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네~~에? 국가적 파장이요?(2)
재준은 광교에 있는 조화은행 본점으로 들어섰다.
우연히 마주치는 걸 연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놈들이 나올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미국인 두 명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왔다.
천 실장이 재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왼쪽은 그랜드월 VP 스티븐 앤드류, 오른쪽이 국제 변호사 카를로스 벤자민입니다.”
VP면 Vice President.
나라가 아니라 지역, 동아시아. 서유럽, 정도를 총괄하는 위치다.
저 정도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렇다고 상대하기 어려운 건 아니다.
어차피 협상은 두 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당근 다음 채찍이냐 아니면 채찍 다음 당근이냐.
협상에서 이 순서가 의외로 중요하다.
당근만 들고 오든가 채찍만 들고 오는 놈들은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거고.
그럼, 오늘은 당근이 먼저냐 채찍이 먼저냐.
딱 봐도 오늘은 채찍을 먼저 들어야 한다.
체급이 같을 때는 당근이 먼저겠지만 지금처럼 상대가 월등히 강한 위치에 있다면 채찍을 들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특히 현재증권 같은 아래 체급에게 한 방 먹은 상태라면 더욱더.
재준이 똑바로 서서 앤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살기를 뿜어대고 있자 앤드류는 힐끔거리며 고개를 갸웃하고는 스쳐 지나갔다.
재준이 앤드류의 뒤통수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헤이, 앤드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앤드류가 뒤를 돌아보았다.
위아래로 천천히 재준을 흩어보더니 기억을 더듬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이내 고개를 흔들며,
“나를 압니까? 나는 당신을 처음 보는데.”
처음 보겠지, 나도 처음 보니까.
“나 현재증권의 미스터 임인데. 들어본 적 있지?”
“미스터 임?”
벤자민이 옆에서 뭐라 속닥이자 앤드류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재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웃어? 역시 능구렁이야.
“반갑습니다. 미스터 임. 스티븐 앤드류입니다.”
아무리 적이라도 악수는 해야지.
재준이 손을 내밀어 앤드류의 손을 잡자마자 끌어당기며 앤드류의 얼굴에 대고 화가 난 듯 속삭였다.
“난 반갑지 않은데.”
앤드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떨어지며 말했다.
“사실 내가 더 화가 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쪽이 우리 사업에 끼어들어 우리가 손해를 입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허. 이놈이 먼저 채찍을 휘두르네.
재준은 ‘그건 아니야’라는 듯 손과 고개를 동시에 흔들었다.
“내가 먼저 작업 치는 중이었어. 끼어든 건 그랜드월이고. 손해도 당연한 거고.”
“오우. 리얼리? 우린 전혀 몰랐는데요. 우리 분석팀이 그런 낌새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알 리가 없지. 아주 신중히 진행했으니까. 티도 안 나게 조심스러웠지. 우린 프로거든. 근데 그랜드월이 아주 개판으로 만들어서 내 정체가 드러나 버렸어. 이건 어떻게 보상할 수 있어?”
일단 상대를 나쁜 놈으로 만든다.
미안한 생각은 1도 없을 테지만.
“그랬군요. 우리도 손해가 큽니다.”
“무슨 손해? 이익이 없다고 손해라는 건가?”
“우리 직업이 인건비가 비싼 건 아실 테니. 긴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서로 지난 일로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도 없고요.”
“지난 일은 잊자?”
“우린 이미 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안 사줘도 되는 거네.”
다음으로 대화할 의지를 보인다.
“리얼리? 얼마에?”
“딱 들어간 만큼만. 이대로 시간을 끌면 보유 중인 미레도홀딩스 주식은 버리는 데에도 돈이 들어갈 거야, 안 그래?”
“흠.”
앤드류가 재준을 향해 아주 재밌는 상대를 만났다는 듯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야, 너 왜 이상하게 웃어.
저놈, 이상한 취미 있는 거 아냐?
“손해를 감수할 생각이었는데, 구미가 당기긴 하는군요.”
“그렇지? 원금은 건져야지.”
“조건이 있을 텐데요. 굳이 손해를 만회해 주려고 여기까지 온 것 같지는 않고.”
“당연히. 조건이 있지.”
“얘기해 주시죠. 최대한 맞추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한차례 채찍을 날린다.
“그전에 사과부터 해야지. 잊기로 했다면서 왜 남의 회사 뒤나 캐고 다니는 거야. 그거 아주 안 좋은 버릇이야.”
“흠. 그걸 그렇게 생각했군요. 우린 항상 투자관점에서 움직입니다.”
“정말? 복수하려는 건 아니고?”
저놈 또 이상한 미소 짓는다.
“아직 매수한 적은 없으니 사과할 일도 없지 않을까요?”
“매수한 적이 없다?”
“맞아요. 의외로 현재증권의 부실채권이 많지 않아서 흥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과를 안 하겠다?”
의도적으로 목소리 톤을 한층 낮춰서 물었다.
표정을 지우고 가라앉은 눈으로 놈을 응시했다.
“아, 경솔했던 건 사과합니다. 우리도 현재증권으로 인해 본 피해가 적지 않아서 말이지요.”
“사과는 받지.”
재준이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조건을 맞추어 볼까?”
“어떤 조건입니까?”
딱!
재준이 손가락을 튕기며 앤드류 앞으로 다가가며 속삭였다.
“부실채권으로 돈 벌 업체 몇 군데 알고 있는데.”
What?
앤드류의 미간이 구겨졌다.
“뭘 놀래? 이제 코리아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 거 알고 온 거 아냐? 그중에서 돈 될 만한 기업에 투자하려고. 근데 초반에 파트너를 잘못 선택했어. 선동방이 뭐야? 선동방이. 한 나라의 유통을 다 먹겠다는 놈이 미친놈 아닌가?”
푸훗.
앤드류가 재준의 말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미스터 임. 위트가 있군요. 이런 유쾌한 분인지 몰랐습니다.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실력은 좋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제 말에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합니다.”
“괜찮아. 이렇게 서로 알아봤으면 됐지. 오히려 전초전으로 서로의 실력을 알게 되었으니 나름 괜찮았어.”
“성격도 호탕하군요.”
“모든 건 돈 아니겠어? 돈만 되면 무엇이든지 해야지.”
“좋습니다. 같이 한번 일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군요.”
“좋아. 일단 서로 합을 맞추기 전에. TH제과라고 있는데 그거 먼저 알아보고 만나자고. 같이 판을 짜기 좋은 기업인지 아닌지.”
“TH제과?”
“지금 휘청이지만 절대 망하지는 않는 기업이니까. 지금 잘 다듬어서 나중에 팔면 좋은 기업이야.”
앤드류는 벤자민에게 뭔가 속삭이더니 재준을 봤다.
“음. 좋습니다. 우리가 연락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그래, 덥석 물면 이빨 다 빠지는 놈으로 골랐다.
분식회계로 범벅이 되어있으니 그냥 보기엔 아주 좋은 기업일 거다.
부실채권도 많고.
이번 기회에 TH제과에서 일본 가비 기업의 색도 확 빼고.
“다음엔 술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고.”
“좋습니다.”
그럼. 이만.
재준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앤드류가 악수를 하고 뒤돌아서는데 벤자민이 다시 뭐라고 속삭였다.
뭔지 모르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졌다.
변호사니까 당연히 의심하겠지.
열심히 의심해라.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게 될 테니까.
근데 저놈들 뉴월드 지분이 나에게 넘어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하네.
자, 이걸로 이슬 그룹에 관한 저들의 관심을 잠시 보류해 놨으니 이 틈에 이슬 그룹 부실채권을 매집해 볼까.
“도련님. 저놈들 만만한 놈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천 실장이 의외로 재준에게 경고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필요하면 사람도 죽이는 놈들입니다.”
그렇긴 하지.
“알아요, 정확히는 일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범죄도 저지르는 겁니다. 지난 일에 대해선 미련을 두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준비는 하겠습니다.”
“네. 그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천 실장은 이번엔 뭔가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저, 도련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음……. 이해가 안 돼서 그럽니다.”
“뭐가요?”
“도련님답지 않습니다. 그랜드월의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제값 다 주고 사신다는 것 말입니다.”
천 실장은 재준이 순순히 그랜드월의 손실을 보전해 주려는 게 영 찜찜했다.
미레도홀딩스 주가는 매일매일 끝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랜드월의 최소 1,000억 손실은 당연했다.
그런데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하다니.
세계적인 투자은행에 약간은 겁을 먹은 듯한 양보였다.
하지만 재준은 천 실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값이요?”
“네. 저는 들어간 돈을 다 보전해 주신다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만.”
“맞아요. 제값이 아니라 들어간 돈.”
“그랜드월이 사용한 자금은 1,000억 이상입니다.”
“정말이요?”
“제 정보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근데 증거가 없잖아요. 미레도홀딩스를 얼마에 샀다는 증거.”
“증거라면.”
“네. 증거를 가지고 와야 손실을 보전해 주든 말든 하지요.”
“거래 내역은 그랜드월증권 한국 지사에 있지 않습니까?”
“설마요? 그랜드월증권은 직원이 다 해서 26명이에요. 거기에 펀드 매니저가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이름만 있지 실제 운영을 하지 않아요.”
“그럼?”
“네. 국내 증권사 여러 곳에 위탁해서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매집했을 거예요. 1,000억이 넘는 돈이니까 최소한 네다섯 군데는 되겠네요. 전산인 경우도 있지만, 수기로 매매한 것도 있을 테니 꽤 시간이 걸리겠죠? 그리고 나중엔 그럴 여유조차 없을 겁니다.”
“…….”
큭큭큭큭.
천 실장은 재준의 웃음에서 자신이 괜한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그렇지. 아예 줄 생각이 없으시군요.
***
박승하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 따로 없었다.
자산관리공사에 자료가 있기는 했지만, 국내 은행들을 다 돌아다니며 가격을 협상해야 하니 현재 팀에서 가장 바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때?”
재준은 박승하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후후. 나 재미 들린 거 알아? 완전 내 체질이야.”
“그래? 뭐가 재밌는데?”
“돈질. 뭐 내 돈은 아니지만 시원시원하다.”
헉! 이놈이 재벌이네. 재벌이야.
“자, 여기.”
박승하는 지금까지 사들인 이슬 그룹의 부실채권을 정리한 서류를 재준에게 보여줬다.
3,000억이 넘는 금액이었다.
박승하도 대단하네.
3,000억을 집행하면 보통 사람 같으면 심장이 오그라들 텐데.
재준은 박승하가 사들인 부실채권을 보며 빙글 웃었다.
이 채권은 원래는 그랜드월이 사들였어야 할 채권이다.
이슬 그룹은 1997년 4월에 갑작스럽게 부도를 냈다.
그리고 그랜드월에 기업 컨설팅 자문을 맡긴다.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한 그랜드월이 비밀리에 이슬 그룹의 부실채권을 사 모아서 법정관리를 신청해 버린다.
그러고는 최대 채권자의 자리에서 이슬 그룹을 해체하고 부실채권의 열 배에 해당하는 3조 원을 챙겼다.
아, 여기에도 만선증권 같은 코리아전선이라는 고춧가루 기업이 있기는 했다.
재준이 주목한 것은 1997년 4월 부도였다.
이슬 소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럼에도 이슬 그룹이 부도가 났다는 건.
이슬 그룹 정 회장의 고의 부도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