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한 개라도 마이너스면 꽝입니다, 꽝(4)
“최 부사장님.”
“그냥 예전처럼 아저씨라 불러.”
“아저씨. 대한 그룹 팔아서 채권단에 다 가져다 줄 겁니까?”
“그건 아니지. 협상을 해야지.”
“협상은 무슨 협상이요. 채권단이랑 협상할 수 있습니까? 무조건 안 된다고 버티는 놈들인데. 지분 100%인 계열사 하나 폐업시키세요.”
“폐업? 파는 게 아니라?”
“채권단에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겁니다. 폐업하면 그 계열사 대출은 사라지고, 채권은 휴지 되잖아요?”
“그렇지.”
“대한 그룹 계열사 다 폐업하면 대출도 채권도 다 날아간다, 어쩔래. 아니면 우리가 제시하는 거 받아들이든가. 이렇게 으름장을 놓는 겁니다.”
그렇다. 법인이니까 폐업하면 회사도, 대출도, 채권도 다 날아간다.
채권단도 한 푼 못 건지고 손실 처리할 수밖에 없다.
법인이 폐업하면 방법이 없다.
“채권단에 폐업한다고 협박하라고?”
“대한 그룹 계열사 중 스톰라인이라고 소화물 운송업체 있을 겁니다. 거기 은행 대출 500억 좀 넘게 있습니다. 본보기로 폐업시켜서 날려버리세요.”
“뭐? 그게 돈이 얼마짜리 회사인데.”
“그리고 대출 무시하고 회사 채권만 받겠다고 하세요.”
“싫다고 하면?”
“대한 그룹 계열사 다 폐업 처리한다고 협박하시면 된다니까요.”
대한 그룹의 기업 가치는 2조 원, 대출은 대략 2조 원, 회사채권은 대략 4천억 원.
유통 기업이라 대출이 그래도 건실한 편이다.
다른 기업에 넘기면 가격도 좋게 받을 수 있다.
물론, 기존 기업 합병처럼 대출은 천천히 갚고 채권은 바로 회수해주는 게 맞다.
근데, 회사를 다 팔아버렸는데 어떻게 대출을 천천히 갚아.
이 기회에 싹 다 처리해주면 계열사 사가는 대기업도 좋고 일 처리한 현재증권도 돈 남아서 좋은 거지.
좋게 대화로 풀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럴 땐 사회주의식 협박이 최고다.
북한 봐라, 엄청난 BJ의 산물.
현재증권은 대략 3천억 원 날리고, 은행은 2조 4천억 원 날릴 수 있다고 강하게 협박해야 한다.
현재증권이 대한 그룹을 매각하면 최소 1조 5천억 원이 들어온다.
채권단에게 4천억만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다.
채권단으로서는 기가 막히겠지만, 어쩌겠는가.
3천억 들였으니 최소한 1조는 남겨 먹고 싶은데.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은 우리도 3천억 날린다?”
“맞아요.”
“통할까?”
“안 통하면 말죠. 뭐, 어차피 작전 내치면서 공짜로 들어온 돈인데. 우린 손해 날 거 없다고 하세요.”
구조화 투자팀을 이끄는 최효범 부사장은 정 실장의 말을 듣고 고민이 많았다.
대한 그룹을 해체해서 매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BW를 발행하면서 전경련이 기업들과 매각에 대해 조율을 해 놓았으니 각자 자신들의 몫을 돈 내고 가져갈 것이다.
‘채권단이 문제지. 나머지야 뭐.’
“공짜로 들어온 돈이라고 말하라고?”
“그래야 확 와닿지 않겠어요?”
“미친놈.”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잖아요.”
“인정사정없는 놈.”
최 부사장은 재준을 묘하게 쳐다봤다.
‘허, 정말 변한 거 없는 것 같은데 변했네.’
누굴 두들겨 패는 모습은 확실히 예전이나 지금이나 닮았다.
그게 사람이 아니라 기업으로 바뀌었고 주먹으로 패던 걸 입으로 팰 뿐이지.
아픈 데만 골라서 때리고, 때린 데 또 때린다.
너무 아프면 악 소리도 못 내는 법이다.
채권단의 아픈 곳은 돈을 못 받는 것.
가뜩이나 대출로 나간 거 다 받아도 이자를 못 받아서 억울할 텐데.
대출 이자는 고사하고 대출 원금도 안 주겠다?
하지만 대한 그룹 회사채는 받아주겠다.
약간의 여운을 남긴다.
그나마 회사채라도 건지라는 메아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질 테고…….
“채권단이 환장하겠는데.”
“그러니까 본보기로 먼저 한 군데 폐업 처리하세요.”
“진짜로?”
“눈앞에서 뭔가 벌어져야 한다니까요. 그래야 믿지요.”
“그 회사 직원은?”
“그걸 왜 저희가 걱정해요?”
“그러긴 해.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다른 회사에 재취업할 수 있어요.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될걸요.”
너무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960년대부터 2022년에 이르도록 실업률이 가장 낮은 해가 1994년부터 1997년이다.
2점대를 기록했다.
일자리는 넘쳐났다.
외환위기로 1년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렇지.
“그렇지.”
“네.”
“그런데 정말 너 재준이 맞지?”
“네.”
“형택이가 그러는데, 회사 내에서 모른 척하라고 했다면서. 맞지?”
“네.”
“좋아. 그럼, 다음엔 어떤 사고를 친 거냐?”
“이제 조용히 달러만 매집할 거예요.”
“얼마나?”
“글쎄요. 한 10조 정도.”
“미친놈.”
“방금 TV에서 달러 떨어진다고 한 거 못 들었냐?”
“아저씨도 안 믿으니까 일어나서 소리친 거 아니에요?”
곽형택은 괜히 기어들었다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 달러를 어디서 사게?”
“먼저 종금사 달러 좀 긁어 보려 해요.”
“그들이 달러를 판대?”
“그럼요. 우리 아니면 위험한 곳에 투자해야 할 텐데요.”
해외에서 달러를 빌려와서 무분별하게 빌려주다 망한 스물네 개 종금사들.
달러가 남아도니 자꾸 눈을 동남아나 러시아로 돌리고.
어차피 종금사는 국내 기업에 대출해준 여신으로 망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동남아나 러시아로 빠져나가 사라진 달러들이었다.
사라질 달러를 내가 사는 거다.
달러를 매집하면 800원대이고 1년 후엔 2,000원 가까이 뛰는 건 맞다.
환율이 뛰었다고 돈을 벌었다는 생각은 1차원적인 생각이고.
1조 투자해서 1조 더 벌었다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1999년 바이코리아펀드에 몰린 돈이 10조 원이 넘는데.
진짜 중요한 것은 IMF에 정부가 백기를 들었을 때 달러를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의 힘이다.
그리고 달러가 계속 유입되고 있다면 그 기업은 절대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 없다.
재준이 그린 그림도 이거였다.
달러를 가지고 있는 것뿐 아니라 계속 유입되게 만드는 것.
하지만 이런 그림을 말할 수 없는 재준은 입맛만 다셨다.
“이제 그만 동기들한테 가볼게요.”
“그래, 우린 한 잔씩 더하고 들어가마.”
“네.”
호프집을 나가는 재준을 확인한 후 최효범이 곽형택을 쳐다봤다.
“재준이 저렇게 된 걸 왜 나한테 말 안 해 준 거야?”
“회장님이 하지 말라고 했어.”
“형길이 너도?”
“네. 회장님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봐, 효범이. 근데 진짜 채권단들이 우리말을 들을까?”
“뭐, 처음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절하겠지. 하지만 재준이처럼 막 나가면 어쩔 수 없어.”
“그러다 현재증권 정부에 찍히는 거 아냐?”
“지금 이 시국에? 퍽이나. 그래서 재준이가 마지막에 달러 이야기한 거야. 진짜 100억 달러 가지고 있으면 정부고 대기업이고 와서 사정해야 할걸. 말이 100억 달러지.”
“재준이가 껄렁하게 말하는 게 믿음이 안 가서 말이야.”
“글쎄, 말하는 꼬락서니로 보면 그렇긴 한데. 내용은 꽉 찼어.”
“그래?”
“응, 말은 대충하는 것 같은데 이미 계산이 다 서 있는 것 같아.”
“그래?”
“그리고 나만 그런가? 순간순간 석훈이를 보는 것 같지 않아?”
흠.
“석훈이…….”
셋은 말없이 맥주잔을 들어 부딪치고는 들이켰다.
***
“임 회장.”
하루 쉬고 1월 2일에 출근한 재준이 임병달과 차 한잔을 마시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데 누군가 느닷없이 회장실에 쳐들어왔다.
벌컥, 문이 열리고 보인 것은 성난 모습의 대한 그룹 박 회장이었다.
임병달은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않으며 말했다.
“박 회장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박 회장은 임병달 옆에 재준이 있는 걸 확인하고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임병달은 박 회장의 행동이 못마땅한지 혀를 끌끌 찼다.
“박 회장님. 이리 와서 앉으세요.”
박 회장이 씩씩거리며 재준의 앞에 앉았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히 대한 그룹 회장을 앉아서 맞이하고 상석도 아닌 자리를 내주었다.
이미 먹잇감이 되어버렸으니 감수해야 할 일이다.
“임 회장.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뭘 말입니까?”
“대한 그룹을 다 찢어서 팔겠다니요. 최소한…….”
최소한.
“주식회사 대한은 살려야 하지 않느냐 그 말씀 하러 오셨군요.”
재준이 박 회장의 말을 자르며 빙글 웃었다.
이놈.
박 회장은 재준을 매섭게 노려봤다.
임시 주총의 목적으로 계열사 매각뿐만 아니라 대한 그룹의 모태인 주식회사 대한의 10개의 사업부를 따로 매각한다고 보고받았다.
“이번에도 네놈 짓이냐?”
“이봐요. 회장님. 이제 회장님 소리 들을 날도 며칠 안 남았는데. 아무한테나 놈놈거리면 대접 못 받아요.”
박 회장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임병달은 대화에 끼지 않겠다는 듯 살짝 등을 기대었다.
재준이 팔짱을 끼었다 풀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잠시 침묵을 유도하여 상대가 자신을 보도록 시간을 주었다.
“대한 그룹은 백화점에 최적화되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미련을 버리세요. 그게 계열사든 사업부든 다.”
“그게 어떻게 만든…….”
“만들긴 누가 만들었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회사 대출받아 샀으면서.”
“…….”
“이해는 합니다. 골프장 가지고 싶으셨겠죠. 그룹인데 골프장 정도는 있어야지요. 그럼 골프장 전문가라도 붙이든가. 면방 사업부 과장보고 골프장을 관리하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리고 제분회사는 왜 사신 겁니까? 밀 수입해서 선동방과 한번 거하게 붙으실 계획이셨습니까?”
“네가 경영에 대해서 뭘 알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
풋.
재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고요? 그러다 다 망합니다.”
“망한다고?”
“지금까지 사업부 매출을 전부 더하셨죠. 초등학생처럼 일 더하기 일은 이, 이런 식으로 사업부 매출을 줄줄이 더해서, 답은 플러스. 와! 참 잘했어요. 도장 쾅! 맞습니까?”
“…….”
“박 회장님. 사업은 더하는 게 아니라 곱하는 겁니다. 단 한 개 사업부가 마이너스면 전체가 아무리 잘해도 꽝입니다, 꽝. 아시겠습니까?”
저 어린놈이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제깟 놈이 사업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회장님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선동방이 시비를 걸어서 결국 이렇게 된 것 같죠? 아닌가, 혹시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말하자니 선동방을 막지 못한 무능력자가 되는 것이고, 아니라고 말하자니 방만한 경영으로 허점을 보인 것이 된다.
“근데 갑자기 왜 현재증권이 나타났을까? 이런 생각은 안 해봤나요? 나 같으면 그것부터 생각했을 텐데.”
이제 생각해 보니,
“그래, 이유가 뭔가?”
“그걸 말해줘야 알아요?”
“…….”
이놈이 나를 우롱하는구나.
“이건 어때요? 회장님이 대출로 집어삼킨 계열사들. 이러면 말귀를 알아먹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