니?”
하하.
재준이 정 회장을 보고 빙글 웃었다.
“정 회장님. 이 시간부로 검찰에 횡령 자료 넘기고 당신 출국 금지시킬 거야.”
“뭐라고?”
“당신 캄보디아에 못 간다고.”
정 회장이 재준을 노려봤다.
“어디 맘대로 해 봐. 나도 변호사…….”
아니, 아니.
재준이 손을 저으며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꼭 말하게 만드네. 변호사가 아니라 부장판사 아닌가? 김앤강 변호사랑 친분이 두텁던데. 맞잖아요? 아, 정확히 친분이 있는 게 아니라 부탁하는 거겠지만.”
“…….”
재준의 목소리가 굵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슬 그룹 부도 내주십시오. 저한텐 이슬만 남겨주시면 다시 예전처럼 모시겠습니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