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한 개라도 마이너스면 꽝입니다, 꽝(2)
원고, 선동방 측 변호사가 일어섰다.
“네, 재판관님. 지금 대한 그룹과 선동방 그룹은 지분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한다는 것은 경영상의 목적보다 경영권 방어 목적이 확실합니다. 이는 경영권 방어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대한 그룹의 꼼수일 뿐입니다.”
이무열은 고개를 숙여 재준의 메모를 보았다.
[선동방 그룹 : 대한 그룹은 경영권 방어가 목적이라며 공격]
‘음…. 이 정도는 나도 예상할 수 있지.’
무열이 고개를 들어 판사를 보았다.
판사는 원고 측 주장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고 측 반론하세요.”
피고, 대한 그룹 측 김해수 변호사가 일어났다.
“네. 재판관님. 경영상 목적도 확실하고, 신주인수권부사채의 발행도 회사 정관에 규정에 따라 이사회가 적법하게 발행되었습니다. 현재 경영진의 판단을 두고 외부에서 이런 식으로 제동을 건다면 세계 경제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인수한 국내 기업들도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김해수 변호사는 ‘적법’과 ‘기업’란 단어를 강조하며 말을 마쳤다.
이무열은 메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한 그룹 : 적법성, 대기업]
‘재준 씨, ……진짜 족집게네.’
지금까지 이야기를 반복하듯 최종 변론이 이어진 후 재판관은 잠시 휴정을 선언했다.
최진기는 재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우리도 잠시 바람 좀 쐬고 들어 와요.”
“긴장 좀 하게 커피나 한잔합시다. 재판에 긴장감이 없어요.”
“그러게요. 괜히 쫄았어요.”
2시간 후.
경위가 일어서서 절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재판이 시작됩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아까와는 달리 선동방 그룹 측 변호사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대한 그룹 측 변호사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들의 달라진 표정을 보며 최진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신주인수권부사채의 발행은 적법한 절차를 따랐고, 신주인수권부사채의 소유주가 될 한국의 대기업들.
‘무슨 근거로 의결권을 제한하겠어. 게임은 끝났네.’
의결권을 제한한다면, 대기업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선물을 도로 가져간다고?
설령 그 선물이 작은 것일지라도.
자신의 것을 뺏는다면 몽둥이로 내려칠 것이다.
피멍이 들도록.
“……신주인수권부사채 의결권 행사를 제한할 원고 측 소명이 부족하다. 이에 본 재판부는 신청인의 신청을 기각한다.”
-와아아!!!
-후우.
대한 그룹 관계자들은 방청객에서 환호성을 질렀고, 선동방 그룹 관계자들은 탄식을 쏟아냈다.
박승하와 이무열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법정의 분위기에 이상하게 우울해졌다.
그 낯선 감정에 그들은 얼른 밖으로 나왔다.
“오기 전엔 몰랐는데 와서 보니 승부는 정해져 있었네요.”
“선동방 그룹 대 대한 그룹끼리라면 싸워볼 만했을 텐데.”
“대기업이 끼어드니 이기던 싸움도 질 수밖엔 없었어요.”
“재준 씨 예상대로 됐네요.”
“힘센 놈이 승리한다······.”
이무열은 재준의 메모가 적힌 마지막 말을 보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승하 씨. 대한 그룹이 방어에 성공했으니 미레도홀딩스 주가는 제자리를 찾겠죠?”
“재준 씨는 이전보다 더 떨어질 거라 했어요.”
“더요?”
“네.”
“그럼, 폭락?”
박승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무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장이 난리 나겠네.”
이무열의 걱정에 박승하는 재준의 말이 떠올랐다.
-폭락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식을 매입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해야 할 일이 또 있나요?
폭락장을 걱정하는 박승하에게 던진 재준의 말.
‘시장은 시장일 뿐입니다.’
우리는 증권사 직원일 뿐이다.
걱정은 내 몫이 아니며.
선택과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 몫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반영한 시장의 몫이다.
우리는 미스터 마켓이 움직이는 대로 가야 한다.
“자, 맥주나 마시러 가요.”
“그럽시다.”
이때,
띠리리링.
최진기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서형길 실장님.”
-
“네? 회사로 다시 들어오라고요?”
-
모두 최진기를 바라보며 ‘우리 맥주 못 마시는 거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최진기가 전화를 끊자 저마다 한마디씩 쏟아냈다.
“퇴근 시간인데.”
“급하니까 전화했겠지요.”
“우리 같은 신입한테 무슨 급한 일이 있어요? 그리고 서형길 실장님은 기획실이고 우리 연구실인데. 부서가 완전 다른데, 왜 우릴…….”
“일단 들어가 봅시다.”
***
경제정책연구실.
어슬렁어슬렁.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다시 회사로 불려온 동기들의 얼굴은 어기적거리는 서양 좀비 그 자체였다.
재준은 동기 회식에 늦게라도 참석하려 했는데 다시 들어오는 동기들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맥주 마시러 간다더니 왜 들어오는 겁니까?”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으로 김혜림이 대답했다.
“서형길 실장님이 들어오래요.”
“왜요?”
“몰라요.”
“기획실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야 우린 모르죠.”
서형길 실장이 왜 연구실 일에 이래라저래라지?
“제가 가서 알아볼게요.”
“정말?”
“역시 재준 씨밖에 없다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
“믿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뭐야?
그리고 믿긴 뭘 믿어.
사이비 종교도 아니고.
험, 험.
마침 서형길 실장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형길 실장은 재준을 보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동기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오늘은 연말 결산이 끝나야 퇴근이 가능한 건 알고 있지?”
연말 결산?
모두 서로를 쳐다보며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몰랐어도 할 수 없고. 결산부서 업무가 너무 많아서 도와줘야 해.”
연말 결산.
쉽게 말해 1년 동안 들어 온 돈과 나간 돈을 더하고 빼서 남은 돈과 딱 떨어지게 만드는 작업.
연말 결산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서형길 실장의 표정은 밝았다.
“도와주지 않으면 결산부서는 철야를 해야 하는데. 모두 이 비극적인 상황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1년 중 마지막 날에 모든 직원이 결산부서를 도와주면서 12시에 퇴근하는 대한민국 금융계의 아름다운 풍습이 있다, 이 말이야.”
풍습이 아니라 관례겠지.
어쨌든 매년 연말이면 결산을 하는 건 맞다.
그런데 왜 웃고 있는 걸까?
뭔가 석연치 않은 핑계다.
서형길 실장의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그 증거였다.
도대체 12월 31일에 무슨 일을 벌어지는 걸까?
재준은 서형길 실장을 보며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정말 전 직원이 다 남습니까?”
“네…… 응.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남습…… 남는다.”
말을 살짝 더듬은 서형길 실장은 재준에게 다가와 동기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속삭였다.
-이따 아무도 모르게 실장실로 오시죠.
-왜?
-에헤, 이거, 이거.
서형길 실장은 불룩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주머니를 톡톡 건드렸다.
카드?
멀리서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자 네모난 모양은 영락없는 트럼프 카드 뭉치의 실루엣이었다.
재준에게서 떨어지며 살짝 윙크한 서형길 실장은 동기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어서 결산부서로 가서 도와주도록. 어서, 어서.”
재준과 동기들은 연구실 밖으로 나와 결산부서로 발걸음을 떼었다.
한데,
“이게 다 뭐예요?”
“우리 복귀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회사 꼴이 엉망이네요.”
“우리 회사 저녁에 도박장도 운영해요?”
김혜림은 주변 사무실과 회의실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그야말로 현재증권이 하나의 거대한 카지노가 되어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서넛씩 짝을 지어 카드 판을 벌였다.
순간 재준의 머릿속에 한 줄기 신문 기사가 지나갔다.
[또 사고! 연말만 되면 금융사에서 행해지는 도박 이대로 좋은가.]
아하, 이걸 말하는 거구나!
2000년부터 사라지는 이 진풍경은 1996년에는 벌어졌다.
서형길 실장의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진실은 결산부서가 1년간의 결산 서류를 열심히 대조하는 중이었다.
거짓은 다른 직원들이 결산부서를 도와줄 일이 없었다.
이미 전산화로 마무리가 되어있어서 결산부서 직원만으로도 충분했다.
근데 전 직원이 왜 남았을까?
굳이 핑계를 대자면 결산부서 혼자 남는 적막함을 서로 공유하자?
또는 일 년에 한 번 회사 안에서 삐뚤어져 버리고 말겠어?
직원 모두 다 같이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험?
“일단 결산부로 가봅시다.”
어리둥절한 동기들을 데리고 결산부에 도착했으나 역시 입구에서 출입을 거절당했다.
-도울 일 없고 방해되니까 들어오지 마!
매몰차게 입구 컷 당했다.
꼭 시장통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미아 같은 꼴로 다섯은 서로를 시선으로 위로했다.
자신은 미아가 될 수 없다는 의지로 최진기가 말했다.
“뭐하죠?”
“우리도 카드나 치죠.”
“전 도박은 안 합니다.”
“그럼, 원카드라도?”
“…….”
원카드?
이 사람들이 원카드라니,
초딩도 아니고.
재준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상하네.
나, 원래 카드는 못하지 않나?
근데 왜 자신 있는 걸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회의실에서 카드를 치는 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카드 배운 적이 있던가.
없는 것 같은데.
옆에서 슬쩍 구경했다.
휙휙휙 세 장의 카드가 놓이고 한 장을 오픈.
바닥에 카드가 한 장씩 오픈될 때마다 재준의 머릿속에 확률이 스쳤다.
신기하네.
왜 이게 계산이 되지?
삥, 삥.
뭐야.
레이스 한 장.
한 장 받고 두 장으로.
돈이 쌓이고.
이쪽은 왕족, 이쪽은 허리 아래, 저긴 에이스가 나오겠네.
역시 에이스를 받은 직원이 에이스 삼봉으로 돈을 챙겼다.
돈을 쓸어 담을 수 있겠는데.
대강 구경을 끝낸 재준은 발걸음을 실장실로 옮겼다.
재준이 사라지든 말든 곳곳에서 판은 계속되었고, 슬금슬금 시간이 지나 어느덧 12시에 가까워졌다.
하아품!
김혜림은 시계를 보며 기지개를 켰다.
“12시 다 되었네요.”
“그러게, 원카드도 슬슬 지루해져 가요.”
“지루? 방금 원카드 하다 사람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보았는데요?”
“에이 설마…….”
와!
모두 박승하를 노려보는데,
뎅!
보신각에서 새해를 알리는 33번의 타종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 주변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와 함께 악수를 나누었다.
동기들도 서로서로 새해 인사를 나누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게 또 이런 맛이 있네요.”
“그러게요. 증권사 연말, 담에 좀 준비를 해야겠어요.”
“우리도 퇴근해야죠?”
“퇴근해서 오늘, 아니 어제구나, 어제 하려던 맥주 한잔?”
“콜.”
“콜!”
이야기하는 도중 김혜림이 두리번거렸다.
“근데 재준 씨는 어디 갔어요?”
촤라락!
“그 맥주 제가 쏩니다.”
재준이 만 원짜리로 부채를 만들며 다가왔다.
펄렁 펄렁, 휘날리는 돈 부채.
족히 50장은 넘어 보였다.
“헉! 재준 씨 설마 딴 거예요?”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
“와, 재준 씨는 못하는 게 뭐예요?”
“못하는 걸 못해요.”
흠, 흠.
고, 고.
재준과 동기들이 하하호호 거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 멀리 실장실 앞에서 실장 네 명이 머리에서 허연 김을 풀풀 뿜어대고 있었다.
“서 실장, 신입이라며.”
“어째, 한 번을 못 잡냐.”
“마지막 나 세븐 포커 잡고 털리는 거 봤지.”
“그러게 스티플이라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서 실장. 말을 해봐? 돈 좀 만질 수 있다며. 완전 호구라며.”
“그러게. 분명 호구였는데.”
분명 호구였다고.
도련님, 설마 카드도 연습하신 겁니까?