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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47화 (47/477)

제47화 한 개라도 마이너스면 꽝입니다, 꽝(5)

“역지사지란 말이냐?”

“에이, 뭐 그런 어려운 용어까지 쓰시고. 그런 건 아니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재준은 컴퓨터로 가서 서류 몇 장을 출력했다.

탁.

재준이 미레도백화점 요약재무제표를 탁자에 펼쳤다.

여기.

손가락으로 3,000억이라고 적힌 총 매출을 가리켰다.

박 회장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박 회장은 선동방의 적대적 M&A가 시작되자, 전 미레도홀딩스 대표이사 등 임원들과 짜고 회사 전산을 조작해 재고를 부풀리고, 백화점 매출을 뻥튀기해 장부상 3천억 원을 늘려놓았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금융기관에서 1천6백억 원을 빌렸다.

‘그룹 내에 몇 명만 알고 있는 걸 이놈이 알고 있다고?’

“이……. 이게 어쨌다는 거지?”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요? 본인이 더 잘 알면서.”

“난 장부를 조작하지 않았어.”

박 회장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장부 조작이요? 전 그런 말 꺼낸 적이 없는데.”

“빙빙 돌리지 말고 얘기해.”

“어라, 빙빙 돌리는 건 회장님이죠. 난 이미 말을 했잖아요. 대한 그룹을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그러려면 뭐가 필요하겠어요?”

박 회장은 재무제표의 숫자를 보며 입을 굳게 닫았다.

“이것만으론 아무것도 못해.”

“아, 그러시겠죠. 전산까지 조작했으니. 근데 회장님이 좋아하는, 만약에, 만약에 검찰이 밝혀내면요? 의외로 간단해요. 백화점 매출과 입점한 업체들 매출과 비교해 보면 금방 나올 것 같은데. 아닌가? 아, 은행 입출금까지 더해지면 되겠네. 그렇죠. 설마 입점 업체들이 현찰 들고 매출을 맞추진 않았을 거 아녜요.”

후.

박 회장 한숨이 재준의 말을 인정하는 듯했다.

“제가 바라는 건 그리 많지 않아요. 아직 보유하신 미레도홀딩스 주식하고 선동방 계열사인 증권, 투자자문운용, 상호심용금고 주식 넘기세요.”

“선동방 금융사까지…….”

“그럼요. 그게 핵심인데. 어때요?”

“그런데 널 어떻게 믿지?”

“에이, 여기 현재증권 회장님이 계신데. 증인이잖아요. 증인.”

험, 험.

임병달은 훅 들어온 재준의 말에 헛기침으로 답을 했다.

박 회장, 진짜 참담하구나.

재준이 녀석은 어떻게 저런 정보를 알아낸 것일까.

재준이 그동안 벌인 일들을 정 실장을 통해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상대의 약점을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생각할 때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의 기업의 전산이 조작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부 고발자가 있었나?

아니다. 천 실장의 보고에도 재준은 미레도홀딩스 관계자와 만난 적이 없다.

아니면 분식회계라는 정황을 잡고 직접 전산을 조사했다?

이건 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남의 회사 전산에 접근이 가능하기나 한가?

그럼, 어떻게 한 걸까?

“회장님. 지금까지 제가 한 얘기, 증인 좀 해주세요.”

임병달은 재준에 이어 박 회장을 쳐다봤다.

“난 괜찮은데. 박 회장님은 어떠세요?”

“생각 좀 해봐야겠소.”

아직 결정하지 못한 박 회장을 보던 재준이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회장님이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세요.”

“뭐?”

눈가에 잔뜩 경련을 일으킨 박 회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임병달을 한 번 쳐다보고 거세게 돌아서 나가버렸다.

쾅!

문이 닫히자 ‘후’ 하고 임병달이 한숨을 내쉬었다.

“거, 성질머리하고는.”

“아직도 자존심을 챙기시려는 겁니다.”

“박 회장이 넘길 것 같냐?”

“넘길 겁니다.”

“왜?”

“박 회장이 분식회계를 한 이유는 경영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꽤 가정적이어서 가족을 지키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박 회장이 가정적이란 걸.”

“비밀입니다.”

“뭐? 허, 거참.”

“암튼 자신이 감옥에 가는 건 가족에게 가장 치명적인 모습입니다.”

박 회장이 가정적인 건 정황상의 추측이었다.

부인이 유명한 영화배우였고 세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밖으로 이야기가 하나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룹이 해체되고 유일하게 남은 재단을 운영하며 가족과 조용히 살았다.

새삼 진짜 가정적이네.

“재준아, 묻고 싶은 게 있다.”

“궁금하신 게 뭔데요?”

“선동방은 왜 또 건드리려는 거야?”

“그럼 가만히 놔둬요? 저렇게 비틀거리는데? 할아버지. 저희 증권사예요. 쌀 때 샀다가 비쌀 때 파는 게 우리 일이라고요.”

“선동방이 우리한테 먹힐 만큼 비틀거린다고?”

“4월에 노 전 대통령 비자금 대법원 판결이 나옵니다.”

“징역을 피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럼, 선동방의 노 상무에게 불똥이 안 튈까요?”

“노 상무가 구속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구속을 피해서 해외로 도피할 수도 있고요.”

노 전 대통령이 1997년 4월에 대법원 판결에서 징역 17년을 받자, 노 상무는 바로 미국으로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노 상무가 없어지면 선동방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다?”

“먼저 줍는 게 임자지요.”

“우리한테 그만한 자금은 있고?”

“도와줄 분이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도와주는데?”

“손 회장님이요.”

“…….”

선동방은 채권단으로부터 자금 압박을 받았고, 결국 1999년에 워크아웃 대상이 된다.

뭐, 난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도 없고 올해 시끄러운 틈을 타서 손 회장과 손을 잡고 빠르게 처리할 것이다.

새로운 호구인 손 회장님에게 선동방을 턱 하니 안겨드리고 재우증권을 받아 오는 게 나의 새로운 목표다.

욕심이 과하다고?

아니다.

이유가 있다.

재우증권을 받아 오는 건 운명이다.

2016년 미리내증권과 재우증권이 합쳐지면서 금융권 업계 1위가 된다.

근데,

내가 박민수를 포섭하면서 미리내증권이 미래에서 사라졌다.

그럼, 재우증권의 주인은 나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뇌피셜이 어딨냐고 떠들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먹기로 한 이상 후퇴는 없다.

아니 뭐, 재우증권을 현재증권이 먹든 미리내증권이 먹든 어차피 재우증권은 어딘가에 팔려 가는데, 우리가 꿀꺽해도 되잖아.

다 같은 증권사인데.

그리고 재우 그룹이 분식회계로 망가지기 전에 이실직고하고 정상적인 해체 절차를 밟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토록 재우 그룹에 우호적인 이유는 솔직히 먹을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재우전자, 와, 이거 어쩔 거야.

재우건설, 쩔지 쩔어.

재우자동차, 호레이!

재우중공업, 지리지 지려.

이외에 열거하기도 입이 아프다.

우선 법정관리나 화의가 아닌 워크아웃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왕창 뜯어 먹으려면 현재증권은 금융기관 위치에서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 2년 후 먹거리를 위해 지금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일단 올해 4월까지 미국에 투자사를 설립하고 도매은행을 인수를 끝마쳐야 한다.

그리고 4월에 선동방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지금이 1월이니까……. 생각해 보니 시간이 별로 없네.

나, 너무 바쁘게 사는 거 아냐?

할아버지, 제가 일에 치여 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임병달은 재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채권단을 막아주던 노 상무가 없어져서 선동방에 자금 압박이 심해질 거다?”

“자금 압박 수준을 넘어설 겁니다. 채권단 뒤에서 제가 계속 부채질할 거니까요.”

임병달은 재준을 봤다.

사악한 놈.

이놈 점점 악당으로 변해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박 회장에게 연락하라고 정 실장에게 지시하마.”

“마지막 자존심을 챙겨주시는 거예요?”

“그래도 그룹 회장이었다.”

“네.”

재준은 못마땅했지만, 그 정도는 양보해도 괜찮았다.

기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건 하나다.

오직 이익.

하지만 이익은 포장된 말이고 정확히 ‘탐욕’이다.

그리고 탐욕엔 책임이 뒤따른다.

단 한 번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크나큰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부실 채권을 좀 사야겠습니다.”

“그걸 왜 사? 말 그대로 부실 채권인데.”

“싸잖아요.”

“싸다고 막 사도 되는 거 아니다.”

“이게 싸고 큰돈을 벌 수 있는 투자예요.”

“이놈아, 그런 투자가 어디 있냐?”

할아버지, 이게 바로 특수상황 투자란 겁니다.

외환위기 때 외국계 투자자들이 국내 기업에게 써먹은 투자방법이에요.

말만 특수상황이지 구조조정에 들어간 기업들 부실 채권 사들여 돈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거지만.

어쨌든 채권자는 기업이 돈을 안 갚으면 법정관리를 신청해서 경영진을 다 내쫓을 수 있다.

물론 채권 규모가 좀 커야 하지만.

꼭 주식으로 기업을 잡아먹는 건 아니다.

임병달은 또 이상한 눈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거, 알 수 없는 놈이네.

부실 채권으로 뭘 하려고.

채권추심회사라도 차릴 생각인가?

“할아버지, 혹시 채권추심을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헉! 이놈 갈수록…….

진짜 신내림이라도 받았나.

“아니다.”

“기업이 망하면 휴지가 되지만, 건실한 기업의 부실 채권은 나중에 다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그럼요. 채권인데요. 은행에서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죠. 안 갚겠다고 버티는 중인 것 같은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됩니다.”

“증권사가 깡패냐?”

“법으로 합니다. 절대 주먹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허, 거참.”

“할아버지. 단일 산업에서 활동하는 기업은 투자가 제한되어 있지만, 증권사는 다양한 산업에 걸쳐 분석하므로 여러 방면 투자에서 훨씬 유리합니다.”

이놈 말투가 달라졌다!

“…….”

“증권사의 분석은 결과로 이어져야 쓸모가 있습니다. 신문사처럼 단지 분석을 내놓고 반응을 기다리면 늦습니다. 당장 눈앞에 투자 대상이 나타나면 일단 손에 쥐고 보는 것이 낫습니다.”

“위험한 발상이다. 손에 쥔 것이 칼날이면 다치게 마련이야.”

“그 칼이 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다쳐도 손해는 보지 않습니다. 회사에 커다란 이익을 줄 가능성이 1%에 불과하더라도 수수방관으로 기회가 날아간다면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너무 위험한 생각이야.”

걱정도 팔자이십니다.

전 괜찮습니다.

“일단 기획서를 올릴 테니. 검토해 보십시오.”

“음…, 위험한데…….”

고민하는 임병달 앞으로 재준이 몸을 숙였다.

“내기하실래요?”

요런 나쁜 놈.

“싫다. 기획서나 가져와라.”

“네.”

아쉽다.

이번 내기도 내가 이겼을 텐데.

재준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회장실을 나가 연구실로 향했다.

***

경제정책연구실.

“자, 자, 모여 봅시다.”

재준이 들어서며 동기들에게 다급하게 손짓했다.

동기들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의심스럽다…….

연말 회식 자리에서 분명 ‘새로운 임무’에 관한 운을 띄웠던 기억이 네 명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슬금슬금 다가오며 노려보는데,

“자, 일 좀 하자.”

역시.

“무슨 일?”

이미 예상한 터라 그리 놀랄 일도 아닌데 김혜림의 목소리가 컸다.

왜 그래?

재준이 김혜림을 보고 진정하라고 손으로 다독였다.

“부도 그룹은 부도가 임박했으니까 제외하고. 산미 그룹, 이슬 그룹, 상립식품, 한선공영, K모터스 그룹, ZBW, 모든누리여행사, 고련증권, 서동증권, 정구 그룹, 가산 그룹, 거편 그룹, 그리고 재우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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