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네~~에? 국가적 파장이요?(4)
큭큭큭큭.
재준이 손으로 입을 막고 웃지만 새어 나오는 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큭큭큭큭.
웃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놈.”
아.
재준은 그제야 웃음을 멈추고 빙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빵 터졌네요. 국가적 파장이라니. 선 회장님, 선동방이 파산하면 회사가 어디로 갑니까? 직원들이 전부 길거리에 나앉습니까? 선동방의 기술이 공중으로 사라집니까? 웃기는 지론을 가지고 계시네요.”
“…….”
“파산은 회장님이 하시는 거지 선동방이 하는 게 아니에요. 선동방은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이전될 뿐이에요. 국가적 파장은 무슨.”
“…….”
“누가 그랬는데. 돈은 항상 그대로이고, 주머니만 바뀔 뿐이라고. 지금 딱 어울리는 말 아니에요?”
선 회장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재준은 웃음기를 얼굴에서 싹 지우고 말했다.
“근데, 선동방 채무가 얼마인지는 아세요?”
“…….”
“뭐야, 자기가 빌린 돈이 얼마인지도 몰라요? 그럼 노 상무는 알아요?”
“…….”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 있던 노 상무가 움찔했다.
“모르는 거야? 자기가 채권단을 협박해서 받은 돈이 얼마인지도 몰라? 그럼, 돈만 받아 처먹은 거야?”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드디어 노 상무가 성난 목소리를 냈다.
재준이 노 상무를 보며 빙글 웃었다.
“노 상무님, 너. 나가세요.”
“뭐?”
“너 나가시라고요. 여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잖아요. 그럼 뭐 하러 여기 있어요? 나가셔야지. 당장 나가세요.”
“임재준.”
선 회장이 결국 일어서며 재준을 노려봤다.
“회장님도 같이 나가시게요? 그럼, 저야 편하고 좋은데. 그럼 얘기는 끝난 거로 알겠습니다.”
후.
재준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자 선 회장은 고개를 들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노 상무. 나가 있게.”
“네? 회장님?”
“나가 있어.”
“네.”
노 상무가 분을 못 이기고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선 회장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 재준에게 말했다.
“현재증권이 원하는 걸 말해보게.”
“그랜드월 연락 안 되시죠.”
“그렇네.”
“뻔한 스토리네요. 선동방이 채무 압박에 시달리자 그랜드월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봐 미리 선을 그었어요.”
“그 정도는 알고 있네.”
“제가 회장님 아는 이야기 또 들려드리려고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고요. 뉴월드에 있는 돈. 아시죠? 그랜드월은 그거 달라고 할까 봐 미리 손절한 것 같은데. 뉴월드에 뭐가 있길래 그랜드월이 선수를 치는 걸까요?”
선 회장은 재준의 말에 다시 먼 곳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미 알고 있는 건가?”
“에이, 설마 그걸 모르겠어요. 한국 기업 중에 해외 비자금 없는 기업이 어디 있다고. 당연히 그럴 거라 예상했죠. 그것도 버젓이 투자사라고 세워뒀던데. 선동방이 해외에 투자할 일이 뭐가 있다고.”
“해외에 투자할 일이 왜…….”
선 회장은 말을 하다말고 재준이 비웃는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소용없는 짓이지.
저놈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원하는 게 뭔가?”
“선동방 해체합니다. 물론 우리가 아니라 채권단이 하는 겁니다. 저희를 욕하진 마세요. 하지만 사업체 하나는 남겨드릴게요. 김 제조업체 있죠? 그거요.”
“나보고 김이나 만들고 살라는 건가?”
“우와, 김을 무시하시네. 김 요즘 핫해요. 우리 집도 매일 반찬으로 김이 나오는데. 절대 망할 일 없는 회사잖아요.”
“그래, 동신사업을 내가 가지면 대가는 무엇인가?”
“뉴월드 49%를 파시죠. 50억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그랜드월과 100억으로 세운 회사니 손해는 아니실 거예요.”
“거기엔…….”
“알아요. 비자금이 있다는 거. 정확히 비자금이 아니죠. 투자금이지. 인도네시아 택시 회사던가요? 2억 6천만 달러에 그랜드월과 50 대 50으로 세우셨죠? 꼬박꼬박 나오는 이익금 연금처럼 사용하시려고.”
“정말 모르는 게 없군. 현재증권의 정보력이 이 정도였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당연히 모르는 게 없지.
당신도 재벌 2세니까.
내가 재벌 2세들의 전횡은 다 알고 있거든.
“50억으로 너무 많은 걸 가져가는 건 아닌가?”
“에이, 설마 우리가 혼자 먹겠습니까? 다 같이 나누어 먹어야죠. 나중에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후.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나?”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다른 방법 있으세요?”
후.
“그게 다인가?”
“네.”
선 회장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생각해 보겠네.”
“그러시죠. 근데 이틀 이상은 못 기다립니다. 설마 뉴월드 지분을 믿고 해외로 떠나실 생각은 마세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돈 출처를 밝혀야 할 테니까요.”
“끝까지 협박이군.”
“뭐,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으세요. 전 이런 걸 합의라고 부르지만요.”
흥.
선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밖으로 향했다.
이때,
“아, 잊은 게 있는데.”
재준의 말에 선 회장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노 상무, 이제 놔 주세요. 노 상무 아버지 17년 선고받습니다. 이제 채권단에게 먹히지 않아요.”
노 전 대통령의 형량도 알고 있다?
“허, 이제 놀랍지도 않군.”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선 회장은 회장실 밖으로 나갔다.
임병달은 이번에도 끝까지 아무 말도 앉고 재준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정보들을 얻는 것일까?
이제 재준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판이다.
아들 임석훈이 가지고 싶어 했던 정보력이었는데.
그렇게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한 경제계와 정계의 정보력을 재준은 완벽히 가졌다.
“할아버지, 손 회장님에게 선동방 작업 착수하라고 알리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내가 아주 편해졌어. 네가 알아서 척척하니. 그래, 이번에 뉴월드 지분은 왜 사려는 것이냐?”
“뉴월드가 효자 노릇을 할 겁니다.”
“아까 들어보니 인도네시아에 택시 회사를 세운 것 같던데, 맞냐? 인도네시아 인구가 1억에 가까운데 택시 회사라니. 그런 알짜 회사를 우리가 관리할 수 있을까?”
“아, 그 회사 파산해요.”
뭐?
그래, 놀라지 말자.
“아니, 그걸 알면서 왜 가져온 것이냐?”
“그랜드월에게 폭탄을 안겨주려고요.”
허, 거참. 그럼 그렇지.
앞으로 폭탄 여기저기 터지겠네.
또 수습이나 해야겠어.
“참, 할아버지. 강호석 팀장 말인데요.”
“강 팀장은 왜?”
“미국에 좀 보내야 하는데.”
“뭐? 미국? 강호석을? 왜?”
재준은 임병달에게 투자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박민수란 놈이랑 묶어서 미국으로 보낸다고?”
“네.”
임병달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호석아! 미안하다.
내 탓은 하지 마라.
“그래. 그렇게 하자.”
“그래서 말인데. 할아버지가 강호석 팀장에게 퇴사 좀 얘기해 주세요.”
허, 그러네. 퇴사를 시켜야 미국으로 가는 거네.
엄연히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 거니까.
“악역을 맡아서 하라는 말이구나.”
“악역은 아니죠. 다 강호석 팀장 좋자고 하는 일인데.”
“서형길 실장한테 맡기면 안 되겠지?”
“당연하죠. 아무도 이 애달픈 사연을 모르는데.”
허, 나 참. 어쩌다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
다음 날.
역시나 퇴근 시간에 맞춰 재준의 전화벨이 울렸다.
“네. 강 선배.”
-소주나 한잔하자.
드디어 할아버지가 말씀하셨구나.
강호석을 잘랐어.
“어디로 갈까요?”
-
“네? 벌써 두 병째라고요? 기다리세요. 금방 갑니다.”
재준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오자 천 실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마포 껍데기 집으로 가요.”
“…….”
흠.
천 실장은 너무 의외의 장소가 재준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었다.
종횡무진이시구나.
이제 하다 하다 껍데기 집까지.
잠시 후, 껍데기 집에 도착한 재준은 차에서 내려서 달렸다.
껍데기 집 한구석에 홀로 외로이 쓸쓸히 청승맞게 자작을 하는 강호석이 보였다.
“선배.”
재준이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드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재준을 바라봤다.
저 표정은 뭐야?
“어, 재준아.”
“아유, 갑자기 왜 그래요?”
“살기 싫어서.”
아니, 할아버지는 어떻게 말을 했길래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회장님이 회사에 나오지 말래.”
그게 아니지.
투자사 이야긴 안 하신 거야?
“정말이요? 다른 말씀은 없었어요?”
“그냥 좋은 자리 알아봐 줄 테니 당분간 집에 있으라고…….”
흑흑.
헉! 이거 큰일인데.
하긴 회장 직위에 모든 걸 자세히 얘기하는 것도 우습지.
흑흑.
그렇다고 울면 어떡해요?
“흑, 나 열심히 산 거 너도 알지. 내가 지각을 좀 많이 해도 그게 다 미국 아침 뉴스 보고 오려고 그런 거잖아.”
“그거야 회장님도 아시잖아요.”
“그러게, 그리고 내가 실적이 그렇게 안 좋은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중간 이상은 항상 했는데.”
“그것도 회장님이 용인하신 부분이잖아요.”
“그러네. 근데 왜 날 내치시는 거지…… 흑.”
이거 점점 우울증으로 변하네.
“선배, 다른 자리 알아봐 준다면서요?”
“그걸 믿어? 그걸 믿냐고? 다 그렇게 말하고 자르는 거지. 회장님이 이러실 줄 몰랐어.”
“아니, 생각해 봐요. 정말 선배를 자르려고 생각했으면 서형길 실장을 시키지 왜 회장님이 직접 이야기해요.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닌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네가 회장님의 눈빛을 못 봐서 그래. 분명 쓸모없는 놈을 쳐다보는 눈빛이었어.”
환장하겠네.
“난 버림받았어.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보기 좋게 차인 것 같아. 빌어먹을.”
“아니, 서태지 노래는 왜 불러요?”
“그냥 이 노래가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말리지 마.”
“가만, 진정하고. 우선 술이나 한잔 주세요.”
자.
강호석은 술병을 들어 재준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채우더니 건배도 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크…….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서태지의 ‘필승’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충격 요법을 써야겠어.
이대로는 뭔 일을 저지르고 말지.
역시, 강호석이 별안간 일어섰다.
“회장님한테 다시 가봐야 해. 왜 나를 버리시는지 꼭 들어야겠어.”
“가만, 가만. 선배. 가만. 웨이러 모멘트.”
재준의 강호석을 잡아 자리에 다시 앉혔다.
“자, 내가 온 지 5분도 안 됐어요. 제 얘기를 들어봐요.”
재준은 말을 하려다 말고 핸드폰을 꺼냈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좋은 생각?”
“그래요. 잠시만.”
재준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임재준입니다.”
-
“여기 마포 껍데기 집인데. 아시죠?”
-
“얼마나 걸려요?”
-
“오케이. 총알택시 타고 날아와요.”
강호석은 재준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군데, 여길 부르는 거야?”
“선배를 이해시켜 줄 사람.”
“날 왜 이해시켜. 내가 뭘 오해했다고?”
“회장님을 오해하고 계시잖아요.”
“내가 회장님을? 근데 그걸 풀어줄 사람이 온다고?”
“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선배님 파트너라는 거.”
내 파트너??
강호석은 재준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