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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49화 (49/477)

제49화 할아버지, 쌍욕이 메아리치는 게 들리십니까(2)

김혜림의 눈이 더 커졌다.

“맞보증?”

“맞아. 서로 맞보증으로 은행에서 천만 원씩 빌리는 거지. 우리가 대한민국 제일의 증권사 직원이잖아. 은행에서 쉽게 대출받을 수 있을 거야.”

헉.

맞보증?

서로 연대보증을 서자는 거니?

연대보증은 2019년부터 전 금융권에서 사라졌다.

죄 없는 사람들을 이중 삼중으로 엮어서 빚의 굴레로 떨어뜨린 그 중세적인 발상.

일단 빌려주고 쥐어짜는 영주와 농노처럼.

맞보증이야 말로 은행의 행정 편의적인 사고이며 끝까지 악랄하게 돈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사채업자와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갚을 능력이 없는 개인과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것 자체가 고객을 호갱으로 보는 시각이지.

빌려주지 말든가. 아니면 당사자만으로 끝내든가.

왜 빌려주면 안 되는 사람에게 보증까지 세우며 돈을 빌려주냐고?

뻔하지, 실적을 올려야 하니까.

보증은 1997년 IMF 때나 2002년 카드 대란 같은 국가적 대란이 일어날 때마다 수백만 명의 국민이 평생 짊어지고 갈 가난의 굴레를 만듦으로써 그 무서움을 증명했다.

박승하.

너 보증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월급쟁이가 천만 원 갚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데.

거기다, 1997년은 채권자들이 무력을 남발하는 시대잖아.

자발적으로 그 구렁텅이로 들어가려고?

그런데 김혜림, 너는 왜 좋아하니?

김혜림이 안도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 되겠네.”

너 미쳤니?

가만, 이 시대 대출 금리가 어느 정도지?

장난이 아닐 텐데.

“은행이자가 얼만데?”

“15%.”

“뭐?”

왓 더 퍽!

자칫 김혜림의 얼굴에 주먹을 욱여넣을 뻔했다.

갑자기 열이 확 올라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예탁자산.

만약 회사가 팀별로 예탁금 1억 원을 지정해 주면 팀원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예탁자산을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힘들게 모은 적금이나 부모님, 친척들, 심지어 얼굴만 알고 지낸 지인들에게 빌려서라도 1억을 만들어 오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진급에서 밀리고 실적에서 밀려 결국 도태되고 말았다.

재준의 팀원들이 서로 맞보증을 서서 은행 대출로 예탁자산을 충당하려 하는 이유였다.

예탁자산-빚-맞보증-빚.

거미줄처럼 얽힌 빚.

자신은 갚았어도 보증 서준 상대가 안 갚으면 덤탱이 쓰는 빚.

현시점의 15%나 되는 은행이자를 감수하고서 예탁자산을 만들어야만 하는 사원들.

이건 뭐 회사가 빌런이네.

누가 이런 공문을 내린 거지?

좋아, 우선 그놈부터.

근데 그놈이 할아버지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무조건 막아야지.

재준은 주먹을 꽉 쥐고 일어섰다.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사무보조원과 김혜림, 박승하가 재준을 쳐다보았다.

“이건 아니야, 예탁자산이 회사의 방침이긴 하지만 맞보증은 안 돼.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재준아, 왜 그래? 좋은 방법인데.”

“우리나라 사람들 인정 많네. 부모님이나 친인척에게 손을 벌리면 아마 뿌리치지 못하겠지. 하지만 보증으로 부모님, 친척, 가까운 지인들이 파산하면, 그땐 어쩌려고?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보증을 부탁받으면? 대체 어쩔 셈이야, 이 답 없는 인간들아.”

재준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절대 안 돼. 하지 마. 용납할 수 없어. 자칫 잘못하면 평생 빚쟁이에서 못 벗어나. 보증은 안 돼. 안 돼.”

사무실 동료들은 재준의 반응에 많이 의외라는 시선을 보냈다.

‘재준아, 뭐, 이게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이야?’

모두 재준의 발악에 뭔가 자신들이 큰 잘못을 한 건지 생각해 보았다.

“아니, 그게, 돈이 없는 사람은 이 방법이 제일 낫다니까.”

짝.

재준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니야, 내가 회장님께 건의하겠어. 예탁자산 폐지.”

뭐?

진짜?

정말?

예탁자산 폐지?

모두 재준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사무보조원만은 간절한 믿음을 담아 눈을 반짝였다.

재준은 다시 한 번 주먹을 불끈 쥐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폐지하라. 폐지하라. 예탁자산 폐지하라.

***

일주일 후.

퇴근 준비로 바쁜 와중에 사무보조원이 연구실로 뛰어왔다.

“뉴스 보셨어요?”

깜짝 놀란 김혜림이 물었다.

“무슨 뉴스요?”

사무보조원이 뉴스를 서둘러 틀었다.

그 화면엔 임병달 회장이 성공한 CEO의 모습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어! 회장님이잖아.

“저희 현재증권은 그동안 행했던 관습인 자산 예탁금 제도를 올해부터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임병달의 말에 아나운서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정말 대단한 결심을 하셨는데요. 그럼 이제부터 현재증권 직원들은 두 다리 뻗고 푹 잠을 자도 되겠군요. 현재증권이 앞장서면 다른 증권사에도 여파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파가 없을 수 없다.

다른 증권사는 자산 예탁금으로 일 년의 첫 달을 여유롭게 준비했었는데.

현재증권은 단단히 미운털이 박히게 생겼다.

“그렇겠지요. 그동안 대한민국은 힘든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산 예탁금은 그 길에서 회사가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OECD에 가입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고,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부담을 주는 제도는 적폐라고 봐야지요.”

할아버지, 쌍욕이 메아리치는 게 들리십니까.

적폐라니요.

저는 그런 말씀 하시라고 한 적 없어요.

“직원의 예탁자산이 없어진다면 현재증권에 인재들이 몰리겠는데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현재증권에 인재가 온다면 저희는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입니다.”

뭐지? 마지막까지 망한 느낌은.

현재증권으로 인재가 몰리는 게 아니라 아무도 지원 안 할 것 같은 느낌 아닌 느낌.

그렇잖은가.

전교 1등인데도 서울대를 지원하기 망설이는 그런 기분.

현재증권엔 인재가 몰리니까, 자신은 다른 곳을 응시해야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어째 무식하고 용기 있는 놈들만 지원할 것 같은데.

뉴스를 보던 사무보조원은 재준을 바라보았다.

김혜림도 재준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재준을 바라보았다.

“회장님이 직접 저렇게 말한 거면 혹시 재준 씨가?”

그녀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재준은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어서 먼저 퇴근들 하라고.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그들 때문에 온몸이 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짝짝짝짝.

“팀장님, 정말 멋져요.”

사무보조원이 박수와 함께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와…!!! 재준아.”

“어떻게 회장님께 직접 말을 다 했어.”

“이제 대출 안 받아도 되는 거네.”

“맞보증도 안 서도 되고.”

“이거 오늘도 한잔해야겠는데.”

“당연하지. 오늘 술값에서 재준은 열외.”

“그래, 넌 오늘 먹기만 해.”

하하하.

술값 열외라.

식당을 살 만큼 돈이 있는데, 열외란다.

할아버지에게 자산 예탁금을 없애 달라고 요청하긴 했지만,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실 줄은 몰랐다.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창업주의 애정을 드러내면서.

결과적으로 잘 되긴 했다.

***

다음 날.

경제정책연구실.

[전날 844.9원인 환율이 오늘 843.4원으로 마감]

재준이 신문 경제면을 펼쳐서 동기들에게 보여 주었다.

“자, 이게 뭘 나타내는지 알겠어?”

“환율 시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재준은 어제 마감된 환율을 손가락을 툭툭 건드렸다.

“올라야 할 환율이 내린 게 문제야. 당국의 개입이 심해.”

“왜? 달러가 오르면 당국이 개입해서 환율이 낮추는 거 아닌가? 이게 문제가 되나?”

“물론이지.”

“자세히 좀 말해봐.”

자, 봐!

재준은 어제 하루 환율의 그래프를 모니터에 띄웠다.

“어제 844.9원으로 마감한 환율이 개장 시작하니 840.4원이야. 시초가에서 무려 5원을 떨어뜨렸어.”

재준의 말에 최진기가 바로 대답했다.

“그야 달러 강세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당국의 의지 아니겠어?”

“이건 의지가 아니야. 무지한 거지. 환율을 5원이나 떨어뜨리면 헤지펀드들이 한국에 모여든다고.”

“그들이 왜?”

박승하가 아! 하며 안색이 달라졌다.

“설마… 한국 정부가 던지는 달러를 사려고…….”

“맞아. 1992년 영란은행 공격당한 건 알아?”

“조지 소로스.”

김혜림이 아는 이름을 들먹였다.

“그래, 어느 국가든 환율을 방어하는 낌새만 풍겨도 지금 동남아에 머물고 있는 헤지펀드 자금이 몰릴 수 있어. 아니, 동남아뿐 아니라 세계를 떠도는 돈들이 몰려들 거야.”

정부의 환율 개입은 당연한 일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은 환율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 정부의 방어는 소극적 방어에 그쳐야 한다.

내려가면 좀 더 천천히 내려가게, 올라가면 좀 더 천천히 올라가게 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대비하니까.

그런데 5원을 개장 전에 강제로 내렸다?

5원을 내리기 위해 달러를 시장에 던진 것이다.

얼마나 던졌을까?

최소한 억 단위다.

달러로.

정부가 돈 냄새를 풍겼다.

이제 냄새를 맡고 놈들이 몰려올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혜림.

오랜만에 자신이 잘 아는 분야라 언성을 높였다.

“정부와 헤지펀드는 자금 면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아. 헤지펀드는 한두 개만 몰려다니는 게 아니야. 최소한 수백 개, 수천 개가 몰려든다고.”

조지 소로스가 영란은행을 공격할 때도 미국의 헤지펀드뿐만 아니라 유럽 내에 있는 수천 개의 헤지펀드가 몰려들며 공격에 합세했다.

조지 소로스가 이길 거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관망하던 하이에나들이 떼로 덤벼들었다.

심지어 영국의 헤지펀드도 가세했다.

돈이 된다면 자신의 나라도 물어뜯는 곳이 헤지펀드다.

물론 헤지펀드에 의해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었다는 것은 너무 나간 해석이다.

하지만 최소한 다리 한쪽은 물린 게 맞다.

미국, 일본이 그때 딴청을 피운 것도 맞고.

이 모든 게 맞물려 외환위기가 온 것이다.

이무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럼, 당국의 개입이 과한 것이 아니라, 이건 무지한 거네.”

이무열의 말에 재준이 답했다.

“5원을 강제로 내려서 시작했지만, 종가를 봐. 결국 올랐어. 1.5원 하락으로 끝났잖아. 그만큼 달러 매수세가 크다는 증거야.”

“던지는 족족 받아먹는다?”

이무열이 고개를 저었다.

“헤지펀드, 정부가 상대할 수 없는 놈들이란 말야?”

“우리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거 아닐까? 정부잖아. 무슨 생각이 있지 않을까?”

김혜림이 뭔가 해볼 게 없다는 걸 알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심각한 표정의 재준이 최진기를 돌아봤다.

“진기야, 현재 한국이 보유한 외환액 알아보고, 당국이 개입할 때 사용한 외환액이 얼마인지 확인해. 그럼 정부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추측할 수 있을 거야.”

“재준아, 만약 네 예측이 맞는다면 그다음은…….”

당연히 맞지.

이미 한 번 벌어졌던 일인걸.

자! 모여 봐.

“현재증권이 보유한 모든 주식을 팔아 정부가 시장에 풀고 있는 달러를 매입해야 해.”

“뭐? 그건 불가능해. 회장님이 반대하실 거야.”

“맞아. 그건 너무 무모해.”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말고.

“무모해 보여도 부도나는 것보단 나아.”

“부도?”

“1992년 조지 소로스가 몰고 온 헤지펀드를 기억해. 그리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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