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할아버지, 쌍욕이 메아리치는 게 들리십니까(1)
동기들은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머리의 ‘부도’라는 단어에서 힌트를 얻었다.
“설마 부도날 기업들 꼽은 거야?”
“비슷한 거지.”
“장난해?”
“저 정도면 국가 부도야.”
“아무리 나라가 어려워도 그렇지. 국가 부도라니 말도 안 돼.”
얘들아, 말이 돼. 정말 국가가 부도나거든.
“승하야, 이번엔 네가 힘 좀 써야겠다.”
재준의 부름에 박승하가 양복을 깃을 세우며 말했다.
“경매에 참여할 일이 생긴 건가?”
“역시 척하면 척이야. 경매는 아니고 공매. 자산관리공사에서 NPL(무수익 부실 채권) 공매를 할 거야. 방금 내가 지시한 기업의 NPL을 쓸어 담아야 해.”
뭐라고? NPL?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다들 어리둥절할 때 최진기가 말했다.
“무수익 부실 채권을 말하는 거야. 은행에서 받기를 포기한 돈이지.”
“그걸 왜 사?”
“싸거든. 거의 휴지 수준으로 원금의 5% 정도 할 거야.”
음.
재준의 말에 이무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법정관리 신청으로 회사를 압박하려고?”
오! 무열이 이제 법 좀 아는데!
“그렇지.”
“부실 채권도 부채라 갚지 못하면 채권단의 권리로 법정관리 신청이 가능하긴 한데. 소생이 불가능한 기업은 법원이 안 받아 줄 수도 있어. 기각되면 사놓은 부실 채권에 돈만 묶이게 되고 어쩌면 날릴 수도 있고.”
“알지. 그러니까, 오늘 중으로 내가 말한 기업 중에 살아남을 기업을 골라 봐.”
“골라 봐? 넌 같이 안 하고?”
난 다 아는데 왜 같이 일하니?
사실 재준은 자신이 골라 줄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동기들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내가 방금까지 회장님과 독대한 건 알지.”
“그래? 몰랐는데.”
“방금까지 회장님과 있었어. 심장이 얼마나 쫄깃하던지.”
“음…….”
“그런데 이번엔 정 실장님이랑 미국 투자사 대표를 만나러 가야 한다잖아? 어떻게 나를 대신해서 갈 사람? 어, 거기 김혜림. 너 영어 좀 하잖아. 네가 대신 가면 안 될까?”
“내가?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하는 영어는 생활 영어라 전문 어휘가 들어가면 나도 잘 못해.”
“이런, 이런. 그럼 나머지는?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나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니?
재준이 김혜림과 대화하는 동안 다른 동기들은 벌써 재준을 외면하고 자신의 자리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재준은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와 박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10분 후에 커피나 한잔하시죠?”
***
재준은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박민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 여기!
“언제 왔습니까?”
“금방 왔어요. 커피는 제가 미리 주문했고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요?”
“당연히 모르죠. 그냥 제일 비싼 거로 두 잔 시켰습니다.”
“투덜거리지 못하겠군요.”
접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제일 비싸면 맛이 없어도 맛있다.
쓴 커피라면 고급스러운 맛이 나고,
향이 진한 커피면 원산지의 향이 느껴질 테니까.
박민수는 앉자마자 재준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때가 된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죠. 미국으로 건너가서 투자사 설립을 추진해 주세요.”
“자본금은 5,000억이죠?”
“네.”
“재준 씨. 송금할 방법은 있으십니까?”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J.스탠리를 이용하시죠.”
“수수료 좀 주고 안전하게 가자?”
“네, J.스탠리에 투자금을 맡기시면 미국 증권 계좌를 만들고 미국 주식을 사겠습니다. 그리고 미국 건너가서 팔면 깔끔합니다.”
수수료에, 미국에 세금도 내야 하는데 깔끔하긴 뭐가 깔끔해.
“그럼, 저희가 미국에 갈 때까지 묵혀둘 거니까 IT 통신주로 구성해 주세요.”
“IT 통신주…… 네, 알겠습니다.”
‘아직은 아닌데’라는 표정의 박민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닷컴 버블은 1999년부터 시작되지만 1996년 미국 통신법 개정으로 벌써부터 IT 통신주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미국 주식을 사서 오르기를 기다리는 멍청한 행동은 하지 않겠지만 수수료와 세금 정도는 벌어야 하지 않을까.
미국 주식 사서 기다리는 게 왜 멍청하냐고?
말했잖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몇 년을 기다릴 수는 없다. 1년도 길다.
재준은 5,000억을 주식에 투자해서 평생 꿀 빠는 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의 이야기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현재증권이 외환위기 때 살아남는 게 1차 목표다.
이제 1년도 안 남았는데, 무슨 장기투자.
비트코인이라면 모를까. 아니, 비트코인도 2009년에나 발행되지.
더 쓸모없다.
“그럼, 박 형, 실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네. 근데…….”
“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박민수는 ‘이 사람이 너무하는 거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박 형, 왜요?”
“근데, 나 혼자 갑니까?”
“미국이요?”
“네.”
“그럼 혼자 가야지. 누구 데려갈 사람 있어요?”
“아니, 데려갈 사람은 없는데. 재준 씨는 안 가요?”
“내가?”
“네.”
“내가 왜 미국을 가요?”
“정말 나 혼자 가요?”
“그럼.”
“투자사가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혼자 가요?”
“현지에서 사람 채용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의논할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현지인들은 고용인이고 고용주인 재준 씨가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나는 안 되는데…….”
내가 한국에서 치러야 할 전쟁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럼, 사람 하나 붙여줘야지.
예전부터 생각해둔 적임자가 있긴 하다.
강호석.
강호석의 미시 경제와 박민수의 거시 경제가 만나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강호석의 영어가 약간, 아니 사실은 많이 걸렸다.
매일 AFKN으로 미국 아침 뉴스를 들으며 출근하는 건 알고 있었다.
듣는 건 인정하겠는데 말을 할 줄 알아야지.
아니, 말도 할 줄 아는데 상대가 알아듣질 못하는 게 문제다.
투자사 사람이라면 원어민과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엠 프롬 코리아, 아이엠 미스터 캉. 쉘위 터크 어바우트 스톡앤 본드? 오케이?
1996년대 고등학교 영어 교사 발음.
상대 울화통 터져 계약 성사는 둘째고 숨넘어갈 수도 있다.
왜 그런 이야기 있지 않은가.
유학 간 젊은이가 ‘Marlboro’ 담배를 피우고 싶었는데 상점 주인은 전혀 알아듣지 못해 그나마 알아듣는 마일드 세븐만 피웠다는.
-말보로 하나 주세요.
-What?
-말보~~~로.
-What?
-마~~~알보오로.
-What?
-마일드 세븐.
-OK. Here.
그래서,
박민수를 먼저 보내 투자사 기틀을 닦고 강호석은 영어 발음이라도 대충 익히게 한 뒤 합류시키려 했는데.
그냥 현장에서 익혀야 하나?
그래야겠지?
그러는 게 낫겠어.
박민수가 옆에 있으면 생존 회화부터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오케이. 접수. 유능한 사람 한 명 같이 가게 해 드리겠습니다.”
“유능하다고요?”
“네. 현재증권 회장님이 아끼시는 분인데.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오, 그럼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박민수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재준도 마주 보며 빙글 웃어주었다.
영어 좀 못한다고 미국 도착해서 죽이진 않겠지.
“그럼, 내일부터 속도 좀 내고 일을 진행하죠.”
“네. 내일 J.스탠리에 보고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한 후 사직서 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자, 이제 드디어 미국에 투자사를 만들게 되었다.
본격적인 게임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96년 미국 통신법 개정.
이로 인해 생겨나는 사이버 트레이드.
수천억 달러의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할아버지, 임병달과 투자사 이야기를 맞추고 재준은 경제정책연구실에 일찍 출근해 신문을 들추고 있었다.
1997년 1월, 부도 위험이 여기저기 감지되고 있었다.
부도철강은 제철소를 지을 돈이 부족해서 회사채 발행, 차입, 어음 발행, 매각 등으로 돈을 확보하려 시도했고, 은행들도 채무를 유예해 주거나 긴급지원을 하는 등 도와주었으나 결국 자금이 바닥났다.
이뿐만 아니라 경제계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뒤숭숭했다.
1995년 노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란 악재를 맞은 산미 그룹의 부도설도 나돌았고,
정진후 회장이 이끄는 이슬 그룹은 이슬베스토아, 이슬하이리빙, 이슬인터내셔널 등 사업을 확장하며 재계 순위 24위까지 올려놓았지만, 늘어나는 부채를 견디지 못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상립식품은 관광 사업 등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 이때 국지니 빵이 나왔으면 좀 나았을 텐데.
500원짜리 빵으로 한 해 210억을 벌어들임으로써 상립을 부도에서 살려낸 국지니 빵. 그건 1999년도나 되어야 나온다.
도대체 500원짜리 빵을 얼마나 팔았기에 210억 매출을 올린 거야?
신반포 1차 아파트부터 신반포 28차 아파트까지 무려 19년간 신반포로 불리는 대규모 브랜드 타운을 일군 한선공영은 중동 진출 실패로 휘청하더니 역시 부도설이 나돌았다.
여기저기 앓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쩌라고. 현재증권 살리기도 바쁘다.
재준은 신문을 치우고 천 실장이 건네준 그랜드월 최신 동향 자료를 봤다.
적대적 M&A 실패에도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싹 털어 줄 테니까.
자료를 손에 들고 살펴보고 있던 재준은 어딘가 모르게 평소와 다른 사무실의 침울한 분위기를 느꼈다.
최진기와 이무열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고. 김혜림과 사무보조 직원이 풀이 죽어 있었다.
왜 그래?
다들 초상집마냥.
“무슨 일 있어?”
김혜림이 재준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거 좀 봐.”
김혜림이 내민 공문에 <직원 예탁자산 유치 현황>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는.
직원 예탁자산 유치 현황이란 도표에 직원 이름과 돈을 기입하는 항목이 있었다.
물론 연구실 직원들의 예탁금 기입란에는 어떤 숫자도 없었다.
예탁금 0원. 어서 채워 놓으라는 일말의 압박이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 사무를 도와주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무보조원 옆에도 예탁금 기입란이 보였다.
이제 갓 졸업한 19살한테도?
이건 말이 예탁자산이지.
돈 빌려서 채우란 소리잖아.
이게 말이나 되는 처사인가.
김혜림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말을 했다.
“증권사는 원래 이런 곳인가……?”
휴.
한숨 내쉬던 사무보조원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재준의 머릿속에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사돈에 팔촌을 팔아서라도 주식 예탁금을 마련했다.]
재준도 어찌 못할 상황.
그렇다고 돈을 빌려줄 수도 없었다.
돈을 빌려주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으니까.
이때, 박승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들 집에 손 벌리기 미안한 것 같은데, 내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
타이밍 좋게 들려온 박승하의 목소리에 재준도 귀를 기울였다.
그래,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박승하가 전쟁이라도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맞보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