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애초에 살 생각 따윈 없었어(1)
잠시 후, 박민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재준은 강호석과 박민수를 서로 소개하고 박민수는 그간에 있던 이야기를 강호석에게 해주었다.
강호석은 점점 동공이 확장되더니 나중엔 말없이 소주를 입에 들이부었다.
푸하.
강호석이 믿을 놈 없다는 듯 재준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네가, 아니, 아니. 너님께서 회장님 손자라는 소리지요?”
“네.”
“그럼 저번에 서형길 실장님이 하셨던 헛소리가…….”
박민수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강호석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아직 모르고 계셨구나. 하긴 일개 사원으로 회사에 다니니 누가 의심이나 하겠어요. 참, 취미하고는 고약하죠?”
강호석이 너도 같은 놈 아니냐는 듯 박민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댁이랑 내가 미국에 투자사를 차리러 가는 거고.”
“그래요. 앞으로 잘해 봅시다.”
“그러니까, 회장님이 날 자른 게 아니라 여기 임재준, 아니, 도련님이 나를 스카우트한 거네.”
이제야 슬슬 상황을 이해한 모습에 재준이 후하고 안도의 숨을 쉬며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게요. 할아버지에게 부탁했는데. 할아버지도 참, 좀 자세히 이야기하시지. 무턱대고 회사를 그만두고 기다리라고 하셔서 선배가 오해한 거예요.”
“선배라는 말은 빼주시죠.”
“그럼 뭐라고 불러요. 강호석 씨도 이상하잖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하던 대로 하세요.”
예의 바른 청년 재준을 바라보는 강호석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었다.
“내가 회장님 손자에 대해 들은 게 있는데. 그 뭐냐…….”
“망나니 임재준이요?”
“네, 그게 너님……이십니까?”
“맞아요. 접니다.”
재준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석은 두 눈을 감고 잠시 말없이 있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재준을 보기 거북한지 박민수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대한 그룹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여기 도련님이다?”
“그에 앞서 만선증권부터 박살냈죠.”
“그리고 또?”
“제가 아는 건, 선동방 이번에 무너뜨린 거랑, 아, 저희 투자사 자본금이 재경기계에서 나왔다고 했어요. 맞아. 그것도 여기 재준 씨가 한 거네요.”
“재경기계면 노경범하고 강병구 아웃시킨 사건인데. 그것도 도련님이 하셨다고요?”
“거참. 존댓말 쓰지 말라니까요. 듣기 거북한데.”
“알았어. 그럼, 나중에 죽더라도 편하게 할게.”
“그래요.”
목이 바싹 탄 강호석이 술병을 들었는데 빈 병이었다.
“이모, 여기 술 좀 줘요. 한 세 병 주세요.”
“선배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 오늘 나 짤렸잖아. 며칠은 집에서 쉴 거야. 그리고 나 원래 술 세. 그간 안 먹은 거지.”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데.”
술이 나오고 강호석이 득달같이 낚아채더니 잔에 술을 채우자마자 들이켰다.
카.
“다시 정리하면, 내가 여기 박민수 씨랑 미국에 가서 투자사를 세운다. 그거지.”
“맞아요.”
“그다음은 주식이나 채권, 아니면 달러를 사는 건가?”
“아니요.”
“아니야?”
강호석은 이야기가 예상과는 달리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가자 허리를 세우고 입을 다물었다.
박민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 뭘 하는 거지?”
“도매은행(wholesale bank)을 인수할 겁니다.”
“corporate banking? 기업을 상대로 하는 은행이요?"
"맞아요.”
“재준 씨. WB는 한두 푼에 인수 가능한 게 아니에요.”
“꼭 WB라 하면 대형 은행만 생각하는데, 농업이나 축산 회사와 거래하는 중소 투자은행도 많아요. 무역서류 대행해주고 소규모 투자도 알선해주는 곳이요. 우린 그중에서도 다 쓰러질 것 같은 은행에 투자할 겁니다.”
“아……. 난 또. 그건 가능하지요. 무역 업무를 전담하는 은행들이 꽤 있어요. 근데 왜 하필 다 쓰러져가는 은행에 투자하는 겁니까?”
“다시 살아나니까. 또 다른 목적이 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직접 알려드릴게요. 일단 회사 설립하고 정 실장님이 알아본 도매은행이 몇 개 있는데 쭉 한번 시찰해 보세요. 현지에서 허름하고 좋아 보이는 은행이 보이면 접근도 해보고.”
이번에는 강호석과 박민수가 동시에 의아해했다.
허름하고 좋아 보이는 은행이 어딨어?
“근데, 한국에서 온 이름 없는 회사의 투자를 받을까?”
“그럼요. 한국과 관련 있는 은행들이에요. 다들 알죠? 우루과이 라운드.”
“아……. 그건 알지.”
한국에 곡물과 축산물을 수출하는 회사와 관계있는 은행은 많았다.
다들 수출이 막혔다 뚫렸다 하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 그렇지.
1994년에 선진국끼리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는 한국에서 말만 나오면 전국에 시위가 벌어졌다.
그때마다 몸살을 앓는 곳은 바로 미국 도매은행이었다.
결국, 한국도 1997년 7월 우루과이 라운드가 시작되고 이로 인해 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도매은행들이 살아났다.
그중 하나에 투자해 대주주가 되어야 한다.
“그 도매은행을 중심으로 미국에서 금융업을 시작할 겁니다.”
음…….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박민수가 말을 꺼냈다.
“괜찮은데요. 난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이제 막 시작하는 유망업체를 발굴하는 건 줄 알았는데. 도매은행이면 업체 발굴도 유리한 데다 증권 관련도 이미 세팅되어있을 것이고 미국 국내법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아주 괜찮아요. 하하하하.”
박민수의 표정이 유독 밝았다.
좋아하긴 아직 이르지 더 놀라운 게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돈이 쏟아져 들어오면 아주 깜짝 놀랄걸.
강호석은 아직 도매은행에 대해 잘 모르겠는지 계속 박민수와 재준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근데,
“이제 임 대표로 불러야겠네. 우린 직급이 뭐지? 계속 이름을 부를 순 없잖아.”
“실장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지. 실장이 앞으로 뭐든 될 수 있는 직급이긴 해. 그럼 이쪽은 박 실장, 난 강 실장.”
“그보다 강 선배는 이사라고 부를게요.”
“뭐야? 나이 많다고 이사 다는 건가?”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지요.”
“뭐?”
이렇게 강호석도 마무리 지었다.
이제 미국에서 기반을 다지면 재준이 날아갈 것이다.
***
며칠 후.
현재증권 회장실.
“이게 뭐지?”
독이 든 성배입니다.
전경련 손 회장은 재준이 내민 보고서를 보았다.
“SSY자동차 부채 현황입니다.”
손 회장은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으냐’라는 표정으로 재준을 쳐다보았다.
재준도 ‘몰라서 물으십니까’라는 눈빛을 손 회장에게 주었다.
“선동방 그룹에서 뉴월드 지분과 세 개 금융회사를 현재증권에 안겨주신 보답으로 준비한 겁니다.”
모두 손 회장을 거쳐 현재증권으로 넘어왔다.
부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거의 헐값에 인수했다.
“임 팀장, 그 금융사 부채까지 터뜨려서 일이 아주 쉬웠어. 덕분에 우리가 재미를 너무 봤는데.”
재우 그룹이 나서서 채권단을 몰아세웠더니 알아서 채무를 장기대출로 전환했으며 다른 기업에 약속된 금액으로 팔아 이윤을 남겼다.
역시 이런 일엔 대기업의 능력이 여실히 발휘되었다.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다.
“현재증권은 금융사 세 개면 차고 넘칩니다. 재우 그룹 크기가 있지 어떻게 저희랑 비교하십니까?”
허허허.
손 회장이 임병달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임 회장님, 손자 잘 키우셔야겠습니다. 배포가 남다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직 그저 혈기 왕성한 젊은이일 뿐입니다.”
허허허.
손 회장은 웃음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재준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이번엔 재우자동차가 SSY자동차를 먹어라? 그럼 그다음은? 이건 분명히 체할 수밖에 없는 크기인데.”
재준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체하지 않게 드시면 됩니다.”
체하지 않게?
손 회장은 재준의 다음 말에 관심이 가는 듯 팔짱을 끼웠다.
“여기.”
재준이 서류 하나를 손 회장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뭔가?”
“제 생각을 적은 기획서입니다. 아직 살을 더 붙여야 하지만 큰 그림은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손 회장은 서류를 한 장 넘겼다.
[500억 달러 무역 흑자 프로젝트]
“현 정부는 지금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조정으로 대기업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달러를 벌어야 합니다. 수출로 활로를 뚫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 정부의 구조조정에 불만이 가득한 손 회장이었다.
거기다,
‘수출’이란 단어에 손 회장의 눈빛이 빛났다.
언제나 그렇듯 위기 상황에서 재우 그룹은 해외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역경을 이겨냈다.
해외 자원 개발 참여, 해외 건설 수주, 조선 수주, 동유럽 시장 개척.
그뿐인가.
중국, 몽골, 인도, 우즈베키스탄, 루마니아, 폴란드로 이어지며 자동차 공장을 세웠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킴키즈 칸’이었다.
“그래서 SSY자동차를 인수해라…….”
“그다음 SS자동차도 합치셔야 합니다.”
“SS까지?”
거기까지 먹어야 명치에서 탁 걸립니다.
SS자동차야말로 재우 그룹에 결정타가 될 테니까.
“SSY자동차를 인수하려면 3조 4천억의 부채를 해결해야 하네. 설마 모르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SSY 그룹 김 회장님이 자동차 지분을 포기하시면 1조는 해결이 될 겁니다. 나머지 2조 4천억 원은 SSY자동차 생산 설비를 담보로 삼고 5년 거치 10년 분할상환하는 조건으로 주거래은행과 합의하실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5년 거치…….”
“500억 달러 수출 프로젝트로 정부와 딜을 한번 하십시오.”
“정부라면 지금 사리 분간 못 하고 있는데?”
“그럼, 차기 대통령과 거래를 하시면 됩니다.”
“임 팀장…….”
손 회장은 재준을 매섭게 노려봤다.
재준이 겁을 먹기는커녕 손 회장을 향해 빙글 웃었다.
“재우 그룹에 브레인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기획서를 보여주고 검토를 시켜보십시오.”
“일단 우리 애들이 보면 좋아는 할 것 같긴 해.”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눈이 확 뒤집힐 겁니다.
재우 그룹의 가신들은 전부 손 회장과 같이 확장에 환장하는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30년간 오직 사업 확장만 해온 사람들.
구조조정이네 뭐네 하며 생사를 나눈 동료를 자르기보단 동료와 함께 폭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들 사람들이다.
500억 달러?
SS 그룹이라면 일단 계산기부터 두드리고, GL 그룹이 다시 한 번 전의를 불태운다면, 재우 그룹은 이미 해외로 뛰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고.
너무 앞으로만 뛰어가니 여기저기 불법이 난무해서 문제지만.
그러게 사업을 하면서 주변도 좀 돌아보고 해야지.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가니 사달이 안 나?
이때,
천 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네, 임재준입니다.”
-이슬 그룹 채권단 회의가 내일 열린답니다.
“알겠습니다.”
손 회장이 아쉬운 눈빛을 재준에게 보냈다.
“나가 봐야 하는 거야?”
“아, 네.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 준비 좀 해야겠습니다.”
“임 팀장. 바쁘네. 암튼 이건 내가 살을 붙여서 잘 살려 볼게.”
“네. 그럼.”
재준은 회장실을 나와 경제정책연구실로 향했다.
내일 일에 대해 정리 좀 하자.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