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네~~에? 국가적 파장이요?(3)
이슬 그룹은 소주 판매로 인해 결코 돈이 마를 일이 없었다.
한국 사람이 소주를 안 마시면 모를까.
미국 사람이 햄버거를 안 먹는 게 더 현실적이지.
1988년부터 회장에 취임한 정 회장은 8년 만에 계열사를 24개나 늘리며 재계 19위로 등극했다.
소주나 마시고 취할 것이지 소주 팔아 번 돈에 취해버렸다.
광고회사, 주류종합유통, 백화점, 영국 그랜트와 합작한 위스키회사, 수출입 전문회사는 이해할 만했다.
근데 제약, 홈비디오 사업, 건설에, 해외 20억 달러 규모의 종합빌딩타워 건설? 이건 너무 나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업을 왜 했을까? 뭐, 다 욕심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미친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괜히 시작한 사업이 눈엣가시 같았겠지.
소주 팔아 번 돈을 적자투성이 계열사에 끝도 없이 수혈하려니 짜증도 났을 거다.
한 번에 터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돈이 안 되는 사업을 접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게 뻔하고.
바로 흑자 부도를 내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엄청난 규모의 대출 갚기를 미루거나 없애려는 속셈이었다.
해결사로서 그랜드월을 컨설팅 업체로 선정하고, 그랜드월의 자문에 따라 적자 기업을 다른 기업에 떠넘기든가, 아예 폐업해버려 대출을 날리려는 계획.
여기까지는 재준도 이해는 했다.
기업을 하다 보면 안 되는 사업은 접어야지 물고 늘어질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꼼수를 부리려다 그랜드월에게 된통 당해서 횡령으로 고소되고 이슬 그룹 날리고 장 회장은 캄보디아로 도망쳐버렸다.
그래, 여기까지도 괜찮다.
이슬 그룹 지분도 다 내놓았으니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
사업가가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겠다는데 오히려 박수를 쳐 주는 게 맞지.
그런데 캄보디아에 정 회장 소유의 은행이 있었다?
그뿐인가.
부동산 개발회사, 경견장, 카지노, 단란 주점?
그리고 싱가포르, 중국에 사업체가 다수 있고.
도대체 해외로 얼마나 빼돌렸으면 이슬 그룹만 한 기업이 해외에 존재할까?
대단하다. 대단해.
아니, 뭐, 이것도 정 회장 능력이니 그럴 수 있지.
내가 정 회장을 단죄하는 것도 우습고.
하지만,
왜 그랜드월이냐고.
가뜩이나 어떻게 하면 현재증권 뒤통수를 칠까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놈들인데.
이슬 그룹은 그랜드월과 엮인 게 죄라면 죄다.
어쩔 수 없잖아.
그랜드월이 싸움을 걸어오는데 가만히 당할 수는 없지.
이놈들 지금 외환위기 중이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웃긴 건, 그랜드월은 2013년에 한국에서 철수한다.
이유가 뭐냐면 한국이 건실해져서.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서였다.
설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승하야, 최대한 더 모아.”
박승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한 달 후.
이슬 그룹 회의실.
그랜드월 앤드류 팀장과 벤자민 변호사가 이슬 그룹 정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이슬 그룹은 그랜드월에게 컨설팅을 요청했다.
오늘은 이슬 그룹의 경영 컨설팅 계약 전 첫 미팅.
앤드류가 시계를 보자 벤자민이 말했다.
“아직 5분 남았습니다.”
앤드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이슬 그룹에 대한 대략적인 조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회생 가능성은?”
“양호한 편입니다. 부채가 많기는 하지만 주류와 유통 외 자동차부품회사는 살리고 나머지를 처분하면 충분히 회생 가능합니다만…….”
“벤자민, 확신이 없군요.”
“애매합니다. 한국은 아직 국제 회계 기준을 준수하지 않아 회계가 투명하지 않습니다. 내부 거래부터 현금의 흐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래요…….”
앤드류는 한국이 급성장한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한국행을 자원했다.
너무 허술한 금융체계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먹잇감이 널렸다고 판단했다.
적대적 M&A로 시작하는 건 괜찮았다.
한국에 처음 벌어지는 일이라 모두 당황했고 승리를 목전에 두었었다.
의외의 복병에게 크게 한 방 먹었지만.
현재증권이 끼어들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임재준이라고 했지.
TH제과라…….
앤드류는 문 쪽을 한 번 보고 인기척이 없자, 벤자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TH제과는 조사해 보았습니까?”
“네, TH제과는 건실한데, 이번에 TH유업이 부도가 날것이라는 루머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TH제과와 TH유업은 같은 그룹입니까?”
“아니라고 TH제과는 선을 긋고 있지만, 내부 거래는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럼 TH유업의 문제가 곧 TH제과의 문제도 된단 소리군요.”
“네, TH제과에 문제가 생기면 TH 그룹 전체로 번져 나갈 겁니다.”
“그래요? 대한 그룹도, 선동방 그룹도, 이슬 그룹도, TH 그룹까지 모태 기업 하나 흔들리면 그룹이 전체가 흔들리는군요.”
“그래서 누군가 TH유업을 건드려 TH제과를 흔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라…….
앤드류는 재준의 싱글거리는 미소를 떠올렸다.
네놈 작품인가?
“루머의 출처는 공식 업체입니까 아니면 뜬소문입니까?”
“사설 투자자문업체 몇 군데와 한국증권방송입니다.”
“한 군데가 아니란 말이네요.”
“네. TH 그룹은 루머 유포자들을 고발한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주가는요?”
“그룹 전체가 크게 하락 중입니다.”
“그룹 전체가 단지 루머 때문에 하락을 한다……. 뭔가 석연치 않군요.”
“그리고 현재증권은 TH 그룹 주식을 전혀 매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혀?”
“네.”
언론을 이용해서 주가를 떨어뜨리고 주식을 매집한다?
이건 전에 말했던 부실채권으로 돈을 벌겠다는 임재준의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릴 이용하려는 건가?
그랜드월이 TH제과의 부실채권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현재증권은 주식을 매집한다?
후에 그랜드월이 TH제과에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현재증권이 대주주로 나타난다?
TH제과에 자금을 투입하고 사업을 정상화시키면 그랜드월은 또 뒤통수를 맞는 시나리오인가?
하하하.
“왜 그러십니까?”
벤자민이 앤드류의 갑작스런 웃음에 신경이 곤두섰다.
“벤자민, TH제과 매출 규모는 얼마지요?”
“6천억 정도입니다.”
“대출은요?”
“3조 2천억 원 규모입니다.”
“임재준이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TH제과를 손에 넣으면 TH 그룹 전체를 손에 넣게 됩니다. 주식이든 채권이든 둘 중 하나를 손에 넣고 쥐고 흔들려는 속셈 같습니다.”
“우린 채권을 사고 현재증권은 주식을 산다……. 그럼 우리가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희는 TH제과가 매각될 때 이익만 취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매각 예상 금액은요?”
“1조 정도입니다.”
“어디가 유력합니까?”
“유니레브, 해쉬, 네슬라입니다.”
임재준, 무슨 속셈이냐…….
협의하자 해놓고 먼저 움직이는 저의가 무엇이냐…….
“벤자민, 일단 부실채권을 매입하세요.”
“그렇게 하면 현재증권과 또 붙을 수 있습니다.”
“이번엔 서로 다른 종목이라 손해는 입지 않아요. 우린 채권을 쥐고 시간을 끌면 됩니다. 채권은 주식과 다르게 가격이 떨어지진 않잖아요.”
“그럼…….”
“맞아요. 주식을 무기로 쓴다면 가격을 흔들어 쓸모없게 만들면 됩니다.”
앤드류와 벤자민이 TH제과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순간.
“죄송합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급한 일 때문에.”
이슬 그룹 정 회장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앤드류의 눈에 정 회장의 허세가 훤히 보였다.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이 지났다.
‘회장이라 이건가. 한국이란 나라 참.’
***
“임 회장.”
재준과 임병달이 동시에 소리가 들리는 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루라도 편한 날이 없구나.”
“그러게요.”
똑똑.
“선동방의 선…….”
“들어오시라고 해.”
임병달은 비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말했다.
선동방의 선정수 회장.
현재 손 회장이 채권단을 앞세워 목줄을 죄는 상황에서 그랜드월과도 연락이 끊기자 득달같이 현재증권으로 달려왔다.
“임 회장. 도대체 일을 어디까지 벌일 작정이요?”
마른 외모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회장실에 울렸다.
선 회장 뒤로 전 대통령의 장남인 노 상무가 따랐다.
임병달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 회장님. 일단 앉으세요.”
끙.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자 노 상무가 따라 앉으려 했다.
재준이 노 상무를 보며 빙글 웃었다.
“노 상무는 왜 앉아요?”
뭐?
노 상무가 주춤거리며 서 있자 선 회장은 재준을 노려봤다.
“뭐라고 한 거냐?”
“저 사람이 왜 여기 앉냐고요?”
“저 사람은…….”
“알아요. 노기현이라고 전 대통령 장남이잖아요. 근데 실무진도 아니면서 왜 여기에 왔어요? 저 사람은 홍보를 맡고 있지 않나요?”
선 회장은 임병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노기를 폭발했다.
“임 회장.”
쯧쯧.
재준이 혀를 차며 비웃었다.
“거, 나이도 있으신데 아무에게나 하대하시네. 저희 회장님께서 존칭을 해주면 받아주는 게 예의예요. 제가 선 회장님에게 선 회장이라고 하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또 놈이네. 얘기하기 싫으시면 그냥 가세요. 지금 우리가 아쉬운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나이가 벼슬도 아니고 개나 소나 다 놈이라고 그러네. 그러다 박 회장님 훅 간 거 모르세요?”
개나 소나!
선 회장은 눈을 질끈 감더니 천천히 뜨자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머리에서 열이 치밀어 올라 손도 잘게 떨었다.
“네놈이로구나.”
“거참 선 회장님 말귀 못 알아들으시네. 놈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그래, 뭐 됐고. 용건만 말씀하세요.”
선 회장은 임병달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임 회장. 둘이 할 얘기이니 다 내보냅시다.”
임병달이 귀찮다는 듯이 박 회장 때와 마찬가지로 등을 소파에 기댔다.
“그냥 얘기하세요. 재준이가 실무를 도맡고 있습니다.”
선 회장이 임병달의 말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으, 머리야.
선 회장은 임병달을 노려보고 재준에게 시선을 주었다.
“임재준, 네가 임석훈의 아들이로구나.”
“호구 조사하러 오셨어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냥 가시라니까요.”
끙.
선 회장은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좋아. 현재증권이 그랜드월과 손잡았다는데 무슨 말이지?”
“네? 누가 그래요? 어떤 미친놈이 외국 놈이랑 우리가 손잡았다고 떠들고 다니는데요. 거참, 소문도 빠르네. 그랜드월도 믿을 게 못 되는구나.”
근데 왜 소문이 그렇게 났지?
일단 손을 잡은 척은 해야지.
“설명을 들어야겠다.”
“그걸 왜 우리한테 들어요? 그랜드월에게 가서 따져야지.”
후.
얼마 전만 해도 자신의 앞에서 고개도 못 들었을 현재증권인데.
이번만 넘기자.
선 회장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재준에게 말했다.
“좋아. 우리가 여기서 따질 일은 아니지.”
“맞아요. 손절한 놈이 나쁜 놈이지. 우리랑은 전혀 상관없어요.”
“그럼, 손 회장이 채권단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어. 알아보니 현재증권이 뒤에서 사주했다는데. 왜 그런 거냐?”
“네? 손 회장님이 채권단을 움직였다고요?”
“흥, 모르는 척하기는.”
“그래서요? 그럼 안 되는 건가요?”
“뭐? 선동방이 무너지면 국가에 얼마나 큰 파장이 일어나는 줄 알고 저지른 짓이냐?”
“네~~에? 국가적 파장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