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한 개라도 마이너스면 꽝입니다, 꽝(3)
건배!
근처 호프집에 들어온 재준과 일행은 일단 생맥 500cc를 한 잔씩 받아들고 시원하게 마셨다.
좋다.
재벌 손자가 되었어도 이런 소소한 술자리는 버리지 못한다.
강호석과 껍데기를 먹은 것도 갈매기살을 먹은 것도.
아직 재벌다운 술자리를 못 가져서 그런가.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거한 안주들 사이로 술을 먹던데.
하지만 회는 원래 미끌미끌해서 싫고,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몇 점 먹으면 느끼하고, 단것은 무조건 안 먹는다.
먹는 것보다는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과 허물없는 대화가 중요했다.
역시 아직은 재벌이 되려면 멀었어.
한 병에 천만 원짜리 와인 한잔 들고 마천루 꼭대기 층에서 먼 풍경을 바라보며 고독을 즐기는 자신을 생각하면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다시 건배!
짠.
생맥주잔을 부딪친 후 시원한 청량감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이 느낌이 와인보다 백배는 낫다.
카!
마신 후에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이 탄산.
“제안 하나 합니다.”
잔을 무슨 창처럼 들고 김혜림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김혜림. 왜 그래, 무섭게.
“무슨 제안입니까?”
음.
“우리 전부 동기잖아요. 나이도 거의 비슷하고. 아닌가요?”
동갑은 아니지만 비슷하긴 하다.
근데 김혜림, 네가 나이 젤 많아.
“그래서 지금 건배한 후 모두 말을 놓는 건 어때요?”
“글쎄요. 지금은 서로 나이를 모르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텐데.”
“뭐, 어때요. 그땐 이미 익숙해져 있을 거예요.”
“난, 찬성.”
“나도 찬성.”
“그럴까.”
“어, 벌써 말 놓으면 안 되고. 건배 후에.”
하하하.
말을 놓자고?
나중에 너희들 큰일 나.
나, 이 회사 사장돼.
어쩌려고 그래?
“자, 준비됐지요.”
김혜림이 아주 신나서 맥주잔을 앞으로 뻗었다.
건배!
에라 모르겠다.
나야 지금이나 나중이나 반말이지만, 너희들이 과연 내가 사장되면 반말을 할 수 있을까?
건배!
짠.
재준은 결국 건배를 하고 말았다.
포문은 역시 분위기 만드는 김혜림이 열었다.
“재준아, 이제 대한 그룹을 진짜로 우리가 인수하는 거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나야 홍콩에서 뉴월드 찾으라고 해서 찾은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는 것 같아. 그거 찾느라 죽을 고생을 했지만.”
다음은 최진기.
“나도 마찬가지야. 재무제표 숫자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려.”
다음 이무열.
“난 증권에 관련된 법들 모조리 외울 것 같아.”
다음 박승하.
“회사에서 차 좀 지원해줘야 하는 거 아냐? 기업 부동산 찾아다니느라 발이 부르트려 그래.”
뭐?
모두 박승하를 매섭게 째려봤다.
“어허, 왜 그렇게 쳐다봐.”
“차? 너무 배부른 소리 같은데.”
“맞아, 내 손에 물집 잡힌 거 안 보여?”
“난 눈이 빠지는 걸 억지로 참아서 두꺼비눈이 됐어.”
“전문용어가 너무 많아서 전자사전 알 빠진 거 보여 줘?”
말을 놓으니까, 순식간에 사람들이 변했다.
수줍음이 많아서 할 말 아니면 잘 안 할 줄 알았는데.
완전 수다쟁이들이잖아.
“자, 건배 한 번 더 합시다.”
“달려, 달려.”
“먹고 죽는 귀신이 때깔도 좋다.”
“그 말이 여기 어울리는 거 맞아?”
“몰라, 몰라.”
얘들아, 왜 그래, 분위기 좀 차분하게 가자.
“그런데 진짜, 이번 대한 그룹 마무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래, 이런 얘기를 해야 내가 차분하게 설명하지.
“BW는 전경련과 입을 맞춘 대기업이 먼저 사들이고 현재증권이 후에 모두 사들일 거야.”
“와, 그렇다면……. 진짜 대한 그룹을 인수하는 거네.”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그동안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아.”
재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일부터 구조화 투자팀 최효범 부사장님과 정태균 경영정책연구실 실장님이 임시주총을 지시할 거고 주총 열리면 이사진을 싹 다 우리 쪽 사람으로 선임할 거야.”
“그럼 그랜드월은?”
“그랜드월과 협상해야지. 하지만 이미 물 건너간 M&A야. 현재증권 아니면 미레도홀딩스 주식 받아주는 곳도 없어.”
“재준이 말대로 대한 그룹 해체해서 팔아 버리면, 정말 수조 원을 벌겠는데.”
“그럴 리가. 프레젠테이션 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한 그룹 재무제표 봤잖아. 대출이 만만치 않아.”
아…….
모두 신기한 듯 듣고 있다가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걱정은…….
내가 채권단이 달라는 대로 다 줄 것 같아?
맘 같아선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지만, 대충 얼마씩은 쥐여 줘야지.
재무제표를 분석했던 최진기가 가장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대출 다 털면 남는 것도 별로 없는데.”
에헤, 걱정하지 말라니까.
재준은 최진기 어깨를 토닥거리며 모두를 위로했다.
“자, 자. 우린 할 일 다 했으니 털어버리고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면 돼.”
뭐?
모두 방금 재준의 말에 일순 동작을 멈췄다.
“방금 뭐라고?”
“새로운 업무라고 한 것 같은데.”
전부 들던 잔을 든 채로 재준을 쳐다봤다.
어, 이 사람들 그럼 언제까지 놀고먹을 생각이야?
바로 내일은 쉬고, 모레부터 일해야지.
“왜 그렇게 보는 거지?”
“뭐 들은 얘기 있는 거야? 새로운 업무라니.”
“그게, 이번엔 재계 20위권 안에 있는 그룹을 털어 보자는데.”
“누가?”
누구긴 누구야 나지.
“회장님이.”
“회장님, 제정신 아니신 거 아냐?”
“무슨 소리야? 회장님한테.”
“당연하잖아. 무슨 그룹이 ‘나 잡수쇼’하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이번 대한 그룹은 적대적 M&A로 힘이 빠질 대로 빠져서 가능했지만. 다른 그룹은 턱도 없을걸.”
진기야 입에서 불 나오겠다.
어허, 혜림이 눈에서 레이저. 레이저.
이제 기업들 다 힘 빠진다니까.
재준은 손가락을 들어 TV를 가리켰다.
“저거 때문에 가능해.”
모두 TV로 고개를 돌렸다.
1996년 연말 환율 775.7원.
작년까지 800원 위에서 널뛰던 환율이 올해 700원대를 기록했다.
정부가 억 소리 나게 환율을 조작하고 있었다.
한술 더 떠 TV 속에 있는 경제 전문가란 사람이 끔찍한 소리를 덧붙였다.
-1달러에 300원 시대도 대비해야 합니다.
뭐? 저런 개…….
“뭐라는 거야? 저 미친놈! 당장 방송국에 전화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옆 테이블에 있는 나이 지긋하신 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TV에 대고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저런 경제관념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을 봤나? 뭐? 환율이 하락한다고? 저 미친놈 당장 끌어내.”
“부사장님 좀, 흥분하지 마세요.”
“형길아, 핸드폰 줘봐.”
“진정하시라니까요.”
형길? 서형길 실장?
테이블 칸막이 사이로 서형길의 얼굴이 보였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
“주변에 사람 있어요.”
“주변에 사람 있으면 뭐?”
곽형택 부사장이 서형길 실장을 뿌리치고 주변을 흩어보다 재준과 눈이 마주쳤다.
껌뻑, 껌뻑.
“그래, 사람…… 있네. 재준이도…… 있고.”
곽형택 부사장이 자신도 모르게 재준의 이름을 불렀다.
“뭐? 재준이?”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신사가 일어섰다.
그리고 재준을 향해 미간을 찡그렸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한 인상으로.
“재준아.”
헉! 최 씨 아저씨.
거기서 왜 내 이름을 불러요?
동료들이 전부 재준을 쳐다봤다.
“재준아.”
너희들까지.
아니, 상황이 왜 꼬이는 거야.
하하.
재준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서형길 실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일부터 다른 직장 알아보고 싶어요?
‘아니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재준에게 사정하는 눈길을 보낸 후 서형길 실장은 부사장 둘을 잡아끌어 앉혔다.
자리마다 칸막이가 되어있어서 더는 얼굴을 볼 수 없지만 들리는 소리에 동기들의 귀가 쫑긋한 건 막을 수 없었다.
내부의 소란을 막으려면 외부의 적을 끌어들여야 한다.
재준이 다들 모이라고 손짓을 했다.
모여, 모여.
모두 머리를 맞댔다.
재준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여기 부사장님들이랑 실장님이 계신 걸 몰랐네. 굉장히 불편한데.”
“우리 자리 옮겨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게. 어쩌지.”
어쩌긴 뭐가 어째, 당장 도망가야지.
재준이 엄지손가락으로 옆 테이블을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내가 먼저 할게.
“아, 이거 맥주만 마시려니 배가 부른데. 소주 먹으러 갈까?”
재준이 옆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자 모두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고는 옳거니 맞장구를 쳤다.
“아하, 그러네. 배불러. 배부를 땐 소주가 최고지.”
“그럼, 어서 소주 먹으러 가자고.”
“그래, 그래.”
하하하.
그럼, 그럼.
우르르.
이런 발연기들.
재준과 동기들은 어디서 이런 스피드가 나오는지 번개같이 호프집 밖으로 도주했다.
마지막으로 재준이 계산을 하는데,
“도련님, 잠시 시간을 내야겠습니다.”
서형길 실장이 어느새 다가와 속삭였다.
으이그, 진짜.
“곽 부사장님이 지금 한창 최 부사장님께 도련님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계십니다.”
후.
“알았어요.”
재준은 밖으로 나가 동기들에게 건너편 고깃집으로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하고 다시 호프집으로 들어왔다.
재준은 곽 부사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저씨! 정말 이러깁니까?”
“허, 내가 뭘?”
“동기들 앞에서 왜 아는 척을 하냐고요?”
“내가?”
“그럼, 누가요?”
“작게 말했는데. 들렸으려나? 그럴 리 없는데.”
정말. 성질 한 번 내버려?
이미 저질러진 일 모르쇠로 일관하는 곽 부사장이었다.
최효범 부사장은 재준을 위아래로 흩어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곽 부사장이 재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앉아 봐.”
재준이 자리에 앉자 최효범 부사장과 곽형택 부사장이 만담을 했다.
“진짜, 재준이냐?”
“그렇다니까. 저놈, 저런 모습 처음 보지?”
“상상도 못 했지. 재준아, 머리 다쳤다며.”
“아니라니까, 머리 다친 척하는 거라니까.”
“진짜냐, 재준아?”
후.
“아픈 적 없어요.”
“거봐, 거봐. 이렇다니까.”
“그럼, 그동안 왜 그러고 다닌 거냐?”
사람이 변하면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
그걸 꼭 설명을 들으려고 하네.
“아버지 생각하다, 이제 할아버지 생각만 하고 살려고요.”
“그래? 잘 생각했다. 병달 형님 고생 많았다. 그런데 방금 형택이한테 들어보니 지난번 노경범 작전 네가 직접 처리한 거라며?”
“어허, 사실이라니까, 그뿐인가? 재준이가 황선달이랑 재경기계도 아주 작살냈잖아.”
“진짜 네가 한 일이냐?”
후.
“네.”
“듣자니 만선증권 매집해서 미레도홀딩스 주식 10%도 네가 엮은 거고?”
후.
“네.”
“전경련 손 회장과 합작해서 미레도홀딩스 BW 발행하게 한 것도 너고?”
“네~~~에.”
재준이 마지막 대답을 마치고 눈에 힘을 주며 턱을 들었다.
“아니. 표정이 왜 그래?”
“저 좀 조용히 살고 싶거든요.”
“미친놈.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면서 조용히 살길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 뒷수습은 우리가 하고?”
“돈 벌었잖아요.”
“대한 그룹 대출은 어쩌고?”
“BJ해야죠.”
“BJ?”
“배 째라고요.”
“이게 배 짼다고 해결이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